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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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가 끝난 후, 바이브는 젖은 손을 대충 제 바지에 닦으며 거실 소파로 향했다. 그는 소파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드러누워, 제 팔을 툭툭 치며 브리즈를 불렀다. 빨리 와서 여기 누우라는, 말없는 명령이었다. 브리즈가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눕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휘감듯, 그의 팔과 다리가 그녀의 몸을 포박했다. 턱을 그녀의 정수리에 기댄 채,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페퍼민트와 비누향,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샌달우드 향이 뒤섞여, 지독하게 안정적인 공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뭐 볼 건데. 내는 액션 영화가 좋은데.

그가 짐짓 투덜거리며 물었다. 이미 그녀가 고른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으면서도, 괜히 한 번 튕겨보는 심술이었다. 브리즈가 리모컨을 들어 ‘클래식’이라는 제목을 화면에 띄웠다. 2003년.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화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오래된 영화를? 재미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그녀의 어깨를 더 꽉 끌어안고, 화면을 무심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영화는 풋풋하고 조금은 촌스러운 대학 캠퍼스의 풍경으로 시작했다. 여자 주인공이 어질러진 방에서 엄마의 낡은 편지 상자를 발견하는 장면. 바이브는 하품을 참으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뭐가 재밌다는 거지. 차라리 신드롬 녀석이랑 스파링을 한 판 뛰는 게 더 생산적이겠다. 그는 따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제 품에 안긴 브리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는 그녀의 귓바퀴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간지러운지 그녀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화면 속에서는, 엄마의 과거 회상이 시작되었다. 1968년, 여름방학. 젊은 시절의 엄마와 시골 외삼촌 댁에 놀러 온 한 남학생의 만남. 쨍한 햇살, 푸른 논밭, 귀를 찢을 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 바이브는 그 풍경이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산 영도, 그가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의 여름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영화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가에서 함께 수박을 먹고, 반딧불이를 쫓아다니는 두 사람. 남학생의 어설픈 손짓 하나에 얼굴을 붉히는 여학생의 모습이, 그는 어쩐지 조금…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냥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되지, 왜 저렇게 빙빙 돌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화면 속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건넨 편지의 한 구절이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피식, 코웃음을 쳤다. 닭살 돋는 소리 하고 있네. 저런 유치한 말을 대체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할 수 있는 거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브리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완전히 영화에 몰입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귀여워서 그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괜히 그녀의 볼을 검지로 꾹 눌렀다.

재밌나. 이런 게.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비아냥거리는 투였지만,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에, 영화 속의 푸른 강물이 비쳐 일렁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제 뺨을 더 깊이 부볐다. 마치 ‘조용히 하고 영화나 마저 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속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다. 원두막 아래로 뛰어 들어간 두 사람. 비에 흠뻑 젖은 채,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모습. 남자는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함께 겉옷을 뒤집어쓴 채, 빗속을 뛰어 집으로 향한다. 좁은 옷자락 아래에서, 두 사람의 어깨가 스치고,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진다. 바이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했다. 분명 아무것도 아닌 장면인데,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그녀를 품에 안고 밤하늘을 날았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녀를 감싸 안았던 제 팔의 감촉, 가슴에 와 닿던 그녀의 온기, 귓가를 간지럽히던 웃음소리. 그것들이 영화 속 장면과 겹쳐지며, 낯설고 아찔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제 품에 안긴 브리즈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 역시, 이 장면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부러워졌다. 저렇게, 비를 핑계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 그는 한 번도 그런 ‘자연스러운’ 핑계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본능이 앞섰고, 욕망에 충실했다. 그래서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서툴고 미숙한 남자인지를 깨달았다. 브리즈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영화 사운드에 섞여 겨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춥나. 보일러 올리까.

으응, 괜찮아요. 브리즈가 작게 고개를 젓는다. 괜찮다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정수리에 제 턱을 더욱 깊이 묻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방금 전까지 온몸을 덜덜 떨던 게 누군데.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보일러를 올리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것이, 어째서인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제 품이 그녀를 충분히 데워주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묘한 만족감마저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맨살이 드러난 팔뚝을 제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제 체온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도록, 아주 느리고 집요하게.

