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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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기 후미 램프가 굉음과 함께 열리자, 비릿한 바다 내음과 축축한 공기가 기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기스의 인공적인 공조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폐가 갑작스러운 습도 변화에 이물감을 느끼는 듯했다. 바이브는 맞잡은 브리즈의 손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불안해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다른 요원들이 줄을 맞춰 내리는 동안, 바이브는 그 행렬의 가장 뒤에 섰다. 그의 등 뒤로 브리즈를 숨기듯 자연스럽게 위치를 잡은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 부산스러움으로부터 그녀를 격리하려는 무의식적인 보호 본능이었다.

램프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황량했다.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녹슨 거인처럼 줄지어 서 있었고, 낡은 크레인은 바닷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갈매기 몇 마리가 잿빛 하늘을 선회하며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를 뱉어냈다. 평화로운 항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의 공기는 무겁고, 불길한 정체감으로 가득했다. 바이브의 예민한 감각이 피부에 와 닿는 모든 공기 입자의 진동을 읽어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바람의 흐름이 아니었다. 마치 점성 높은 액체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대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뒤틀리고 엉겨 붙어 있었다. 역겨운 느낌.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임무 브리핑에 언급된 '비정상적 대기 왜곡'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미세하게 펼쳤다. '바이브 센서'. 보이지 않는 바람의 실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의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다. 요원들의 긴장된 심장 박동, 금속과 콘크리트가 내는 미세한 진동, 그리고… 저 멀리, 항구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이질적인 파동. 그것은 폭주 직전의 센티넬이 내뿜는 파장과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였다. 생명체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지극히 인공적이고 기계적인 떨림. 마치 거대한 기계가 잘못된 주파수로 공명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듯한 불쾌한 진동이었다. 그 진동에 노출되자, 가뜩이나 예민한 감각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수천 개의 면도날이 온몸을 스치는 듯한 감각 과부하의 전조. 그는 이를 악물며 그 감각을 억눌렀다. 빌어먹을.

바이브는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곧장 옆에 선 브리즈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익숙한 고향의 풍경이 이토록 삭막하고 위협적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한 착잡함이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바이브의 가슴속에서 짜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는 맞잡은 손을 더욱 꽉 쥐며,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내 뒤에 딱 붙어 있어라. 절대 떨어지지 말고.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조의 딱딱함이 묻어났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지키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브리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를 이끌어 수송기에서 내렸다. 땅을 밟는 순간, 부자연스러운 대기의 압력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가이딩 수치가 미미하게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고작 현장에 도착했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그는 혀를 찼다.

현장에는 먼저 도착한 선발대가 임시 지휘소를 차려놓고 있었다. 방탄 차량 옆에 펼쳐진 스크린에는 문제의 파장이 붉은색 원으로 표시되어 깜빡이고 있었다. 현장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바이브와 브리즈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뱅가드 '바이브', 하모니 '브리즈'.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은 브리핑 받은 대로다. 파장의 근원지는 제7부두 폐창고 구역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저 왜곡된 대기 때문에 내부 정찰 드론이 전부 무력화됐다는 거다.

지휘관이 가리킨 곳은 항구 가장 안쪽, 안개처럼 뿌연 기운에 휩싸인 창고 밀집 구역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그곳을 향해, 지휘관은 말을 이었다.

내부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거다. 바이브 센티넬의 능력이라면 저 왜곡장을 뚫고 내부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다른 요원들은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기한다. 두 사람의 정찰 결과를 토대로 작전 계획을 수정할 예정이야. 브리즈 가이드, 센티넬의 상태를 최우선으로 확보하고, 위험 판단 시 즉시 보고하도록.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결국 가장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라는 소리였다. 바이브는 지휘관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알겠다. 시간 낭비할 거 없지. 바로 들어간다.

