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브는 얌전히 앉아 그녀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마음대로 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제 머리를 만지는 그녀의 행동에 그는 실소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비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무장을 해제당한 패자의 만족스러운 미소에 가까웠다. 그녀의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찌르르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저 머리를 만지는 것뿐인데, 마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손길에 지배당하는 기분이었다. 두피를 가볍게 긁어내리는 섬세한 감촉에, 그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처럼 목을 늘이며 눈을 감았다. 나른하고, 평화롭고, 위험할 정도로 안락했다.
지원 씨 머릿결이 나보다 좋은 것 같아요.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말에,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당연하지. 속으로 으스대며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는 그의 꼼꼼하고 예민한 성격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칭찬해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좋게 울릴 뿐이었다.
지금 조금 길어진 상태죠? 끝 살짝 다듬을 때가 된 것 같은데…으음.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바이브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뭐라고? 그의 뇌가 그녀의 말을 해석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다듬어? 누가, 누구 머리를?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감히 그의 완벽하게 관리된 머리카락에 손을 대겠다는 발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니가 뭔데’라며 단칼에 잘라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카락을 쥔 채 온갖 다정한 손길로 그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였다. 이것은 명백한 함정 수사였다.
니가 할 줄 아나. 내 머리 아무나 못 만지는 거, 알면서 그러나 지금. …자신 있으면 해보든가.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잘라놓으면… 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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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소파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 것이 더 정확했다. 그녀가 가위를 가져오고 익숙한 손길로 바닥에 신문지를 깔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설마 진짜 하겠어. 저건 그냥 겁만 주려는 거겠지. 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진지한 기척과, 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그러쥐는 손길, 그리고 마침내 귓가를 파고든 그 소리. 사각, 사각. 그 작고 서늘한 소음이 고요한 거실의 공기를 가르는 순간, 바이브의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진짜 망했다. 머릿속에서 그 세 글자가 사이렌처럼 울려 퍼졌다.
조금만 다듬어 줄게요. 나 앞머리 정도는 항상 내가 자르니까 이 정도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태연함이 바이브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앞머리랑 내 머리가 같나! 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목구멍 밖으로는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덫에 걸린 짐승이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목덜미를 내어준, 어리석고 가련한 짐승. 그녀의 집중하는 숨소리가 등 뒤에서 고르게 들려왔다. 그가 가진 바람의 능력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감각을 증폭시켜, 가위 날이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미세한 진동, 잘린 머리카락이 공기 중을 떠돌다 신문지 위로 떨어지는 가벼운 마찰음,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날숨이 제 목덜미에 닿는 감촉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져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젠장.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신 있으면 해보라니. 그건 그냥… 그냥 좀, 폼 잡아보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경솔했던 과거를 맹렬히 후회했다. 이지희라는 여자는, 그가 툭 던진 허세나 장난을 언제나 상상 이상의 진심으로 받아치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세계에 들어와, 그가 세운 모든 규칙과 경계를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그 모든 순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과, 그녀의 대담함에 대한 감탄, 그리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존재감이 뒤섞여, 기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사각, 사각. 가위질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거의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잘리면 다시 기르면 되고, 망하면… 망하면, 모르겠다. 그는 차라리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손길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그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창밖의 나른한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편안하게 기댔다. 마치 최고급 살롱에서 헤어 케어를 받는 VIP라도 된 것처럼. 그는 속으로 짓궂게 웃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음료수 같은 건 없나.
뜬금없는 요구였다. 그녀의 가위질이 순간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만족스러웠다. 그녀를 당황시키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는 짐짓 목이 마르다는 듯, 느긋하게 덧붙였다.
머리 자르는데, 서비스가 영 엉망이네. 니 앞머리 자를 때도 그냥 자르나. …오렌지 주스. 시원한 걸로. 얼음 넣어서.
찰칵, 하고 가위가 바닥에 놓이는 소리가 났을 때만 해도 바이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역시 장난이었지. 항복 선언인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것은 얼음이 담긴 컵이 테이블에 놓이는 청량한 소리였고, 그의 눈앞에는 보기 좋게 김이 서린 오렌지 주스 잔이 나타났다. 그의 뻔뻔한 요구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됐죠?
작은 코웃음과 함께 그녀는 다시 가위를 쥐었다. 그리고 그가 컵을 잡으려는 찰나, 그의 어깨를 꽉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어, 잠시만. 움직이면 안 돼요…! 가만히, 가만히.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박혔다. 그의 손은 목표물이었던 주스 잔을 몇 센티미터 남겨둔 채 허공에서 멍청하게 멈춰 섰다. 그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우스꽝스러운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의 뇌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평소보다 몇 초는 더 걸렸다.