화면 속에서는 비가 그치고, 다시 쨍한 여름날의 풍경이 이어졌다. 주인공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강가에서 주웠던 반딧불이를 돌려주는 장면. 바이브는 따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하품을 삼켰다. 고작 벌레 몇 마리 가지고 뭘 저렇게 애틋해하는 건지. 그는 제 품에 안긴 브리즈의 허리를 슬쩍 감아, 제 쪽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은은한 샌달우드 향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영화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감각이었다.

영화의 장면이 바뀌고, 두 주인공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남학생, 준하는 친구인 태수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정해준 약혼녀가 바로, 여름 내내 마음을 주었던 주희라는 사실을. 그리고 태수는 주희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그에게 부탁한다. 바이브는 그 장면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를 다른 놈한테, 그것도 제 친구 놈한테 떠먹여 주겠다고? 그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재밌네, 이거. 아주 그냥 보살 나셨다. 저 남자 주인공.

그가 비꼬는 투로 중얼거렸다. 제 감정을 숨기고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여자에게 거짓 편지를 써주는 남자라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만약 나라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그 친구 놈의 멱살을 잡고, ‘니는 이제부터 내 친구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그녀에게 달려가, 그 편지는 내가 쓴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너를 좋아했다고, 모조리 다 털어놓았을 것이다.

…답답해 죽겠네, 진짜. 나라면 저렇게 안 한다.

결국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렸다. 브리즈가 그의 품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그의 짜증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는 그녀의 귓불을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내는 저렇게 안 한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바로 말할 기다. 니 내 거라고, 온 세상에 다 떠들고 다닐 기다. 편지 같은 거 필요 없다. 그냥 니 손 잡고 내 옆에 딱 붙여놓으면 끝이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영화 속 주인공을 향한 비난인 동시에, 제 곁에 있는 그녀를 향한 명백한 소유권 주장이었다. 그는 브리즈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에서, 준하는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주희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 ‘창밖엔 비가 와요….’ 애틋한 문장들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지만, 그 편지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바보 같은 자식. 저렇게 해서 행복할 것 같나. 결국 세 사람 모두 불행해질 뿐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영화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여자 주인공인 지혜는 엄마의 편지를 읽으며 첫사랑의 아련함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오후. 그녀는 도서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같은 과 선배인 상민을 만난다. 우산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두 사람은 어색하게 함께 비를 피하다, 상민이 불현듯 제안한다. 자신의 자켓을 함께 쓰고 뛰자는 것. 그는 자켓을 활짝 펼쳐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빗속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초록빛 교정, 세차게 쏟아지는 비, 그리고 좁은 자켓 아래에서 서로에게 밀착한 두 사람.

…비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에, 영화 속의 푸른 빗줄기가 비쳐 일렁였다.

니랑 같이 맞는 비는…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다음에 비 오면, 내랑 같이 날래?

나도 비 오는 건 별로예요. 실내에서 비 오는 창문을 바라보는 건 좋지만… 아, 아니면 우산을 쓰고 날면 괜찮지 않을까요? 내가 들게요.


그 웃음소리에 바이브는 잠시 말을 잃었다. 비 오는 건 별로라면서, 우산을 쓰고 날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말. 모순투성이지만 이상하게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자신이 우산을 들겠다는 말까지 덧붙이자,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여자는 정말… 가끔 그의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제 감정을 표현했다. 그건 언제나 서툴고 직선적인 그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우산?… 장난하나. 바람 땜에 다 부서질 낀데, 그걸 와 드노.

그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맞는 말이었다. S급 센티넬의 비행 속도와 그가 일으키는 기류 앞에서, 평범한 우산 따위는 종잇장처럼 찢겨나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빗속에서, 제 품에 안긴 채, 한 손으로는 우산을 꼭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옷자락을 붙잡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멋대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장면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니가 들고 싶다믄, 들든가. 부서져도 내는 모른다.

