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브는 브리즈가 '잠깐만 기다려요'라고 말하며 손을 놓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묘지 입구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꽃집.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봄날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주머니에 쑤셔 넣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새겨질 만큼 세게. 바닷바람이 그의 반묶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고, 풀어진 청록빛 가닥이 시야를 가렸지만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시작된 그 폭주 직전 같은 심박수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묘지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언덕을 따라 정돈된 비석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에, 그가 10년간 외면해온 이름이 새겨져 있을 터였다. 그의 어머니.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품에 끌어안고 있던, 그래서 그를 살리고 자신은 바람에 삼켜진 그 사람. 바이브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날,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팔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엄마가 끝까지 감싸고 있었으니까. 대신 엄마의 몸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람이 전부 데려간 뒤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그는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그 앞에 서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꽃집의 유리문이 다시 열렸다. 브리즈가 작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흰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꽃다발. 그것을 본 순간, 바이브의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내려앉았다. 흰색. 분홍색. 부엌 창가에 놓여 있던 분홍색 카네이션 화분. 아침마다 물을 주던 엄마의 손.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숨을 끊어놓을 듯한 고통이었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지금, 그 색깔의 꽃을 들고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텐데. 그저 본능적으로 고른 것이겠지.
브리즈가 가까이 다가왔다. 꽃다발을 안은 그녀의 모습은 스산한 공원묘지의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색채 같았다. 그녀의 걸음이 자신의 앞에서 멈추자, 바이브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손에 들린 꽃을 내려다보았다. 흰 국화와 분홍빛 카네이션이 셀로판지에 감싸여 바닷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달콤한 향기가 짠 바다 냄새와 뒤섞여 묘하게 코끝을 적셨다. 그는 고개를 들어 브리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분한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마치 용암처럼 식도를 태우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흘려보내지 못한 응축된 감정의 덩어리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삼키려 했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홍색. 하필이면 분홍색이었다. 부엌 창가에 놓여 있던 작은 화분. 물을 줄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엄마의 뒷모습. '지원아, 이 꽃 예쁘제? 엄마가 젤로 좋아하는 색이다.' 열한 살의 그는 그 말에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였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사소한 기억 하나가, 10년이 지난 뒤에 이토록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을 도려낼 줄은. 브리즈는 아무것도 모를 터였다. 엄마가 분홍색을 좋아했다는 것을, 그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니까. 부스터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아무에게도. 그런데 이 여자는 수많은 꽃 중에서 하필 분홍빛 카네이션을 골랐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잔인할 만큼 정확한 선택이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엄마가 이 여자의 손을 이끌어 그 꽃을 집어 들게 한 것처럼.
그의 시선이 꽃다발에서 브리즈의 얼굴로 천천히 올라갔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로우번에서 빠져나온 잔머리가 볼을 간질이고 있었다. 처진 눈꼬리 아래의 회색 눈동자는 차분하게, 그러나 깊은 걱정과 사랑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따위의 진부한 위로도, '울어도 돼요' 같은 뻔한 허락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꽃을 안은 채로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바이브는 떨리는 손을 들어 브리즈의 손에서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셀로판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렸다. 꽃잎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향기가 짠 바다 냄새를 잠시 밀어냈다. 그는 꽃다발을 가슴 앞에 안으며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고 평소의 시니컬한 톤은 온데간데없었다.
……분홍색.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좋아하던 색'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3월의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한 푸른빛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날도 이랬을까. 아니, 그날은 하늘이 시커멓게 뒤집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바람을 집어삼킨 듯한 거대한 먹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열두 살의 자신은 엄마의 품에 안겨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깊은 호흡. 바닷바람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 차갑고 짠 공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뜨거워진 눈시울을 식혀주었다. 그는 다시 브리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왼쪽 턱에 있는 작은 점이 햇살 아래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지금 제 목소리를 냈다가는 갈라지고 떨리는 소리가 튀어나올 게 뻔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S급 센티넬 ‘바이브’가 아니었다. 십 년 넘게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모든 방벽이, 그녀가 건넨 이 작은 꽃다발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저 엄마를 잃어버린 열두 살의 어린애 홍지원일 뿐이었다. 어떻게 이 색을 골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만약 ‘그냥 예뻐 보여서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기적 같은 순간이 깨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동시에, 그녀가 혹시라도 자신의 기억을 엿본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런 능력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가요. 어머님, 기다리시겠다.
