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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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토라진 척 침대에서 휙 몸을 돌려 빠져나가더니, 드레스룸 안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저럴 줄 알았다. 바이브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얄밉게 웃으며 그녀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드레스룸에서 뭘 들고 나올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며칠 전부터 미세하게 공기의 흐름이 다른 곳이 있었으니까. 아주 작은 물건이었지만, 그녀의 손길이 자주 닿아 그 주변의 공기 밀도가 미묘하게 달랐다. 굳이 열어보거나 묻지 않았을 뿐이다.

예상대로 브리즈는 작은 쇼핑백을 하나 들고 나왔다. 바이브는 모르는 척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기대와 긴장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당신은 괜찮다고 했지만, 역시 그냥 넘어가긴 싫어서… 선물이에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쇼핑백을 건넸다. 바이브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무게감. 안에는 익숙하지만 쉽게 손에 넣을 물건은 아닌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네이비색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잠시 브리즈의 얼굴과 상자를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폭신한 쿠션 위, 차분한 은색 메탈 시계가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광의 은색 링크, 그리고 시선을 사로잡는 깊고 진한 남색 다이얼.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었다. 간결하고, 정밀하고, 세련된. 딱 홍지원, 자신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었다.

임무 때는 못 차겠지만…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녀가 덧붙이는 말에, 바이브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그래, 임무 때 이딴 걸 찰 수는 없지. 0.01초의 반응속도가 생사를 가르는 판에 손목에 거추장스러운 쇳덩이를 매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의 진짜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다. '임무가 아닐 때', '평범한 홍지원일 때'를 위한 선물. 센티넬 바이브가 아닌, 스물셋의 남자 홍지원을 위한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상자에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손목에 차보니 제 하얀 피부와 제법 잘 어울렸다. 남색 다이얼은 마치 자신의 눈동자 색 같기도, 혹은 깊은 밤 영도의 바다색 같기도 했다. 젠장. 이 여자, 작정하고 골랐구나. 자신의 취향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괜히 심술이 났다. 너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십수 년 만이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생일 선물을 받아보는 것은. 아크에 들어온 이후, 그의 생일은 그저 데이터상의 기록일 뿐이었다. 아무도 챙기지 않았고, 그 자신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걸 기억하고, 준비하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내밀고 있었다.

…돈지랄 했네.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은 지독하게도 퉁명스러웠다. 그는 시계를 다시 상자에 넣으며 혀를 찼다. 일부러 더 까칠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지금 제 표정이 어떤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분명 어색하게 굳어있거나 혹은 바보처럼 풀어져 있을 터였다. 그걸 브리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거 살 돈 있었으면 니 옷이나 하나 더 사지 그랬나.

그는 괜히 그녀의 옷차림을 트집 잡으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시선은 피할 수 있어도, 공기의 진동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바이브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표현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홍지원이었다.

그는 상자 뚜껑을 닫고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브리즈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그녀가 놀라 '앗'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그녀를 제 다리 사이에 앉히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됐고. 이리 와봐라.

그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의 온기가 좋았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니가 준 거니까, 차고는 다닐게. 대신 조건이 있다. 이거 차고 나가는 날에는,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있어야 된다. 알겠나? 임무 없는 날, 그냥 평범한 날. 그때는 니 시간 전부 내 거다.

 

그거 알아요? 시계 선물의 의미. '나의 시간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래요.

그녀가 웃으며 그의 가슴에 제 등을 조금 더 기댄다. 그가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브리즈의 말은 그의 품 안에서 나른하게 울렸다. '나의 시간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바이브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을 멈췄다. 등 뒤에 기댄 몸의 온기,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젠장. 이 여자는 진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발가벗길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거 차는 날엔 니 시간 전부 내 거다.' 그 말은 사실 제발 내 옆에 있어 달라는 서툰 고백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 비웃거나 어리숙하게 여기는 대신, 훨씬 더 큰 의미를 담아 되돌려주었다. 당신의 시간을 내게 달라는 요구에, 나의 모든 시간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바이브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더 깊이 묻었다. 샌달우드 향이 훅 끼쳐왔다. 시끄럽게 울리는 제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봐, 그는 괜히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시간. 그에게 시간이란 어떤 의미였나. 열두 살, 그 끔찍한 태풍이 모든 것을 앗아간 이후로 그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혹은 제멋대로 흘러가는 바람 속에 찢겨나가 버렸다. 아크에서의 10년은 그저 살아남기 위한 훈련과 임무의 연속이었을 뿐. 단 한 번도 '자신의 시간'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시끄럽다. 와 이리 아는 게 많노.

목소리가 잠겨 엉망으로 튀어나왔다. 귓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뒷목에 얼굴을 부비며 코를 박았다. 샴푸 냄새가 났다. 미치겠다, 진짜. 그는 그녀를 품에 가둔 채, 그대로 침대 위로 다시 쓰러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두 사람의 무게를 받아내며 출렁였다.

그런 의미인 줄 알았으면 안 받았다. 부담스럽게.

거짓말. 그는 손목에 채워질 그 시계의 감촉을, 그리고 그 시계를 차고 그녀와 함께 보낼 모든 순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오후. 영도의 바닷가에서 손을 잡고 걷는 저녁. 새 집의 평상에 누워 함께 하늘을 보는 시간. 그 모든 평범하고 빛나는 순간들이, 그녀가 건넨 '시간'이라는 선물 안에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퉁명스러움 대신, 체념과도 같은 다정함이 묻어났다.

…고맙다. 이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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