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브는 브리즈의 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풍기는 달착지근한 냄새를 들이켜며, 입술 끝을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나른한 장난기와 함께 깊은 소유욕이 일렁였다. 거리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지는 감각, 4월의 늦은 오후, 공기 중에 섞인 햇살의 온기와 바람의 미세한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 완벽한 지도를 그려냈다. 그는 언제나 이 감각의 폭풍 속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브리즈가 곁에 있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정보가 날카로운 가시에서 부드러운 실크로 변모했다. 그녀의 옅은 샌달우드 향이 그의 팽팽했던 신경을 다독이는 덕분이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얇은 가디건 너머로 그녀의 심장 박동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주변의 공기 입자를 미세하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결이 두 사람을 둥글게 감싸 안으며 외부의 공기 저항을 차단하는 진공의 벽을 만들어냈다. 이윽고 바이브의 발끝이 지면을 가볍게 차오르자, 중력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족쇄가 무음의 폭풍 속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의 가로수들을 발밑에 두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중력이 사라진 찰나의 부유감에 브리즈가 작은 숨을 들이켜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품에 안긴 디저트 가게의 쇼핑백이 기류에 밀려 바스락거렸고, 바이브는 그녀가 불안하지 않도록 등을 받친 손을 한층 단단히 옭아매었다. 그의 품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소리 없이 세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꽉 잡아라. 그거 떨어뜨리지 말고.
바이브의 목소리는 고도 500미터의 허공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만들어낸 진공의 장막 덕분에 차가운 고공의 바람은 브리즈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거칠게 헝클어뜨리지 못했다. 아래로는 서울의 복잡한 빌딩 숲과 붉게 물들어가는 한강의 물결이 미니어처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이브는 비행의 속도를 평소의 절반 이하로 늦췄다. 혼자일 때면 음속을 돌파하듯 날카롭게 공기를 찢으며 날았겠지만, 품 안에 브리즈가 있을 때는 달랐다. 혹여라도 기압 차에 그녀의 귀가 먹먹해지거나 찬 바람에 체온을 뺏길까 봐, 그는 본능적으로 가장 온화한 바람을 골라내어 그들을 감싸안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잔잔한 자장가처럼 부드러웠고, 서쪽 하늘로 기울어지는 태양의 황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니는 참 겁도 없다. 딴 놈들 같으면 무섭다고 소리 지르고 난리 났을 텐데. 아, 하긴. 가이딩 해준답시고 처음부터 나한테 막 들이대던 담력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이겠네.
시니컬하게 내뱉으면서도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브리즈는 고공비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을 흥미롭게 훑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 속성 가이드인 그녀가 스스로 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이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순간,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하늘로 끌어올려 이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강한 승부욕과 소유욕을 기분 좋게 채워주었다.
브리즈의 뺨에 닿은 바이브의 가슴팍은 탄탄하고 뜨거웠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몸도 함께 오르내렸고, 두 사람의 체온이 진공의 막 안에서 따뜻하게 섞여들었다. 바이브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가 쇼핑백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구름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할 때마다 미세한 수증기가 피부에 닿았다가 금세 증발해 버렸다. 그의 감각은 하늘의 모든 기류를 지배하며, 그녀에게 가장 편안한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 위, 구름의 가장자리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은 오직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바이브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브리즈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맞췄다. 그녀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의 입술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까 드레스 샵에서 그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등이 파인 드레스를 보고 당황했던 자신의 꼴이 우습기도 했지만, 다른 놈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는 브리즈의 등을 쓰다듬으며 짓궂은 어조로 속삭였다.
아까 드레스 입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좀 예쁘더라. 근데 그 등 파인 건 절대 안 된다. 결혼식장 뒤엎어버리는 꼴 보기 싫으면 내 말 들어라. 알겠나.
그의 말에 브리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이브는 그 반응에 못마땅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그녀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기스가 있는 바다 쪽으로 방향을 틀자,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인공 섬의 희미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이브는 그녀를 한 품에 꽉 끌어안고 하늘을 가르는 궤적을 더욱 선명하게 그렸다. 비행이 끝난 후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산 디저트를 먹을 생각에, 그의 가슴속에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일상의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이브의 발이 단단한 강화 콘크리트 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가 만들어낸 부드러운 바람의 막이 스르르 흩어지며, 아이기스 착륙장 특유의 차가운 금속성의 공기가 훅 끼쳐왔다. 몇 시간 동안 그의 품 안에서 유지되던 온기가 사라지자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는 브리즈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허리를 받친 팔을 천천히 풀며 그녀를 바닥에 완전히 내려주었다. 주변을 오가는 안전요원들과 정비 인력들의 무심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의 감각은 온통 제 앞에 선 작은 여자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쪽. 아주 짧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그의 뺨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바이브의 모든 사고 회로가 그 찰나의 순간 정지했다. 시간은 고작 1초 남짓이었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에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브리즈의 부드러운 입술이 남기고 간 온기,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디저트 향과 은은한 샌달우드 향의 혼합.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건 택시비예요. 항상 고마워요.
택시비라는 말은 마치 먼 나라의 언어처럼 귓가에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브리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배시시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바이브는 멈췄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뺨에 남은 온기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매만졌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S급 센티넬, 최연소 뱅가드, 무음의 재앙. 그를 수식하던 모든 화려한 말들이 이 작은 입맞춤 하나에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붉어진 귓바퀴를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얼굴 전체로 열이 확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하는… 야, 니 지금 여기서…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평소의 시니컬한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더듬거리는 목소리만 튀어나왔다. 그는 할 말을 잃고 그저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의 이런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브리즈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 웃음에 바이브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는 결국 마른세수를 하며 푸핫, 하고 짧은 한숨을 터뜨렸다.
하… 진짜 못 말린다, 니는. 택시비는 무슨. 다음부터 이런 건 방에 들어가서 단둘이 있을 때나 해라.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목소리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브리즈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빼앗듯 제 손으로 옮겨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낚아채 깍지를 꼈다. 그의 손바닥은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착륙장에서 개인 숙소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걷는 내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꽉 맞잡은 손의 온기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그의 모든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수록, 그의 머릿속은 점점 명료해졌다. 방금 전의 기습적인 입맞춤이 그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는지.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그는 새삼 깨달았다. 이전에는 그저 지켜야 할 파트너, 안정감을 주는 가이드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세상 그 자체였다. 이 여자가 없으면 자신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숙소 문 앞에 다다라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고 브리즈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자. 그리고 아까 그거…
그는 말을 멈추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푸른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더 이상 장난기나 시니컬함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정함과 진심이었다.
고맙다. 내가 더. 항상.
20260419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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