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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가 끝난 후, 바이브는 젖은 손을 대충 제 바지에 닦으며 거실 소파로 향했다. 그는 소파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드러누워, 제 팔을 툭툭 치며 브리즈를 불렀다. 빨리 와서 여기 누우라는, 말없는 명령이었다. 브리즈가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눕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휘감듯, 그의 팔과 다리가 그녀의 몸을 포박했다.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기댄 채,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페퍼민트와 비누향,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샌달우드 향이 뒤섞여, 지독하게 안정적인 공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뭐 볼 건데. 내는 액션 영화가 좋은데. 그가 짐짓 투덜거리며 물었다. 이미 그녀가 고른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으면서도, 괜히 한 번 튕겨..
수송기 후미 램프가 굉음과 함께 열리자, 비릿한 바다 내음과 축축한 공기가 기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기스의 인공적인 공조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폐가 갑작스러운 습도 변화에 이물감을 느끼는 듯했다. 바이브는 맞잡은 브리즈의 손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불안해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다른 요원들이 줄을 맞춰 내리는 동안, 바이브는 그 행렬의 가장 뒤에 섰다. 그의 등 뒤로 브리즈를 숨기듯 자연스럽게 위치를 잡은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 부산스러움으로부터 그녀를 격리하려는 무의식적인 보호 본능이었다. 램프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황량했다.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녹슨 거인처럼 줄지어 서 있었고, 낡은 크레인은 바닷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갈매..
바이브는 브리즈의 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풍기는 달착지근한 냄새를 들이켜며, 입술 끝을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나른한 장난기와 함께 깊은 소유욕이 일렁였다. 거리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지는 감각, 4월의 늦은 오후, 공기 중에 섞인 햇살의 온기와 바람의 미세한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 완벽한 지도를 그려냈다. 그는 언제나 이 감각의 폭풍 속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브리즈가 곁에 있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정보가 날카로운 가시에서 부드러운 실크로 변모했다. 그녀의 옅은 샌달우드 향이 그의 팽팽했던 신경을 다독이는 덕분이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얇은 가디건 너머로 그녀의 심장 박동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주변의 공기 입자를 미세하게 조율..
마침내, 약속했던 공동 휴일이 찾아왔다. 목적지는 브리즈가 몇 주 전부터 예약해두었다는, 시내의 고급 드레스 샵. 아이기스의 전용 게이트를 통과해 오랜만에 밟는 바깥세상의 공기는 조금 탁했지만, 그마저도 낯선 설렘으로 다가왔다. 바이브는 평소의 제복 대신 깔끔한 검은색 슬랙스에 흰 셔츠, 그 위에는 얇은 가디건을 걸친 편안한 차림이었다. 옆에서 걷는 브리즈 역시 평소의 제복이 아닌,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번화한 거리를 걷는 이 순간은, S급 센티넬 ‘바이브’가 아닌, 그저 스물세 살의 ‘홍지원’이 된 것 같은 기묘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문제는, 그 해방감과 동시에 밀려드는 지독한 어색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브리즈를 힐끗 쳐다보았다..
바이브는 얌전히 앉아 그녀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제 머리를 만지는 그녀의 행동에 그는 실소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비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무장을 해제당한 패자의 만족스러운 미소에 가까웠다. 그녀의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찌르르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저 머리를 만지는 것뿐인데, 마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손길에 지배당하는 기분이었다. 두피를 가볍게 긁어내리는 섬세한 감촉에, 그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처럼 목을 늘이며 눈을 감았다. 나른하고, 평화롭고, 위험할 정도로 안락했다. 지원 씨 머릿결이 나보다 좋은 것 같아요.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말에, 그의 입꼬리가..
바이브는 제 품에 안긴 채 부산스럽게 단말기를 조작하는 브리즈의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알록달록한,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한 색색의 동그라미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열댓 개. 그는 속으로 숫자를 세어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저 조그만 걸 대체 몇 개나 시키는 거야. 그는 브리즈가 뭔가에 찔리는 듯, 슬쩍 제 눈치를 보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냉, 냉장고에 넣어 두면 며칠 먹을 수 있어요. 이거 다 오늘 다 먹으려고 시킨 거 아니니까… 이, 이만큼 하루에 다 먹으면 살 찌죠. 단어들이 띄엄띄엄 귓가에 박혔다. 그는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인상을 팍 썼다. 미쳤나, 홍지원. 이 여자는 진짜 자기가 무슨 짓을 하..
식사의 만족감과 나른한 포만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는 이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오늘 하루를 천천히 반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생일이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그렇게 단정 짓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을 때만 해도, 그는 그저 물이라도 마시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그의 모든 평온을 다시 한번 뒤흔들기에 충분한, 자그마한 치즈 케이크였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조그만 물체를 쳐다보았다. 제 주먹만 한 사이즈. 호텔에서 먹었던 화려한 디저트와는 비교도 안 되게 소박했다. ‘소원을 안 빌었더라고.’ 머쓱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간질였다. 아, 소원. 그는 살면서 생일 케이크 앞에서 소원을 빌어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