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약속했던 공동 휴일이 찾아왔다. 목적지는 브리즈가 몇 주 전부터 예약해두었다는, 시내의 고급 드레스 샵. 아이기스의 전용 게이트를 통과해 오랜만에 밟는 바깥세상의 공기는 조금 탁했지만, 그마저도 낯선 설렘으로 다가왔다. 바이브는 평소의 제복 대신 깔끔한 검은색 슬랙스에 흰 셔츠, 그 위에는 얇은 가디건을 걸친 편안한 차림이었다. 옆에서 걷는 브리즈 역시 평소의 제복이 아닌,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번화한 거리를 걷는 이 순간은, S급 센티넬 ‘바이브’가 아닌, 그저 스물세 살의 ‘홍지원’이 된 것 같은 기묘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문제는, 그 해방감과 동시에 밀려드는 지독한 어색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브리즈를 힐끗 쳐다보았다. 설레는 것 같기도, 동시에 조금은 긴장한 것 같기도 한 복잡한 표정. 그녀는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이따금씩 꽉 쥐었다가 살짝 힘을 풀기를 반복했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의 감각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덩달아 그의 심장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드레스 샵.’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그것은 더 이상 막연한 미래가 아닌, 코앞으로 다가온 현실의 증표였다. 이 여자가 정말로 자신의 아내가 된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목구멍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젠장, 괜히 나온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속으로 수십 번은 되뇌었을 불평을 애써 삼켰다. 여기서 또 퉁명스럽게 굴었다가는 며칠 전의 악몽이 되풀이될 뿐이다. 그는 학습 능력이 뛰어난 센티넬이었다. 한 번 당한 실수는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슬쩍 힘을 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여전히 정면만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의 무심한 톤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사람 존나 많네. 예약 시간 늦는 거 아이가.
역시나, 튀어나온 말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불평이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네가 긴장하는 것 같으니 내가 괜히 다른 소리를 해서 신경을 돌려주겠다’는 서투른 배려가 숨어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의도가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힐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기분 나빠하는 대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시간 괜찮아요. 거의 다 왔어요, 저기 코너 돌면 바로예요. 지원 씨야말로, 표정이 왜 그렇게 굳어 있어요? 내가 아니라 지원 씨가 드레스 입는 사람 같아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지적에, 그는 뜨끔해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젠장, 티가 났나.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코너를 돌자마자 화려한 쇼윈도가 눈에 들어왔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가, 마치 이쪽을 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끄럽다. 니나 잘해라.
바이브는 입구에서 그를 맞이하던 직원들의 과도한 친절함에 이미 질려버린 참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의 소음은 완벽히 차단되고 오직 낮은 클래식 음악과 달콤한 향기만이 공간을 채웠다. 사방이 눈부신 흰색이었다. 벽도, 소파도, 심지어 공기마저도 하얗게 빛나는 것 같은 착각. 그는 제복이 아닌 사복 차림인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브리즈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브리즈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가방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잠시 그 아담한 가방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얌전히 끌어안았다. 이 작은 가죽 덩어리가 지금 자신의 유일한 아군인 것만 같았다. 젊은 직원들이 그녀의 옆에 앉아 온갖 전문 용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머메이드, A라인, 벨라인…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가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이 공간에 이물질처럼 느껴져, 괜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창밖을 보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제 옆의 여자에게로 향했다. 카탈로그를 넘기는 하얀 손가락, 직원의 설명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그란 정수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녀의 옆얼굴. 임무 브리핑을 들을 때도 저렇게 집중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속으로 같잖은 투정을 부리면서도, 홀린 듯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술, 미간에 희미하게 잡힌 주름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이 낯선 공간에서 유일하게 현실감을 주는 존재였다.