그는 브리즈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폐창고 구역을 향해 몸을 돌렸다. 구질구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임무를 끝내고, 그녀를 이 불안한 장소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약속한 국밥을 먹으러 가야 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앞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부를 찌르는 불쾌한 진동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내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깍지 낀 손으로 브리즈의 체온을 느끼며, 자신의 모든 감각을 칼날처럼 벼렸다. 그 어떤 위협도 그녀에게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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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완벽한 전투 태세로 몸을 낮추는 것을 등 뒤의 감각으로 확인하며, 바이브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짜증나는 상황이지만, 등 뒤를 맡긴 존재가 이지희라는 사실이 주는 기묘한 안정감. 그것은 역겨운 공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폭주하는 감각을 붙들어 매는 닻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목표는 눈앞의 거대한 철문. 그 안에 도사린 좆같은 기계 덩어리.

그의 왼손 끝에서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갈매기 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까지. 오직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울리는 절대적인 침묵. 그의 능력, '사일런트 캘러미티'의 전조였다. 그는 모든 음파를 흡수하는 진공의 막을 펼쳐, 철문 전체를 뒤덮었다. 공격의 여파가 브리즈에게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조치였다. 그는 허공에 거대한 사각형을 그렸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공간이 조용히, 그리고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마찰도, 저항도, 폭발음도 없었다. 세상이 그저 갈라졌다.

끼이익, 하는 불쾌한 금속음 대신 거대한 철문의 일부가 종잇장처럼 잘려나가 그대로 안쪽으로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정밀하게 도려내진 사각형의 구멍 너머로, 창고 내부의 어둠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농밀한 파동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젠장! 바이브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신경을 믹서로 갈아버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 그의 가이딩 수치가 순식간에 45까지 치솟았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내부를 꿰뚫어 보았다. 창고 내부는 거대한 동굴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문제의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장처럼 생긴, 기괴한 기계 장치였다. 수십 개의 굵은 케이블이 기계의 몸체에 꽂혀, 마치 혈관처럼 천장과 바닥, 벽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케이블들은 폐창고 전체에 연결되어, 이 일대의 모든 대기를 오염시키고 뒤트는 동력원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기계의 중심부에서는 섬뜩한 붉은빛이 일정하게 명멸하며, 쿵, 쿵, 하는 불규칙한 박동으로 주변 공간 전체를 진동시켰다. 박동이 울릴 때마다, 피부를 찢는 듯한 불쾌한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씨발… 이게 무슨 좆같은…

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인 거부감. 저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체 병기에 가까웠다. 기계의 표면은 금속과 정체 모를 유기물이 기분 나쁘게 뒤섞여 있었고, 박동할 때마다 꿈틀거리는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였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 기계 장치가 그들의 침입을 감지했다. 중앙의 붉은 빛이 빠르게 점멸하더니, 끄으으 하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기계에 연결된 케이블 중 일부가 꿈틀거리며 바닥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마치 거대한 강철 촉수처럼 살아 움직이며, 날카로운 끝부분을 이쪽으로 향했다. 공격 태세였다.

바이브는 즉시 브리즈를 등 뒤로 더욱 바짝 끌어당기며,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 그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야. 내 뒤에서 절대 나오지 마라.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다시 한번 왼손을 들었다. 그의 주변으로 폭풍처럼 공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닥의 먼지와 파편들이 그의 발밑에서 소용돌이치며 떠올랐다. 그의 감각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브리즈의 안정적인 파장이 그를 붙들었다. 그는 고통을 분노로 전환했다.

