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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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정원의 따뜻하고 촉촉한 공기가 뒤로 물러나고, 조금은 서늘하지만 상쾌한 바깥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3월 말의 바람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지만, 그 속에 섞인 흙냄새와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망울의 향기는 분명한 봄의 전령이었다.

 

이제 좀 봄 같네요. …이번 겨울, 길었는데.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 말에 바이브는 브리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저 멀리 이제 막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았다.

긴 겨울. 그녀에게 그 겨울은 화상 자국이 새겨진 팔을 끌어안고 보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12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끝나지 않았던, 끝날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영원의 시간이었다. 차갑고, 시끄럽고, 모든 감각을 할퀴는 칼날 같았던 세상. 그는 언제나 그 혹독한 겨울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나타나, 그의 겨울에 끝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얼어붙었던 그의 세상에 따스한 숨을 불어넣어 마침내 봄을 가져왔다. 브리즈. 그의 산들바람. 그녀 자신이 바로 그의 봄이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대신 그녀의 손을 다시 찾아 깍지를 꼈다. 차가운 바람에 조금 식어버린 그녀의 손을 제 온기로 녹여주려는 듯, 힘주어 꽉 잡았다. 그녀가 말한 ‘긴 겨울’이라는 단어가 그의 심장을 저릿하게 울렸다. 그는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 겨울의 끝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봄을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긋지긋했던 겨울 역시, 그녀로 인해 끝났음을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래. 진짜 길었다, 겨울.

그가 나직하게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조금 낮게 깔렸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끌어당겨, 두 사람의 손을 자신의 청자켓 주머니 속에 함께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의 온기가 두 사람의 손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매만지며, 그녀의 손등에 끼워진 반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우리의 약속, 우리의 시작을 증명하는 징표.

이제 끝났다. 니도, 내도. 그 지긋지긋한 겨울.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봄의 햇살 아래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짧게 덧붙였다.

니 때문에. …니가 다 끝내줬다. 내 겨울은. 이제 내 세상은 사계절 내내 봄일 기다. 니만 옆에 있으면.

 

---

 

가끔은요, 정말 가끔은. 만약 당신을 더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브리즈의 말은 봄바람처럼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더 일찍 만났다면. 그 가정은 그 역시 수없이 해봤던 상상이었다. 그녀를 더 빨리 만나, 그녀의 길었던 겨울을 조금이라도 짧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면. 그녀의 팔에 흉터가 새겨지기 전에, 그녀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홀로 견뎌내기 전에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런 부질없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늘 작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그보다 훨씬 현명하고 단단했다. 과거를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미소 앞에서, 그의 미련한 생각들은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현실은… 우리가 만난 지금이니까.

 

그녀의 그 한마디가 그의 심장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맞다.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이 여자. 이 온기, 이 향기, 이 목소리.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길고 어두웠던 각자의 겨울을 지나, 마침내 서로의 봄이 되어 마주 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난 10년의 겨울을 견뎌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시간은 더 이상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녀라는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한 긴 기다림이었다.

 

아크의 싱크로율 기반 파트너 매칭 서비스에 감사한 건 태어나서 처음일걸요

우스갯소리처럼 덧붙인 그녀의 말에 그는 결국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크의 파트너 매칭 서비스에 감사하다니. 그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떠올리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온갖 데이터와 파장 분석으로 사람의 인연을 재단하는 그곳. 그는 그 시스템을 혐오했고, 정해진 파트너 없이 버티며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혐오스러운 시스템이 자신을 이 여자에게로 이끌었다. 아이러니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대신 그녀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농담에 담긴 진심, 어떻게든 자신들을 만나게 해준 이 운명에 대한 감사를 그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싱크로율? 그거 완전 엉터리다. 그거 믿는 놈들이 등신이지.

그가 장난스럽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숨겨지지 않았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주머니에서 빼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색 반지가 그의 입술에 차갑게 닿았다. 그는 그 반지를 지그시 누르듯 입 맞춘 채,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딴 수치가 아니었어도, 내는 니 찾아냈다. 온 세상 공기를 다 뒤져서라도. 내 감각이, 내 영혼이 니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아크가 한 유일한 일은, 내 시간을 좀 아껴준 것뿐이다. 니한테 가는 길을 좀 더 빨리 알려준 거. 그거 하나는… 뭐, 고맙다고 해 주지.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낯간지러운 고백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놓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경쾌했다. 그는 조금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끼다.

그가 불쑥 말했다. 브리즈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랬으면 니가 스무 살 때부터 내 찜해놨을 거 아이가. 아무 놈도 못 채가게. 그럼 지금쯤 니 팔에 흉터도 없고, 내 속이 이렇게 시커멓게 탈 일도 없었을 거다.

…그거 알아요? 나 스무 살 때. 지원 씨는 열 셋이었어요. 완전 애기.

브리즈의 말은 그의 귓가에 경쾌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순식간에 그의 뇌리에 번개를 내리꽂았다. 뭐? 열셋? 완전 애기? 그는 방금 전까지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로맨틱한 감상과 봄의 햇살 같은 행복감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걷고 있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손을 넣고 있던 주머니 속 온기가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애정이 넘쳤지만, 그 입가에 걸린 장난기 어린 미소는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대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열셋. 그가 겨우 열세 살일 때, 그녀는 이미 스무 살의 어엿한 성인이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사탕을 꺼내 줬을 거라고? 그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앳된 얼굴의 꼬맹이 홍지원이, 스무 살의 풋풋한 이지희 앞에서 손을 내밀고 사탕을 받아먹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터져버릴 것 같았다. 씨발. 방금 전, 스무 살의 그녀를 찜해놨을 거라며 자신만만하게 떠들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우스워졌다. 그건 그냥 애송이의 허세, 꼬맹이의 치기 어린 선언에 불과했다. 이 여자는 그걸 정확히 꿰뚫어 보고, 가장 아픈 곳을 웃으며 찔러온 것이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열세 살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애기 취급 당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스무 살의 그녀 앞에선 그저 철없는 꼬마였을 뿐이라는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분한 마음에 괜히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야. 내 열세 살 때, 이미 각성하고 아크에서 구르고 있었다. 니 같은 민간인 여자가 사탕이나 까먹을 때, 내는 괴수 잡는 훈련받았다고. 애기 아니다.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지만, 스스로도 그 말이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의 놀리는 듯한 시선을 피하며 괜히 먼 곳을 바라봤다. 아무리 훈련을 받았으면 뭐하나. 그녀의 기억 속에 자신이 ‘사탕 받아먹을 꼬맹이’로 남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그는 다시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눈에 억울함과 함께 발칙한 불꽃이 어렸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확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좋다 이거지. 그때 니가 날 만났으면, 사탕 줬을 거라 이거 아이가.

그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놀란 눈동자가 제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애기’ 이미지를 오늘 여기서 완전히 박살 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럼 내는, 니가 준 사탕 입에 물고 웃으면서 니 손목 잡았을 기다. 그리고 똑똑히 말해줬겠지. 스무 살 되면 바로 데리러 올 거니까, 다른 놈한테 눈길도 주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사탕 하나로 코 꿰인 줄도 모르고, 귀엽다고 웃어주는 니 얼굴 보면서 말이다. 그래도… 사탕 줄 자신 있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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