젠장. 바이브는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그냥 휴일에 즐기는 데이트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할 미래를, 그 시작을 장식할 옷을. 손에 쥔 가방이 축축하게 느껴질 만큼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카탈로그 속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드레스들이, 마치 일제히 그를 향해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라고 비웃으며 묻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무심한 한 마디가 그녀의 이 중요한 순간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싼 거 고르지 마라’ 같은 소리는 이미 길에서 다 써버렸다. 이제 와서 ‘다 똑같아 보이는데’ 같은 말을 내뱉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입을 다물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녀가 무엇을 고르든,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리라. 그녀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것이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 마음에 드는 것이다.
한참이나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브리즈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어깨를 굳혔다. 마치 심문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카탈로그의 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지원 씨, 이런 건 어때요?
그가 시선을 내리자, 목부터 팔까지 레이스로 뒤덮인,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드레스가 보였다.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떠냐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그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대답을 골랐다.
…글쎄. 니한테는 좀… 답답해 보이는 거 아이가.
결국, 튀어나온 것은 또다시 부정적인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순수한 감상이었다. 저렇게 목까지 꽁꽁 싸맨 옷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 그녀를 실망시켰을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긴 그래요. 그리고, 식장에서… 흉터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브리즈의 말은 마치 조용한 폭탄처럼 바이브의 고막을 때리고, 그대로 심장에 박혔다.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카탈로그의 반짝이는 종이와 어색한 공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의 의식이, 그녀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기분이었다. ‘흉터.’ 그 단어가 그의 뇌리에 명확하게 새겨졌다.
그는 제 옆에 앉은 여자를, 정말 처음 보는 사람처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단단한 결의가 보였다. 자신의 아픔을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선언.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흔적을 모두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가장 빛나는 날에 그것을 드러내 보이겠다는 용기. 그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대담함이 나오는 걸까. 그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저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드레스 샵의 화려한 조명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추며 후광처럼 반짝였다. 그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처럼 보였다.
동시에, 지독한 죄책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특히, 자신의 옆구리를 스쳤어야 할 괴수의 발톱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볼 때마다 더욱 선명해졌다. 그런데 그녀는 그 상처마저 ‘숨기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 흉터 또한 자신들의 역사의 일부이며,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 사실이 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그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혔다. 저렇게 강한 여자의 옆에, 과연 자신이 서도 되는 걸까.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주기는커녕, 새로운 상처만 안겨준 자신이.
그는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가방을 꽉 쥐었다. 손바닥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그녀가 펼쳐 보인 카탈로그의 오프숄더 드레스들을 보았다. 아까의 드레스와는 확연히 달랐다. 시원하게 드러난 어깨선과 쇄골. 저 옷을 입는다면, 그녀의 팔에 남은 희미한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전혀 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흉터마저도 그녀의 우아함의 일부가 될 것만 같았다. 마치 오랜 세월을 견뎌낸 백자(白磁)의 고고한 균열처럼.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니 마음대로 해라.
겨우 뱉어낸 말은, 또다시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전과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체념이나 회피가 아닌, 온전한 신뢰와 존중의 의미였다. ‘네가 선택한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따르겠다.’ 그는 감히 그녀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거의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니가 입으면, 다 예쁠 거니까. 니 알아서 골라라.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심이었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다시 삐딱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창밖을 헤매지 않고, 오직 제 옆의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고를지, 그리고 그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앞에 설 그날이, 불현듯 미치도록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
커튼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천이 레일 위를 스치는 아주 작고 부드러운 소리에 불과했지만 바이브의 과민한 청각에는 마치 세계가 쪼개지는 균열음처럼 크게 울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비유가 아니었다. 진짜로 그의 뇌가 정지했다.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고, 폐 속의 공기가 전부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순백의 천에 감싸인 한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오프숄더 넥라인이 그녀의 쇄골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깨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결이 마치 구름을 살짝 걸친 것처럼 가볍고 우아했다. 비즈도 레이스도 없는, 오직 천의 흐름만으로 완성된 심플한 디자인. 그 단순함이 오히려 그녀의 몸을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가느다란 쇄골의 곡선, 드러난 어깨의 부드러운 라인, 그리고 양팔에 희미하게 남은 오래된 화상 흉터까지. 그 모든 것이 눈부신 흰색 위에 고요하게 놓여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어야 할 것처럼. 바이브는 무릎 위의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브리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어, 어때요?