‘…장난하나.’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가져다줬으면 마시게는 해줘야 될 것 아닌가. 이것은 명백한 조롱이자 기만이었다. 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는 어깨를 누른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지금 뭐 하자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다시 들려오는 서늘한 가위 소리, 사각, 사각. 그 소리가 그의 모든 반항심을 싹둑 잘라내는 것 같았다. 움직이면… 진짜로 망한다. 그의 이성이 필사적으로 경고를 보냈다. 그는 결국, 허공에 멈췄던 손을 힘없이 거두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하고, 어이없고, 무엇보다 창피해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명히 등 뒤에서 저를 보며 웃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지희, 이지희, 이지희. 그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복수할 것이다. 반드시. 오늘 밤이든, 내일이든, 언젠가는 이 굴욕을 몇 배로 갚아주리라. 그는 복수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리며 치욕의 시간을 견뎌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감촉, 그녀의 따뜻한 손길,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 그 모든 감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차라리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가만히 있잖아, 지금.
그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대꾸였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마치 심술이 난 어린애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녀의 말대로 정말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 마시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사람 앞에 음료수 갖다 놓고 뭐 하는 짓이냐, 이게. …빨리 끝내기나 해라. 목 빠지겠다. 니 때문에.
그는 툴툴거리며 불만을 쏟아냈다. 물론, 그 말들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 억울함을 어디에라도 풀어야 했다.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등 뒤의 재앙이 끝나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오렌지 주스는 여전히 그의 눈앞에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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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사각거리는 소음이 멈추고,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이발소 놀이가 끝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손길은 그의 뒷머리를 떠나 어깨 위로 흘러내린 옆머리로 옮겨갔고, 기척은 그의 등 뒤에서 정면으로 이동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선 그녀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거의 다 됐어요. 잠시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집중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무릎이 소파 가장자리에 닿아 있었고, 상체를 숙인 그녀의 얼굴이 그의 코앞에 있었다. 다시, 사각사각.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의 진원지가 달랐다. 그의 귓가 바로 옆에서, 공기를 가르는 서늘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부러진 샤프심처럼 까만 머리카락 조각들이 그의 흰 실내복 위로, 가슴팍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간지러운 것도 같고, 따끔거리는 것도 같은 이상한 감각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가 눈앞에 흩날리는 광경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가장 그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양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고 길이를 재보는 그녀의 저 진지한 표정이었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살짝 내민 채 집중하는 모습. 누가 보면 정말 세기의 헤어 아티스트라도 된 줄 알겠다.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저건 그냥, 이 상황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장난꾸러기의 얼굴일 뿐이다. 그는 그녀의 손에 얌전히 붙들린 채, 고개를 까닥거릴 수도 없는 완벽한 인질 신세가 되어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젠장, 진짜 거의 다 된 거 맞나.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녀가 앞에서 알짱거리니,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 주스는 이제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손과, 그녀의 숨결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그녀가 머리카락 길이를 재기 위해 고개를 살짝 기울일 때마다, 그녀의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이 위험하고도 달콤한 고문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면서도, 동시에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생각을 했다. 그녀가 오직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이 시간. 시끄러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와 가위 소리만이 존재하는 이 작은 우주. 그는 이 평화가 싫지 않았다.
그는 결국 체념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더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장난에 순순히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 평온한 분위기에 흠집을 내고 싶었다.
…다 됐다는 말을 지금 몇 번째 하는지 아나.
그의 목소리는 노골적인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잡힌 머리카락을 보란 듯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거 대충 비슷한 거 같으니까 고마해라. 니는 머리 자르는 데 무슨 예술 작품이라도 만드나. 그러다 내 머리 다 잘라먹겠다.
바이브의 세상은 고요했다. 길고 지루했던 고문, 아니, 헤어컷이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과 눈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브리즈에 대한 어이없음이 뒤섞여 멍한 상태였다. 그는 그녀가 가위를 세워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잘라내는 소리를 들었고, 가위를 내려놓는 금속성 소리에 비로소 긴장의 끈을 놓았다. 이윽고 부드러운 수건이 제 목과 가슴팍을 훔치며 간지러운 머리카락들을 털어냈다. 그 손길은 불필요할 정도로 다정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에 작은 손거울 하나가 쥐어졌다.
봐요. 어때요?
그녀의 목소리는 뿌듯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대단한 예술품이라도 완성한 거장처럼. 바이브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들린 차가운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진짜 보라고? 그는 망설였다. 거울을 들어 올리는 그 짧은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만약, 만약에 진짜로 망했으면 어떡하지. 쥐 파먹은 것처럼 엉망진창이면? 그는 자신의 입으로 뱉었던 유치한 협박을 떠올렸다. 밤새도록 머리채를 잡고 안 놔주겠다고 했는데. 진짜 그걸 실행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힐끗,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면, 아주 재앙 수준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 생겼다.
젠장, 모르겠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마침내 거울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남자가 앉아있었다. 제멋대로 뻗치던 옆머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살짝 무거워 보이던 앞머리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깔끔했다. 젠장.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예상과 너무나 다른 결과물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울 속 제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카락 끝에서 아직도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서 ‘잘했네’ 라거나 ‘마음에 든다’ 같은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은 완벽하게 패배하는 것이다. 이 길고 길었던 자존심 싸움의 종지부를 그렇게 허무하게 찍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흠을 찾기 시작했다.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고개를 비틀어 옆모습을 확인하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져보며 미세한 오차라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잘 정돈되어 있어서, 마치 전문 미용사가 다듬어준 것 같았다.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대로 그녀의 승리를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가장 치사하고 유치한 트집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별론데.