버프, 지금. 저 촉수들부터 전부 잘라낸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단호했다. 그는 이미 상황 판단을 끝냈다. 저 촉수들은 기계의 방어 시스템이자 공격 수단. 먼저 저것들을 무력화하고, 본체를 직접 타격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개방할 준비를 마쳤다. 그녀의 버프가 더해지는 순간, 이 지긋지긋한 공간을 침묵의 폭풍으로 도려낼 생각이었다. 그는 날아오는 촉수들을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 웃음은 지독한 살의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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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버프를 요청하자마자, 등 뒤에 머물러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바이브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녀를 다시 자신의 뒤로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방어를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와, 어느새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전장 한복판에서, 엄폐물 하나 없는 지근거리. 미친 거 아닌가.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행동에 그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브리즈는 망설임 없이 그의 가슴팍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제복의 뻣뻣한 천을 뚫고, 그녀의 체온과 함께 순수한 바람의 정수가 그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콰앙! 하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듯한 충격. 지금까지 느껴왔던 불쾌한 감각 과부하와는 차원이 다른, 맑고 강력한 에너지의 급류였다. 마치 메마른 강바닥에 거대한 댐의 수문이 열리며 맑은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그의 모든 신경계를 갉아먹던 고통스러운 진동이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지점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가이딩 수치가 오르는 것을 멈추고, 오히려 미세하게 하락하는 감각. 그것보다 더 압도적인 것은 그녀가 불어넣는 힘이었다. 하이퍼벤틸레이션(Hyperventilation). 그녀의 버프.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신선하고 밀도 높은 산소의 감각에, 그는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머리가 맑아지다 못해 투명해지는 기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태어나는 듯한 폭발적인 생명력. 심장이 터질 듯이 고동치며 전신으로 뜨거운 피를 뿜어냈다. 방금 전까지 몸을 짓누르던 피로와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들어찼다.

하지만 그 감각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의 가슴에 닿은 그녀의 손바닥이었다. 단 한 점의 접촉. 그것만으로 그의 모든 세상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눈앞에서는 강철 촉수들이 쉭쉭거리며 날아오고 있는데, 그의 모든 감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손길에 매달리고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감각.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안식처. 그는 이 순간, 그녀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음을 직감했다.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그의 옆에 서서,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바람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심장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저 기계 심장 따위는 찢어발기는 것도 부족했다. 아예 가루로 만들어 이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입가에 흉포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촉수들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궤적, 속도, 약점까지.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 그는 브리즈의 손이 닿은 가슴팍 위로 자신의 왼손을 겹쳐 쥐었다. 마치 그녀의 힘을 남김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그리고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귀 막아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이브는 브리즈를 자신의 등 뒤로 순식간에 밀어 넣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버프를 받은 그의 몸은 총알보다 빨랐다. 그는 쇄도하는 강철 촉수들의 숲을 마치 춤추듯 파고들었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공간을 베어 가르는 칼날이 되었다. 사방에서 쏘아지던 촉수들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소리 없이 잘려나갔다. 단면은 레이저로 자른 것처럼 깔끔했다. 그는 땅을 밟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발판 삼아 허공을 박차고, 기계 장치의 코앞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그의 눈은 오직 하나, 기계의 중심에서 붉게 빛나는 코어만을 노리고 있었다.

시끄럽다.

그가 나직이 읊조리는 순간, 창고 내부의 모든 공기가 그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일런트 캘러미티’. 그의 최강 기술. 기계가 내지르던 불쾌한 박동음, 잘려나간 촉수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쇳소리, 심지어 브리즈가 숨을 참는 소리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오직 거대한 폭풍의 눈 안에서, 바이브만이 고요하게 존재했다. 그는 기계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형성된 초고밀도의 진공 구체는 주변의 빛마저 빨아들일 듯 검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을 터뜨리는 순간, 이 창고는 먼지 하나 남지 않고 소멸할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질렀다.