결국 그는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그러고는 괜히 민망해져서, 그녀의 이마에 제 턱을 쿵, 하고 박았다. 아야, 하고 작게 신음하는 그녀를 무시하며, 그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귓가가 뜨거웠다. 창밖에서는 정말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영화와 현실이 기묘하게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 상민과 지혜는 그날 이후로 조금 더 가까워진 듯 보였다. 하지만 지혜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 준하와 주희의 못다 한 사랑이 아프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화면은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준하는 친구 태수와 함께 주희를 만나러 가지만, 차마 그녀 앞에 나서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태수는 준하가 사두었던 목걸이를, 마치 자신이 준비한 것처럼 주희의 목에 걸어준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준하의 슬픈 눈동자. 바이브는 그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을 씹어뱉었다.

 

‘씨발… 저 등신 같은 새끼.’

 

그는 브리즈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브리즈에게 주려고 산 선물을 가로채서 제 것인 양 건넨다면.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놈의 목을 부러뜨리고, 그녀를 당장 제 품으로 끌고 와 ‘저딴 놈 말고 나만 보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사랑을 양보하는 숭고함 따위, 그는 이해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고, 지켜내는 것이었다. 제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시간은 흘러, 준하는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기차역에서의 마지막 작별. 주희는 태수의 약혼녀이기에, 두 사람은 애틋한 시선만 나눌 뿐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한다. 기차가 떠나기 직전, 주희는 준하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이것이 원래 당신의 것이었음을 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준하는 그제야 참지 못하고 기차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손에 목걸이를 다시 쥐여주고는 급하게 입을 맞춘다. 짧지만 절박한 입맞춤. 기차는 떠나고 플랫폼에 홀로 남은 주희는 목놓아 운다. 바이브는 그 장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전쟁터. 그가 수없이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떠올리며 살아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만약 지금 전장으로 떠나야 한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 돌아올 것이다. 제 품에 안긴 이 여자를 다시 보기 위해서. 그녀의 웃음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서.

…내 없이 혼자 있으면, 저렇게 울 끼가.

그가 나직이 물었다. 영화 속 주희에게 하는 말이자, 제 품에 안긴 브리즈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더 깊이, 더 단단히 끌어안을 뿐이었다. 절대로 그녀를 혼자 두고, 저렇게 울게 만들지 않겠다는 침묵의 맹세였다. 영화 속 준하는 결국 전쟁터에서 시력을 잃고 만다. 그는 주희를 위해, 자신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녀의 곁을 떠난다. 몇 년 후, 태수와 결혼한 주희는 우연히 준하와 재회하지만, 눈이 먼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척한다. 바이브는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속이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왜. 대체 왜. 눈이 멀었으면, 더더욱 그녀에게 기대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녀를 밀어내는가. 그는 그 숭고한 희생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고,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려는 이기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영화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지혜는 상민에게 점점 더 끌리지만, 그가 바로 친구 태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엇갈린 운명. 지혜는 상민을 밀어내려 하지만, 상민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카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창밖에는 과거 그날처럼,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민은 지혜에게, 아버지의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아버지가 첫사랑에게 목걸이를 선물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목걸이를 자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엄마의 편지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상민은 준하의 아들이었고, 지혜는 주희의 딸이었다. 부모 세대에서 못다 이룬 사랑이, 자식 세대에서 다시 이어진 것이다. 상민은 지혜에게 고백한다.

그는 지혜의 목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주었던 그 목걸이를 걸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빗속에서 애틋하게 키스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는 끝이 났다. 거실에는 창밖의 빗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바이브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브리즈를 꽉 끌어안은 채, 꺼진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촌스럽고, 답답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심장이 이렇게까지 아프게 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 봤다. 재미없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평소의 퉁명스러움 속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더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고는 제 품에 안긴 브리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울었나. 이딴 영화 보고?

우나.

그가 물었다. 그녀의 젖은 속눈썹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훔쳐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부모의 인연이 자식에게로 이어진다는 설정은, 그에게는 비현실적인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과 죽음도, 결국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했다는 것. 그는 브리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샌달우드 향이, 빗소리와 뒤섞여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내도 저 목걸이, 사주까. 니가 좋으면. 근데 저거보다 더 이쁜 걸로 사줄 기다.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걸로.