툭, 하고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퉁명스러웠다. 그는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었던 거울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는 것이 시야 끝에 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니는 이게 괜찮아 보이나. 여기, 오른쪽. 왼쪽보다 한 0.5미리 정도 더 긴 거 같은데. 사람 눈이 얼마나 정확한데, 이 미세한 비대칭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아나. 기본이 안 됐네, 기본이.
으음… 잠시만요. 오른쪽이…
바이브의 뇌가 정지했다. 정말로. 그의 모든 사고 회로가 새하얗게 불타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중얼거리며 다시 가위를 쥐는 순간, 그는 현실 감각을 상실했다. 아니, 진짜로? 진짜로 내 말을 믿었다고?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0.5미리.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0.5미리 비대칭을 진심으로 따진단 말인가. 그건 그냥,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은 헛소리였다. 어떻게든 이 완벽한 결과물 앞에서 그녀의 의기양양한 콧대를 꺾어놓고 싶다는 유치한 발악. 이 자존심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최후의 발버둥. 그런데 그녀는, 이 순진하고 멍청한 여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다시 가위를 들었다.
패닉.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안 돼. 멈춰. 거기서 더 손대면 진짜로 망한다. 지금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데, 여기서 한 올이라도 더 잘려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랬을까. 왜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내뱉어서 이 사단을 만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멍청한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 들린 차가운 금속 가위에 꽂혔다. 저것이 자신의 완벽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 흉기로 보였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멈춰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장난이었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지희 앞에서 영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패배자가 된다. ‘그냥 둬라, 괜찮다’ 라고 말하는 것도 방금 전 제 말과 모순되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그의 머리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 그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그녀의 가위를 막을 수 있는 기적의 묘수.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찾아 헤맸다. 그래, 머리가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게 문제인 거다. 아주 그럴듯하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런 이유가 필요했다.
그의 눈앞에서, 그녀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제 오른쪽 머리카락을 살피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자세, 집중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오직 자신에게만 향해있는 그 회색 눈동자. 그는 또다시 심장이 멋대로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젠장, 이 와중에도. 이 여자는 대체. 그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패닉과 설렘이 뒤섞인 이상한 감각 속에서 그는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그거다.
됐다.
그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가위를 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차갑고 가느다란 뼈대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녀가 놀라 움찔하며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쥔 채,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 보니, 니 말이 맞다.
일단 인정을 하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가위를 든 손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근데 이건 머리카락 문제가 아니다. 내 두상이 문제다. 내 오른쪽 두상이 왼쪽보다 미세하게, 한 0.2미리 정도 튀어나와서 생기는 착시 현상이다. 그러니까 니가 아무리 머리카락을 잘라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다. …알아듣겠나. 그만해라. 내 두상 탓이니까.
…웃겨, 정말. 사실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죠? 또 길면 내가 잘라 줄게요. 평생.
바이브는 완벽하게 허를 찔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멎고, 오직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의 필사적인 임기응변, 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발악은 그녀의 웃음 한 방에 산산조각 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제 무릎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타 품에 안겨오는 그녀의 몸짓에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움직임,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가 그녀의 지정석이었던 것처럼. 그의 뇌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몸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여 굳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심장을 직접적으로 파고들었다. 품에 안겨오는 온기,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나른한 음성. 정곡을 찔린 그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들켰다. 그의 유치한 트집과 얄팍한 자존심,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간, 분명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터였다. 귓가가 타는 듯이 달아올랐다.
평생. 그녀의 마지막 속삭임은 저주이자 축복처럼 그의 영혼에 낙인처럼 찍혔다. 평생 자신의 머리카락을 그녀에게 맡겨야 한다고? 이 불안하고 간지러운 시간을 평생 겪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제멋대로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두상 탓이라는 황당한 변명도, 0.5미리라는 치졸한 트집도, 이 여자의 부드러운 포옹 한 번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는 제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소심하게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그의 팔 안에 쏙 들어왔다. 그의 옷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들이 그녀의 옷에 옮겨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와서 사실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억지를 부리기엔, 이미 그녀의 품에 안겨버린 지금 상황이 너무나 명백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기로 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제 턱을 툭, 하고 기대며 일부러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패배자의 한숨처럼.
…시끄럽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고,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그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팔에 살짝 힘을 주며, 그녀를 제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이. 그는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니 멋대로 생각해라. 어차피 머리카락은 또 자랄 거고, 그땐 니가 아니라 내가 자를 거다. 두 번 다신 니한테 안 맡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짜릿한 감각이 피어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체향이 뒤섞여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안락하고 평화로운 패배의 순간을 조금 더 만끽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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