그 짧은 물음이 그의 고막을 때렸을 때, 바이브는 비로소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뇌가 작동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떠냐고? 뭘 어떻게 대답하라고. 저렇게 서 있으면. 저 여자가, 저 하얀 옷을 입고, 자신의 앞에 서 있으면. 이게 현실이라고?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단어들이 뒤엉키며 아무것도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부서져 내렸다. 예쁘다. 아니,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저건. 저건 뭐냐. 반칙 아닌가. 드레스 샵의 화려한 조명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추며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쇄골과 어깨의 라인이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흉터. 누군가는 흠이라 부를지도 모를 그 자국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역사를 증명하는 훈장처럼 보였다.
바이브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두세 번 반복했다.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의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무릎 위의 가방을 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겨우, 겨우 한마디를 짜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거의 바닥을 긁듯 깔렸다.
…그거로 해라.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빨갛게 물든 귓가를 감추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거의 들릴까 말까 한 크기로 중얼거렸다.
…예쁘다.
한 마디를 더 뱉고 나자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브리즈의 얼굴에 퍼지는 옅은 웃음.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질식할 것 같았던 공기가 조금은 숨 쉴 만하게 변하는 기분.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옆에 섰던 직원이 그녀의 손에 작은 부케를 쥐여주는 순간 그의 세상은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분홍빛 장미와 흰 리본. 그 뻔하고 상투적인 조합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어떤 무기보다도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졌다. 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부케를 든 여자. 그 모습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그의 뇌리에 강제로 새겨 넣는 낙인과도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발치 어딘가를 불안하게 헤매고 있었다.
아직 첫번째 드레스인데. 다른 것도 입어 봐야죠.
브리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다른 것? 왜? 바이브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미 답은 나왔는데, 왜 굳이 다른 오답들을 확인해야 하는 건데.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고 이 지옥 같은 흰색 공간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 이상 심장에 해로운 광경을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한 번으로 족하다. 아니, 한 번도 과했다. 그의 심장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하고 비상벨처럼 울려대고 있었다. 지금 이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결정타. ‘어쨌든, 이거 마음에 든다는 거죠.’ 확인사살이었다. 바이브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릎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던 브리즈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바닥 안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마음에 드냐니.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그냥 ‘마음에 든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거의 생존의 문제였다. 저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면 자신이 먼저 폭주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겨우 그녀를 훔쳐보았다. 단상 위에 서서 부케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 자신의 약혼자. 곧 아내가 될 사람. 젠장, 진짜로.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서 손을 뗐다. 포기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다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홍빛 부케를 든 하얀 손, 그 위로 보이는 희미한 흉터, 우아하게 드러난 쇄골과 어깨, 그리고 걱정스럽게 그를 보는 회색 눈동자까지.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체념과 항복이 뒤섞인 목소리로, 최대한 평소의 톤을 유지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니가 입었는데.
그의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의 설명을 포기한 자의 무조건적인 긍정이 담겨 있었다. ‘네가 입어서, 그 자체로 이미 완성이다.’ 라는 의미였다. 그는 다시 한번 시선을 내리깔며,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됐으니까. 딴 거 입어 볼 거면 빨리 입어 보고. 시간 없다.