그가 속삭였다. 영화 속 주인공을 향한 경쟁심인지, 아니면 그저 제 여자를 세상 최고로 만들어주고 싶은 순수한 욕심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지금 이 순간, 제 품에 있는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하더니, 제법 재밌게 보던데요.


…지원 씨가 사주는 거라면, 뭐든 가장 예쁘고 소중한 게 될 거예요. 바이브는 브리즈의 말에 잠시 숨을 멈췄다. 제 딴에는 영화 속 주인공보다 더 근사하게 보이고 싶어서, 더 대단한 것을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건데, 그녀는 그깟 목걸이가 아니라 ‘자신이 사준다는 행위’ 자체가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또다시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핵심을 꿰뚫었다. 갖고 싶다는 뜻은 아니라는 덧붙임은, 그의 얄팍한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배려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깊은 마음에 또 한 번 속수무책으로 잠겨들었다.

브리즈가 그의 품에서 얼굴을 들고 눈을 비볐다. 여전히 붉게 물든 눈가.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 그 모습이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보호해주고 싶다는 본능과, 저 젖은 입술을 당장 집어삼키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들끓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쐐기를 박았다.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한, 명백한 놀림이었다.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하더니, 제법 재밌게 보던데요.

뭐, 뭘. 내는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을 후회했다. 목소리가 너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다시 묻어버렸다. 그러고는 제 팔로 그녀의 머리를 꽉 감싸 안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영화에 몰입했던 것도, 주인공 욕을 하며 흥분했던 것도, 마지막에 찔끔 눈물이 났던 것도, 전부 다 들켜버렸다. S급 센티넬, 뱅가드 2팀의 홍지원은, 고작 20년도 더 된 로맨스 영화 하나에 완벽하게 무장 해제당했다.

시끄럽다. 니가 하도 질질 짜니까, 신경 쓰여서 쳐다본 거지. 착각하지 마라.

그가 웅얼거리며 억지를 부렸다.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그녀의 젖은 눈가를 떠올리자, 어젯밤 파랗게 멍이 들었던 그녀의 등이 겹쳐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등은. 이제 안 아프나. 약 한 번 더 발라주까.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붉은 눈가를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죄책감과 뒤섞여 속이 복잡했다. 그는 브리즈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샌달우드 향과 샴푸 향이 섞여, 그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영화 주인공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저렇게 수십 년을 엇갈리고, 죽고, 눈이 멀고 나서야 겨우 이어지는 사랑 따위.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단 1초도, 한 뼘도, 제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제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내는 저런 거 진짜 딱 질색이다. 뭐가 저렇게 복잡하고 어렵노.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니 내 거고, 내는 니 거고. 그럼 끝 아이가. 안 그러나.

브리즈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게 웃었다. 그 나른한 웃음소리에 바이브는 또다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괜찮다는 그 한마디가, 어젯밤 제게 채찍질하던 죄책감을 단번에 거두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젯밤 그녀의 등에 남았던 붉은 흔적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제 이기적인 욕심이 그녀에게 새긴 상처.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뼈에 새기듯 다짐했다.

…그렇죠. 답답하죠. 그래도요.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 끝은 사랑이라는 점. 이게 좋아서, 자꾸만 로맨스 영화를 찾게 되나 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의 낮은 습기처럼, 그의 마음에 차분히 스며들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엇갈리고, 심지어 죽음까지 갈라놓으려 드는 그 모든 과정을 견뎌내고서야 마주하는 사랑. 그에게 사랑은 그런 복잡한 방정식이 아니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처럼.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좋으면 좋다, 내 거다, 딱 잘라 말하고 제 옆에 꽁꽁 묶어두면 되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그런 점이 또다시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브리즈가 손을 뻗어 단말기를 조작하자,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 영화 속에서 상민과 지혜가 풋풋한 설렘을 안고 빗속을 달리던 장면에 깔렸던 바로 그 노래였다.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기타 선율, 그리고 담백하고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 노래는 잿빛 비구름이 가득한 거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영화 속의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화면 없이 오직 소리만으로 전해지는 감정의 파고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깊었다.