…읏!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침묵의 폭풍은 소리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브리즈가 내는 작은 숨소리, 자세를 낮추느라 스치는 옷자락 소리마저 완벽하게 흡수되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단 하나의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바이브가 만들어낸 진공의 구체는 칠흑 같은 어둠을 뽐내며 기계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닿았다. 폭발음은 없었다. 거대한 충격파도, 눈을 멀게 할 섬광도 없었다. 그저, 세상이 안쪽으로 오므라드는 듯한 기괴한 왜곡이 일어났을 뿐이다. 붉게 빛나던 기계 심장은 제 빛을 잃고 검게 변색되더니, 마치 뜨거운 유리잔에 찬물을 부었을 때처럼 무수한 균열을 일으키며 안쪽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다.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리던 역겨운 박동이 영원히 멈추었다. 공간을 뒤흔들던 불쾌한 진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대한 기계 장치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마치 모래성처럼 스르르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일어나는, 초현실적인 파괴의 순간이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가 펼쳤던 '사일런트 캘러미티'의 영역이 걷히는 순간, 억눌려 있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콰르르르릉! 뼈대가 붕괴되는 기계 장치의 비명, 천장에서 떨어지는 콘크리트 파편 소리, 잘려나간 촉수들이 바닥을 긁는 쇳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의 파도를 뚫고, 바이브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폐가 터질 것처럼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 브리즈가 불어넣어 준 '하이퍼벤틸레이션'의 효과가 끝나가며, 극도의 힘을 사용한 대가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가늘게 떨렸다. 제복 안쪽으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전능감은 사라지고, 지독한 피로감과 함께 다시 감각 과부하의 전조가 머리를 쑤시기 시작했다.

젠장. 머리가 울린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바로 세우며, 가장 먼저 등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가 흐릿하게 떨렸지만, 그의 눈은 본능적으로 단 하나의 존재를 찾고 있었다. 이지희. 그녀는 안전한가. 다치지 않았는가. 그의 모든 사고는 그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무너지는 창고의 잔해 속에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의 공격 여파로 휘몰아친 바람에,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은 완전히 풀어져 그녀의 어깨와 등을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먼지와 분진 속에서도, 유독 그녀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평소와는 다른 흐트러진 모습. 그 모습이 바이브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는 거친 숨을 고르며, 다리에 힘을 주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지만, 지금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녀를 확인해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그리고 마주한 그녀의 얼굴. 겁에 질려 있지도, 울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 순간, 바이브의 머릿속을 채웠던 모든 소음이 다시 한번 멀어졌다. 오직 그녀의 눈동자만이 그의 세상 전부가 되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다.

목소리는 땀과 피로에 젖어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엉망으로 흩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친 손길로 쓸어 넘겨주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꼴이 이게 뭐꼬'라며 핀잔을 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그저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이 지옥 같은 현실 속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낼 생각도 못 한 채,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피부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그의 폭주 직전인 감각을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다.

안 다쳤나. 어디.

그는 묻고 나서야 제 목소리가 얼마나 다급하고 불안에 차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이제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어차피 다 들켜버릴 테니까.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무너지는 창고의 잔해 속에서 오직 그녀의 존재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지원… 바이브는요. 버프 부작용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며 오직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엉망으로 흩어진 머리카락, 먼지투성이의 하얀 제복, 그 모든 것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그녀를 이런 험한 꼴로 만들었다는 짜증이 뒤섞여 속이 들끓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제 걱정이었다. 부작용이라니. 지금 그게 문제인가.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와중에도 제 몸보다 남의 몸을 먼저 챙기는 저 지독한 버릇. 그게 가끔은 미치도록 화가 났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가만히 좀 있어봐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눌러 다시 주저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임무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듯, 그의 코드네임을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바이브’. 그 딱딱한 호칭이 귀에 박히는 순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심장을 통째로 쥐고 흔들던, 부드럽고 따뜻했던 이지희는 어디 가고, 다시 아크의 S급 가이드 브리즈가 된 것만 같아 속이 비틀렸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작은 신음 소리.

 