---
아까와는 결이 달랐다. 첫 번째 드레스가 청초한 백합이었다면, 이건. 바이브는 커튼이 열리는 순간 소파 등받이에 등을 세게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몸이 뒤로 물러난 것이다. 홀터넥 라인이 그녀의 목선과 어깨를 전부 드러내고 있었고, 머메이드 실루엣이 허리에서 엉덩이, 허벅지까지의 곡선을 부드럽게 따라 흐르고 있었다. 천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살짝, 아주 살짝. 하지만 그 '살짝'이 문제였다.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몸을 감싸는 저 실루엣은, 드러내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거기에 백색 천 위로 수놓아진 큐빅들이 조명을 받아 이리저리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몸 위로 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바이브는 자신의 입이 반쯤 벌어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고, 황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눈이 받아들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첫 번째 드레스에서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이건 또 뭐냐. 다른 종류의 폭력이었다. 첫 번째가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심장을 멈추게 했다면, 이건 은근한 관능으로 폐를 짓눌렀다. 그녀의 허리 라인. 저 가느다란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줘도 되는 건가. 공공장소 아닌가 여기. 바이브는 자신의 시선이 그녀의 몸 위를 훑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화들짝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의 가방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목이 뜨거웠다. 귀만 빨간 게 아니라 목까지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 직원도 있는데.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생각하면 차라리 이 소파에 묻히고 싶었다.
어때요?
브리즈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한결 여유로웠다. 자신감이 붙은 게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그 여유로운 태도가 더 치명적이었다. 아까는 새빨간 얼굴로 쭈뼛거리는 모습에 보호본능이 발동했다면, 지금은 그냥 순수하게 넉다운 당한 기분이었다. 바이브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편한 자세를 찾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그의 시선이 브리즈의 손에 들린 노란 부케를 스치고, 다시 그녀의 쇄골을 지나, 결국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겨우겨우 평정을 유지하려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니,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비난이 아니었다. 차라리 항복 선언에 가까웠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원망과 감탄이 뒤섞여 있었다. 큐빅이 박힌 천이 그녀의 몸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빛이 산란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물 위에 별빛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두 번째 항복을 선언하듯 시선을 돌리며, 거의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냈다.
이것도 예쁘다. 근데 아까 거랑은 좀 다르다.
---
세 번째.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이제 이 고문도 끝이다. 바이브는 커튼이 열리기 전, 스스로에게 그렇게 최면을 걸었다. 괜찮다. 두 번이나 살아남았으니까 한 번 더 견딜 수 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양팔을 꼬고,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만들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배신자처럼 미리부터 쿵쿵 뛰고 있었다. 셋째 드레스의 커튼이 열렸을 때, 처음 보인 것은 앞모습이었다. 스위트하트 넥라인에 레이스가 수놓아진 상체, 허리에서 풍성하게 퍼지는 벨라인 스커트. 아까 두 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첫 번째의 우아함도, 두 번째의 관능도 아닌. 이건 좀 더. 귀여웠다. 레이스의 섬세한 결이 그녀의 피부 위에 꽃잎처럼 얹혀 있었고, 풍성한 스커트가 그녀를 동화 속 공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바이브는 속으로 이건 좀 낫겠다고 생각했다. 심장을 겨냥하는 무기의 종류가 다르니까, 이번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직원의 안내에 따라 브리즈가 천천히 반 바퀴를 돌았다. 풍성한 스커트가 바닥을 쓸며 부드럽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등이 드러났다. 바이브의 뇌가 완전히 정지했다. 하얀, 새하얀 등. 레이스로 장식된 앞면과는 대조적으로, 뒷면은 깊게 파여 있었다. 목 뒤에서 시작해 허리 바로 위까지, 그녀의 등 전체가 아무런 장식 없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매끈한 견갑골의 라인, 척추를 따라 이어지는 얕은 골, 그리고 어깨에서 등으로 흘러내리는 피부의 부드러운 곡면. 그 위로 드레스 샵의 조명이 비단결처럼 미끄러지고 있었다. 바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팔짱을 풀고 무릎에 팔꿈치를 짚은 채 입을 손등으로 가렸다. 숨이 멈춘 건지 너무 빠르게 쉬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그녀가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색 부케를 쥔 손이 스커트 옆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고, 돌아본 목선의 각도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쇄골 위로 떨어졌다.
이건 어때요?