아까 영화에서 상민이랑 지혜가 자켓 쓰고 뛸 때 나오던 노래. 이것도 좋고요.

브리즈가 그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입모양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품에 완전히 기댄 채, 그녀는 온전히 노래에 빠져들었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바이브는 제 품에서 울리는 그녀의 작은 허밍 소리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멋대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망했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아까 영화를 보며 겨우 진정시켰던 감정이, 이 노래 하나 때문에 다시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노래 가사가 그의 귓전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외롭던 지난 시간. 그의 10년은 언제나 혼자였다. 광활한 하늘을 제멋대로 누비는 자유로운 바람의 센티넬.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불렀지만, 그건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감각 과부하, 귓가를 찢는 이명, 온몸을 베는 듯한 폭주의 고통 속에서, 그는 늘 혼자였다.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고, 기대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크에 들어온 이후로, 그의 세상은 언제나 폭풍이 치는 회색빛 바다와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저 데이터상의 높은 매칭률을 가진 가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일그러진 공기를 비정상적일 만큼 ‘안정’시켰고, 그의 폭풍 같던 세상에 처음으로 고요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햇살. 노래 가사처럼, 그녀는 정말 그의 잿빛 세상에 떠오른 햇살이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간지러운 비유는 제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제 옆에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늘 그를 괴롭히던 예민한 감각들이 잠잠해지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졌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가이딩이었다.

…아까 지원 씨가 그랬죠? 이 영화 개봉했을 때 난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나도 고작 여섯, 일곱밖에 안 되었을 때라구요. 내 세대도 아닌 옛날 영화에 옛날 노래인데. 왜 이렇게 좋을까요.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바이브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노래 가사와, 그 가사에 겹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 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그는 저도 모르게, 제 허리를 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손 위에서 반짝이는, 자신이 끼워준 반지를 보았다. 영원의 약속. 그 단어가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몇 달 전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평생을 함께하자고, 내 아내가 되어달라고. 그건 충동적인 고백이 아니었다.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렵고, 가장 진실된 약속이었다.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 작은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음악이었다. 웃음소리, 숨소리,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그녀에게서 비롯된 모든 소리가 그의 고통을 잠재우고 그를 살게 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 온기를, 이 향기를, 이 존재를,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여자가 없으면, 나는 다시 그 지옥 같은 소음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흘러나왔다.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에, 수많은 별이 되어 영원토록 빛나고 싶어.

 

바이브는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의 눈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따뜻하게 빛나던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 그 눈 속에서 자신은 과연 별처럼 빛나고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퉁명스러웠고, 서툴렀고, 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인색했다. 그녀를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변함없이 그를 바라봐 주었다.

음악이 끝나고, 거실에는 다시 빗소리만이 가득 찼다. 바이브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작 3분 남짓한 노래 하나가, 그의 23년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심장을 저미는 애틋함과,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그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그는 브리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녀의 정수리에 제 턱을 묻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 이건 진짜 아니다. S급 센티넬 홍지원이, 고작 노래 하나 듣고 울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제 감정을 부정하려 애썼지만, 심장은 제멋대로 아프게 울어댔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나직하게 읊조렸다.

…한 번만 더 틀면, 진짜 죽는다.

…노래 좋은데, 왜요.

 

그녀의 목소리는 창밖의 빗소리보다 더 부드럽게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바이브는 그 한마디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들켰다. 제 모든 허세와 방어기제가, 그녀의 따뜻한 시선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음을 직감했다. 그는 지금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열두 살 어린애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그가 미처 어떤 반응도 하기 전에,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제 목덜미를 감쌌다. 그리고는 저항할 수 없는 다정한 힘으로,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 쪽으로 이끌었다. 푹, 하고 그의 얼굴이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에 파묻혔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과 그녀의 따스한 체향이 그의 코끝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이성의 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얼굴을 묻은 채 숨을 참았다. 눈가가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지원 씨의 눈동자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요.