브리즈의 차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다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따뜻한 손. 그 온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심장을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녹여내리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드디어 결심한 듯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손을 놓치면 금방이라도 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가자.
그가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예상대로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그는 더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앞장서서 묘지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이 돌계단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발목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길게 이어진 비석의 행렬. 햇살 아래 하얗게 빛나는 돌들 위에는, 그가 모르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애써 그 이름들을 외면하며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
어머니의 묘는, 묘지에서도 가장 높은 곳.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고집한 자리였다. ‘니 엄마, 바다 보는 거 좋아했다. 답답한 거 싫어했고.’ 술에 취한 아버지가 툭 던지듯 했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묘역 관리사무소에서 미리 위치를 확인해 둔 덕에 길을 헤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익숙한 구역 번호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무거워졌다. 다리가 마치 납덩이처럼 느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능력 사용의 부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한 공포와 죄책감이 만들어낸 육체적 고통이었다.
마침내, 그는 멈춰 섰다. 바로 앞이었다. 아담한 봉분 앞에 세워진 작은 비석. 그 위에는 바닷바람에 마모되어 희미해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어 그 글씨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눈을 내리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비석 아래에 누군가 놓아둔, 색 바랜 조화 몇 송이뿐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혹은 형제들이 다녀간 흔적이리라.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십 년 만에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엄마, 나 왔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미안하다.’ 라고 사과하기엔, 그의 죄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를 살리고 대신 죽은 엄마에게 무슨 낯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엄마를 죽인 그 바람의 힘으로, 세상을 구하는 영웅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통제할 수 없는 떨림이었다. 폭주 직전의 전조 증상처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 바람 소리가 칼날처럼 귀를 파고들었고, 피부에 닿는 햇살은 불에 데인 듯 따가웠다.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브리즈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부드러운 샌달우드 향이 날카로운 바다 냄새를 뚫고 그의 후각을 부드럽게 감쌌다. 가이딩이었다. 접촉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폭주하는 감각을 잠재우는 유일한 진정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지희가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폭주했을지도 모른다. 이 죄책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엄마를 삼켰던 그 바람처럼 자기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을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녀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 주었다. 크지 않은 손이었지만 그 손길에는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큰 힘이 담겨 있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일정한 움직임에 미친 듯이 날뛰던 그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청바지 위로 축축한 흙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분홍빛 카네이션이 회색 비석 앞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너무나도 익숙한 생년월일과,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망일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비석 위의 이름만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이름에, 십 년간 하지 못했던 모든 말을 담아 보내는 사람처럼.