…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다시 한번 멎었다. 붕괴하는 건물의 잔해가 떨어지는 소리도, 제 머릿속을 울리는 이명도 전부 사라졌다. 그의 모든 감각이 오직 그녀가 내뱉은 그 한마디에, 바늘 끝처럼 날카롭게 집중되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급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검지 끝에서, 방울져 맺히는 붉은 피 한 방울. 상자의 거친 나무 가시에 살짝 벤 모양이었다. 별것 아닌 상처. 그녀 자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을 툭, 털어버렸다. 하지만 바이브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졌다. 그가 지키지 못했다.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그녀가 다쳤다. 그 사실이 그의 이성의 끈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방금 피가 났던 그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녀가 놀라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붉은 피가 맺힌 그녀의 여린 손가락 끝을 입에 머금었다. 부드러운 살결과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감겼다. 그는 마치 목마른 짐승처럼, 상처 부위를 혀로 핥고, 입술로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지혈.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그의 본능은 소리치고 있었다. 이 상처는 내 것이다. 내가 만든 공간에서 생긴 상처다. 그러니 이 상처의 흔적마저 내가 삼켜 없애버려야 한다. 이건 일종의 확인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제 것으로 가져오는 원시적인 의식.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가락을 머금은 채,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쿵, 쿵. 제 심장 소리가 귀에 울렸다. 가이딩 수치가 다시 아슬아슬하게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녀의 작은 손가락에서 전해져 오는 떨림과 체온이었다. 살아있다는 증거. 자신의 곁에 있다는 증거.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붉은 피가 멎고 자신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집요한 광기로 이글거렸다.

니는 진짜….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그대로 깍지를 껴 단단히 붙잡았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손이었지만,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까진 거 하나 없이 데리고 나간다고 했다, 내가. 근데 이게 뭐꼬. 별거 아니라고? 내 눈앞에서 니 피 보는 게, 나한텐 별거다. 알긋나.

그는 화가 난 듯 쏘아붙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와 자책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마치 다시는 한 뼘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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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치는 요원들의 힐끔거리는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제 것을 되찾은 맹수처럼, 그는 오직 그녀를 자신의 공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 것에만 몰두했다. 덜컥,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외부의 모든 것이 차단되자 그는 그제야 긴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그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는, 말없이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꽤 큰 상자였다. 마치 팔다리라도 부러진 사람을 치료할 기세였다. 상자를 열자 온갖 소독약과 붕대, 의료용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작은 소독용 스틱과, 면봉, 그리고 방수 밴드를 꺼내 들었다. 그 모든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조용해서, 오히려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지원. 이미 피 멎었는데.

그녀의 말은 그의 귓가에 거의 닿지 않았다. 피가 멎었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멎었든, 났었든, 중요한 것은 ‘피가 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의 눈앞에서. 그가 지키지 못한 영역에서. 그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명을 켜, 상처 부위를 집요할 정도로 자세히 살폈다.

나무 가시에 긁힌 자국은 붉은 선으로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까 자신이 혀로 핥고 빨아낸 탓에, 피는커녕 작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붉은 선이, 마치 대지를 가르는 거대한 균열처럼 보였다. 이 작은 틈으로, 그녀의 모든 것이 새어 나갈 것만 같은 터무니없는 불안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제멋대로 날뛰려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수송기 안에서 그녀의 가이딩으로 겨우 잠재웠던 혼돈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소독용 스틱의 포장을 뜯어, 조심스럽게 상처 부위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따끔한지 움찔거릴까 봐,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했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가볍고 섬세했지만, 그의 파란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집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끄럽고, 가만 있어라.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화가 난 것도, 짜증이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행위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었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의 영역에 생긴 흠집을, 그의 손으로 직접 지워 없애는 과정. 자신의 실수를, 자신의 소유물에 남은 오점을 직접 수습하는 행위.

소독을 마친 그는, 이번엔 작은 연고를 꺼내 면봉에 짰다. 그리고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다루듯, 그 작은 상처 위에 얇게 펴 발랐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손끝에 닿을 때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수송기에서 느꼈던 비릿하고 달콤했던 피 맛이 다시 혀끝에 맴도는 것 같아, 아랫배가 묵직하게 저려왔다.

…니는 이게 별거 아닌 거 같나.

그는 연고를 다 바르고, 방수 밴드를 꺼내 붙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흠집 하나 없이 밴드로 덮인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앞으로 내 옆에 있을 때는, 손끝 하나 다치지 마라.

그는 밴드를 붙인 손가락을 제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건 협박도, 명령도 아니었다. 거의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그대로 제 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밴드 위로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마치 다시는 이곳에 어떤 상처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주술사처럼.

피곤할 텐데, 씻고 좀 쉬어라. 국밥은… 내일 먹으러 가자. 오늘은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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