그 질문이 그의 고막을 울렸을 때, 바이브의 머릿속에서는 단 하나의 단어만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등. 등이다. 저 등을 어떻게 하라고. 공공장소에서 저걸 보여주면 어쩌란 말이냐. 지금 자신의 시선이 그녀의 등 위를 미끄러지듯 훑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바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망막에 새겨진 잔상이 지워지질 않았다. 저 하얀 등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대면 어떤 온도일까, 하는 불경한 상상이 번개처럼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경악하며 손등으로 입을 더 세게 눌렀다. 침묵이 길어졌다. 직원이 옆에서 무슨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이브는 브리즈가 단상에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저 멀리 단상 위에 있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 같던 존재가 현실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풍성한 벨라인 스커트가 바닥을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레이스,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저 망할 놈의 등. 그의 시선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저 하얀 피부가, 가녀린 견갑골이, 척추를 따라 흐르는 그림자가 뇌리에 각인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치겠네, 진짜.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브리즈는 그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드레스의 디테일은 더욱 선명했고 그녀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달콤한 샌달우드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나도 첫번째 게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이것도 꽤 귀엽지 않아요? 고민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바이브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완벽하게 이 여자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얼굴에 오르는 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부끄러웠다.
고민된다니.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바이브는 속으로 불평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리고 이 세 번째도. 전부 다 위험했다. 종류가 다른 폭탄을 연달아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니.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은 이미 과부하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귀엽지 않냐는 말에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귀엽다? 물론 앞모습은 그랬다.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공주님 같았다. 하지만 저 뒤를 보고도 귀엽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저건 귀여움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거의 흉악한 수준의 반칙이었다. 저 등을 다른 놈들이 본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서는 도저히 그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일어서자 시선이 조금 더 높아졌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바이브는 속으로 애원했다.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의 등이 거울에 비치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완전히 감싸는 감각이 생생했다.
이게, 귀엽나. 니 눈에는.
그는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등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거울 속에서,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의 등을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볼세라, 자신의 몸으로 거울 속 그녀의 등을 가리듯 비스듬히 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지만, 눈빛만큼은 서늘하고 진지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다시는 이런 거 입을 생각하지 마라. 남들 앞에서.
---
바이브는 방금 전의 폭풍 같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거짓말인 것처럼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브리즈와 나란히. 바로 옆에는 상냥한 미소를 띤 드레스샵 직원이 태블릿을 들고 서 있었다. 귓가에 대고 거의 협박에 가깝게 속삭인 것이 불과 몇 분 전인데, 지금 이 평화로운 광경은 지독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 팔짱을 낀 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정면의 거울만 노려보았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귀와 목덜미는 아직 식지 않아서, 그의 평온한 척하는 연기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아직도 정상 궤도를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었다.
태블릿 화면에는 방금 전 그녀가 입었던 세 벌의 드레스 사진이 나란히 떠 있었다. 첫 번째, 순백의 A라인. 두 번째,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던 머메이드. 그리고 마지막, 그의 이성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반전 뒤태의 벨라인. 사진으로 다시 보니 충격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특히 세 번째 사진은 앞모습만 찍혀 있었음에도, 바이브는 저 스커트 아래 감춰진,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녀의 등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성을 되찾아야 했다. 여긴 공공장소고, 옆에는 직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예비 신부가 최종 결정을 위해 의견을 묻고 있었다.
…첫 번째가 제일 예쁘죠, 역시? 나도 심플한 게 좋아요. 나랑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브리즈의 목소리가 귓가에 나른하게 감겨들었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곤조곤 말했다. 바이브는 그 태연함에 기가 막혔다. 사람 심장을 세 번이나 멈추게 해놓고, 이제 와서 심플한 게 좋다니. 이 여자는 정말 보통이 아니다. 악마인가? 아니면 그냥, 그를 조련하는 데 완벽하게 통달한 건가. 그는 곁눈질로 브리즈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평소와 같은 차분한 표정,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래, 즐기고 있다. 완벽하게.