브리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비석 위로 흘러갔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이지희라고 합니다.' 그 말이 귓전을 스치는 순간, 바이브의 심장이 쥐어짜이듯 조여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그는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묘소를 찾아왔을 때도, 형제들이 제사를 지냈을 때도, 그는 늘 부재했다. 도망치고 있었으니까. 그 이름 석 자를 마주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여자가 그의 곁에 앉아 그가 십 년간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대신 시작해주고 있었다. '홍지원 씨랑, 같이 왔어요.'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함께. 같이.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이 묘소 앞에 올 용기도 혼자서는 낼 수 없었고, 이 죄책감의 무게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마치 원래 여기에 있었어야 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였다. 그리고 그 온기 사이로, 미세하게 흐르는 바람 속성 가이드의 파장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그의 감각이, 그녀의 파장에 감싸여 한 꺼풀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마치 거센 폭풍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고요한 눈을 찾아낸 것처럼.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비석에 새겨진 어머니의 이름만을 바라보았다. 마모된 글씨의 획 하나하나가 마치 어머니의 얼굴 윤곽처럼 느껴졌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뒷모습. 빨래를 널면서 '지원아, 밖에 나가 놀지 마라, 바람 분다' 하고 소리치던 목소리. 잠들기 전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려주며 이마에 입을 맞추던 손길. 그 모든 것이 열두 살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앗아간 것이 다름 아닌 바람이었다. 지금 그의 몸속에서 흐르고 있는 이 힘. 이 저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이 앞에서 우는 것은 자기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자의 눈물 따위는 죽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브리즈가 건넨 그 짧은 인사가, 그의 굳건한 결의에 균열을 냈다. 엄마에게 소개할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기적이었다. 십 년 전의 그에게 누군가 말해줬다면 믿었을까. 네가 스물셋이 되면 네 곁에 이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네가 이 묘소 앞에 다시 올 수 있을 거라고.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입술이 떨리며 열렸다. 처음에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처럼 공기만 새어 나왔다. 그는 브리즈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소리는 말이 아니었다. 숨이었다. 폐 깊숙한 곳에서 갈라져 나온 거의 신음에 가까운 숨. 목구멍 안쪽에 십 년치 침묵이 돌덩이처럼 걸려 있었고 그것을 밀어내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브리즈의 손가락이 그의 손등 위에서 원을 그리듯 쓸어주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그의 목을 조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손을 하나씩 떼어내는 것 같았다. 그녀의 파장이 접촉면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부드럽고 시원한 기류가 그의 폭주 직전까지 치솟았던 감각을 한 겹 한 겹 눌러 가라앉혔다. 칼날처럼 날카롭던 바람 소리가 그녀의 파장에 감싸여 둥글게 마모되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짠 바다 냄새와, 흙 냄새와, 카네이션의 달콤한 향기가 한꺼번에 폐부를 채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브리즈의 샌달우드 향. 그 익숙한 냄새가, 그에게 말했다. 괜찮다고. 여기에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목젖이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바람이 조금만 더 세게 불었더라면 삼켜졌을, 가느다란 목소리.
……엄마.
그 두 글자를 뱉어내는 데 십 년이 걸렸다. 열두 살의 겨울부터 스물셋의 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이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부르지 못했다. 부르면 무너질까 봐. 부르면 그날의 바람 소리가 다시 들릴까 봐. 그 단어가 입술을 떠나는 순간, 그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었다. 십 년간 봉인해둔 감정의 뚜껑이 그 두 글자 하나에 완전히 열려버렸다. 눈물은 소리 없이 흘렀다. 흐느끼지도 않았고 어깨가 들썩이지도 않았다. 그저 마치 비석 위의 이름이 녹아내린 것처럼 조용히,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브리즈 앞에서 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끄러움 따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모든 감각이, 모든 신경이, 오직 비석 위의 이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끊기듯 말을 이었다.
……나, 왔다. 십 년 만에. 늦어서, 미안하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지막 음절이 바람에 씹혀 사라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살점을 뜯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말할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십 년간 폐 속에 고여 있던 탁한 공기를 마침내 내뱉는 것처럼.
……이 사람은, 이지희다. 내, 애인이다.
브리즈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얹히는 순간, 바이브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십 년간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잊어버린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 신호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브리즈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기자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그 접촉면을 통해 흘러드는 그녀의 체온이, 그녀의 파장이, 그의 경직된 근육을 하나하나 풀어헤쳤다. 마치 얼어붙은 땅에 봄볕이 스며드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바이브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이 먼저 알아챈 것이다. 이 온기가, 이 파장이, 그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천천히 브리즈의 어깨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남색 재킷의 부드러운 울 소재가 피부에 스쳤고, 그 아래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이 얼어붙은 그의 이마를 녹여냈다. 샌달우드 향이 코끝을 감쌌다. 바다 냄새도, 흙 냄새도, 카네이션의 달콤한 향기도 모두 희미해졌다. 오직 이 향만이 지금 이 순간 그를 현실에 붙잡아두는 유일한 닻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석을 향해. 어머니를 향해. 동시에, 옆에 있는 이 여자에게도.