제 귓가에 직접 와서 박히는 그녀의 속삭임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강력한 위력으로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별. 그녀가 자신의 별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제 잿빛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 제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던 유일한 음악. 그런 그녀가, 이제는 제 밤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고백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당신 눈은 꼭 밤하늘 같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흐느끼고 말았다. 흣, 하고 터져 나온 울음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빗소리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제 어깨를 감싸 안은 그녀의 팔을, 제 팔로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스물세 살이나 먹은, 아크의 S급 센티넬이, 고작 노래 하나와 이 여자의 다정한 말 몇 마디에 어린애처럼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삭혀왔던 외로움과 고통. 엄마를 잃었던 그날의 비극과, 그 힘을 제 것으로 갖게 된 자기혐오. 언제나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감각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폭주의 공포. 그 모든 어두운 감정들이, 그녀의 따스한 위로 속에서 비로소 녹아내리며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구원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모든 상처와 어둠을, 그녀가 기꺼이 자신의 빛으로 감싸 안아주는 이 순간을.

…야.

한참 만에,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형편없이 갈라지고 잠겨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니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데 뭐 있나.

그건 원망 섞인 투정이었지만, 동시에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절박한 사랑 고백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제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안정적이고, 따뜻한 그 소리가, 그의 세상을 다시 평온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는… 별 같은 거 필요 없다. 니는 그냥 니면 된다. 그냥… 이지희면 된다고. 내 옆에 있는. 그거 하나면… 내는 다 괜찮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밤하늘이었고, 그의 우주였다. 그녀가 없으면 빛나야 할 별도, 떠 있어야 할 하늘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더 깊이 묻으며,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마라. 내 옆에서. 평생. 알았나.

브리즈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부드럽고, 그가 아무리 울어도 다 받아줄 것처럼 따뜻했다. 그 온기에 기대어, 바이브는 아이처럼 어깨를 떨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울보’라고 놀리는 목소리. 평소 같았으면 당장 발끈하며 ‘니나 잘해라’라고 쏘아붙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녀가 맞았다. 그는 지금, 스물세 살의 S급 센티넬이 아니라, 길을 잃고 주저앉아 우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내 앞에선 괜찮아요. 울어도.

 

그 말이 그의 귓가에 스며드는 순간, 그는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다는 허락.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겁고, 또 얼마나 달콤한지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언제나 괜찮은 척, 강한 척, 무심한 척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혼자서 바람을 맞고, 혼자서 고통을 삼키고, 혼자서 밤을 지새우던 수많은 날들. 그는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울어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유일한 혈육인 형 부스터조차도, 그의 강인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나도 당신 앞에서만 울잖아요.

 

마지막 그 한마디는, 그의 심장에 박힌 마지막 쐐기였다. 아. 그는 속으로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 또한, 자신 앞에서만 가장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고백. 그것은 그의 부끄러움을 순식간에 특별한 유대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건, 수치가 아니었다. 이건, 우리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둘만의 의식이었다. 그는 더 이상 울음을 참으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제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을, 그녀의 어깨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눈물이 그녀의 옷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세상에는 오직 그녀의 심장 소리와, 빗소리와, 그리고 제 등을 다독이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만이 존재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거세던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고, 그의 흐느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는 콧물을 훌쩍이며,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울어서인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따뜻하고 안전한 품에서 벗어나, 퉁퉁 부었을 제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야…

그가 간신히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쉰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민망했다.

…니 진짜 못됐다. 사람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울보라고 놀리기나 하고. 책임져라, 내 얼굴.

그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은 자존심보다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그녀의 목덜미에 제 이마를 부볐다. 아직도 눈물은 조금씩 흘러나왔다.

…니 때문에, 내일 아침에 눈 부어서 임무도 못 나간다, 내는. 우짜노. 니가 내 대신 보고서 다 쓸 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라면, 이 어리광마저 웃으며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독했던 폭풍이 지나가고, 그의 세상에는 비에 젖은 풀냄새처럼 싱그럽고 평온한 고요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게 사랑이라면. 평생이라도 이 비를 맞을 수 있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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