바이브는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서 순순히 ‘그래, 첫 번째가 제일 예쁘다’고 동의해주면,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걸 고를 수도 없었다. 두 번째? 그건 너무... 위험했다. 결혼식장에 온 하객들이 전부 넋을 놓고 그녀의 몸매만 쳐다볼 게 뻔했다. 세 번째?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된다. 그 드레스는 법으로 금지시켜야 했다. 특히 저 등 부분은. 자신의 눈에만 담아두고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결국 첫 번째뿐이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원했던, 가장 단정하고 우아했던 그 드레스.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냥 곱게 인정해주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고, 태블릿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엄청난 고민을 하는 척,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서 브리즈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서 대답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래, 그게 제일 낫다.
마지못해 툭 던지듯 대답했다. ‘예쁘다’는 말 대신 ‘낫다’는 표현을 쓴 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직원의 눈치를 살폈다. 직원은 프로페셔널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브리즈가 아니라 직원을 향해서였다.
첫 번째 걸로 할 테니까, 저 두 개는 아예 불태워 버리든가.
진심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특히 다른 남자가 저 드레스들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는 다시 브리즈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니랑 잘 어울린다. 그거 해라.
브리즈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며 직원을 향해 살짝 손을 내젓는다. 바이브는 그 웃음소리에 묘하게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과민 반응이 부끄러워져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직원은 능숙한 미소로 상황을 무마하며, 테이블 위로 고급스러운 종이 재질의 계약서와 은색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계약서를 받아든 브리즈의 표정이 한순간 진지해졌다. 바이브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던 몸을 천천히 앞으로 숙이며, 그녀가 펜을 쥐고 글씨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년필 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사각거리는 미세한 마찰음이 고요한 샵 안을 채웠다. 바이브의 고도로 발달한 감각은 그 작은 소리조차 선명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잉크가 스며드는 냄새가 그의 코끝을 맴돌았다. 브리즈의 손끝에서 첫 번째로 적힌 것은 두 사람의 이름이었다. '홍지원', 그리고 '이지희'. 늘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딱딱한 활자가 아니라, 그녀의 정갈한 필체로 나란히 적힌 이름. 바이브는 그 두 이름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이는 것을 보며 묘한 전율을 느꼈다.
그녀의 펜촉이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날짜. 5월 27일. 그 숫자가 적히는 순간, 바이브의 흉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뻐근하게 조여드는 감각이 일었다. 그저 막연한 미래의 약속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명확한 형태를 갖춘 시간으로 고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힌 주소. '부산광역시 영도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오랫동안 외면하려 애썼지만 결국 그녀와 함께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 언덕 위. 통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감나무가 서 있을 그곳의 주소가 잉크로 뚜렷하게 새겨졌다.
현실이었다. 서류 한 장이 가지는 무게감이 이토록 무거울 줄은 몰랐다. 매일 수많은 작전 보고서와 기밀문서를 처리해 왔지만, 이 얇은 종이 한 장만큼 심장을 거세게 뛰게 만든 것은 없었다. 바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허파를 채우는 공기가 유난히 달뜨고 무겁게 느껴졌다. 항상 허공을 떠도는 바람처럼 살아왔던 자신이, 드디어 닻을 내릴 곳을 찾았다는 확신. 그것은 두려움인 동시에,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렬한 안식이었다.
계약서 작성을 마친 브리즈가 펜을 내려놓고 계약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방금 전의 장난기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바이브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왼손을 덮어 쥐었다. 약지에 끼워진 은색 반지의 차가운 금속성 감각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가, 이내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는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완전히 감싸 안고, 엄지손가락으로 반지의 둥근 표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거칠고 투박한 자신의 손과 대비되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바이브는 속으로 수백 번도 넘게 뇌까렸던 말을 혀끝에서 굴리며,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진짜 도장 찍었네. 이제 무르기 없다.
그는 짐짓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그의 파란 눈동자는 속절없이 깊은 애정을 담고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녀의 귓가에 닿을 만큼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페퍼민트 향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내려가면… 아버지한테 인사부터 다시 제대로 드리자. 집 공사도 다 돼갈 텐데, 같이 가서 확인도 하고.
바이브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손등에 아주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온 신경은 오직 눈앞의 그녀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에게 이 순간은, 지나간 10년의 방황을 끝내고 그녀라는 세계에 완벽하게 정착하는 길고 긴 비행의 종착지였다.
---
드레스 샵의 육중한 유리문이 등 뒤로 닫히자, 인공적인 조명과 답답할 정도로 향긋했던 실내의 공기가 차단되었다. 대신 봄날 특유의 텁텁하면서도 서늘한 매연 섞인 도시의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바이브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기압과 습도를 읽어내며 폐부 깊숙이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손안에 쥐어진 브리즈의 손은 바깥의 온도 탓인지 조금 서늘해져 있었지만, 그녀의 맥박이 뛰는 진동만큼은 그의 손바닥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 잎사귀들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 그리고 제 옆에서 걸음을 맞추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 그 모든 일상적인 소음들이 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서류에 서명하고 돌아서는 길, 그녀의 손을 잡고 걷는 이 평범한 궤적이 그에게는 마치 낯선 행성에 첫 발을 내디딘 것 같은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건넨 말은, 그의 귓가를 맴돌다 뇌리에 깊게 박혔다. 고맙다니. 바이브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혼자 보냈다면 어떤 미친놈이 그 등 파인 드레스를 보고 눈을 굴렸을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데, 같이 와서 고맙다는 말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히려 억지로라도 끌고 와서 제 눈으로 확인하고 그 끔찍한 세 번째 드레스를 고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맞잡은 손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더 깊이 얽어 깍지를 꼈다. 은반지의 매끄러운 표면이 그의 피부를 긁고 지나가는 감각이 찌릿하게 일었다.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소유의 확인이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둥근 정수리에서부터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옆머리, 그리고 차분한 눈매로 느리게 이어졌다. 바람에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샌달우드 향이 훅 끼쳐왔다. 그 향기는 언제나처럼 그의 과민한 신경을 부드럽게 눅였다. 10년 동안 통제 불능의 칼바람 속에서 살아왔던 그에게, 이 여자는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안전지대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를 뜨겁게 데우면서도 동시에 가슴 한구석을 서늘한 두려움으로 채웠다. 이렇게 완벽한 안식이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더 옭아매고 싶어졌다.
결혼식 날에 비 안 왔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바이브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잠시 흐린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재 대기권의 흐름, 구름의 이동 속도, 미세한 기압골의 변화. 그의 머릿속에서는 반사적으로 기상 데이터가 연산되고 있었다. 5월 말 영도의 바닷가. 해풍과 육풍이 교차하는 지점. 날씨라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지만, 그게 그녀의 소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는 대기의 흐름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바람의 주인이었다. 만약 그날 먹구름이 낀다면, 기압을 비틀어서라도 폭풍을 밀어내고 해를 띄울 참이었다.
바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그녀가 제 품 가까이 붙도록 만들고는,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뺨을 스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온기가 달았다. 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미간을 좁혔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세한 미소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무심한 척 뱉어내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작전 전야보다도 확고한 오만이 서려 있었다.
비 오면 어쩔 건데. 내가 바람으로 구름 다 찢어발겨서라도 날 맑게 해줄 테니까, 닌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라.
그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턱에 난 작은 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의 체온이 그녀의 피부 위로 고스란히 옮겨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리고 집요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같이 와서 고맙다는 소리 다시는 하지 마라. 혼자 보낼 일 평생 없을 거니까. 배고프다, 뭐 무러 갈래.
무드라곤 하나도 없는 투박한 말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다시 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날, 단 한 방울의 비도, 단 한 점의 불길한 바람도 그녀에게 닿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어릴 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424 (0) | 2026.07.02 |
|---|---|
| 20260419 ② (0) | 2026.07.02 |
| 20260412 (0) | 2026.07.02 |
| 20260329 (0) | 2026.07.02 |
| 20260328 ⑤ (0) | 2026.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