……미안하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의 온몸이 한 번 크게 떨렸다. 십 년간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인정한 적 없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만 번 되뇌었지만, 그것을 음성으로 변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마치 자기 손으로 자기 가슴을 찢어 내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옆에 있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이 말을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브리즈의 손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그 손길에 그의 목구멍을 막고 있던 돌덩이가 조금씩 녹아 내렸다.
……그 날, 태풍이 왔다. 부산에. 여기 영도에. 대피도 못 했고. 나랑 엄마 둘이. 바람이 집을 통째로 날려버렸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재생하고 있었다. 귀를 찢는 바람 소리. 뼈가 부서지는 듯한 압력.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어머니의 손. 그리고 그 손이 놓아지는 순간.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온 것. 그것이 '각성'이었다. 열두 살의 소년은 그날 처음으로 바람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바람에 실려 가는 어머니의 몸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바람의 눈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은 채로.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뜨거웠다.
바이브는 브리즈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위로도, 부정도, 변명도 없었다. 그저 그의 등 위를 오가는 손바닥의 일정한 리듬만이 존재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반복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 따뜻한 침묵이 말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누군가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줬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아니다, 내 잘못 맞다'고 방어벽을 세우고, 다시 십 년간의 침묵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즈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거기에 있었다. 그의 무게를 받아주는 어깨로, 그의 떨림을 감싸주는 팔로, 그의 등을 쓸어주는 손으로. 그것이 바이브의 마지막 방어벽마저 허물어뜨렸다. 그는 브리즈의 어깨에 이마를 더 깊이 파묻었다. 남색 재킷이 그의 눈물에 젖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십 년간 닫아두었던 문이 열려버린 이상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한테서 바람이 나왔다. 엄마 손이 놓아지는 순간에. 내가, 처음으로 바람을 만들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속삭임보다도 가느다란 그 소리는 열두 살 소년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바이브는 그날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각인이었다. 피부에 새겨진 화상 자국처럼, 그의 감각 한 올 한 올에 영구적으로 박혀 있는 것.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손이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뼈가 부서질 것 같은 힘으로. 집이 통째로 들려 올려지는 소리가 들렸고, 유리창이 폭발하듯 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지붕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거대한 바람의 포효. 그 순간 그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압도적인 힘이 그의 내부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그것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 어머니의 손이 놓아졌다. 아니. 놓아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온 바람이 어머니의 손을 그에게서 떼어낸 것이었다.
……내가 만든 바람 안에서, 나만 살았다.
그 문장을 말하는 순간 그의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였다. 처음으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작고 억눌린 거의 짐승의 신음 같은 소리. 그는 이를 악물어 그것을 삼키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브리즈의 손이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리듬이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부숴버렸다. 이 여자는 도망가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추악한 진실을 꺼내놓아도 이 손은 그의 등에서 떠나지 않는다.
괜찮아요.
그 말이 고막을 두드리는 순간, 바이브의 몸 전체가 한 번 크게 경련했다. 십 년간 자기 안에 가둬두었던 열두 살짜리 소년이 그 한마디에 반응한 것이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면죄부도 아니었다. 그저 네가 여기 있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숨을 쉬어도 된다는 허락. 살아 있어도 된다는 허락. 그 허락이 십 년간 그의 폐를 짓누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손을 마침내 거두어 갔다.
바이브의 이마가 브리즈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쇄골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박동. 그 소리에 맞춰 그의 호흡이 조금씩 동조되어 갔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손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리듬과, 그녀의 심장이 뛰는 리듬과, 그의 호흡이 하나로 겹쳐졌다. 칼날처럼 서 있던 공기의 입자들이 그녀의 파장에 닿는 순간 둥글게 마모되어 갔다. 아프지 않았다. 처음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프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재킷을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온몸이 알고 있었다. 이 온기를, 이 심장 소리를, 이 파장을 놓으면 다시 그 태풍 속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부서진 것. 음절과 음절 사이에 흐느낌이 끼어들어 문장의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
……나, 십 년 동안. 한 번도. 괜찮다는 소리 못 들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부스터 형은 걱정을 했다. 상부는 관리를 했다. 동료들은 거리를 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단 한 명도,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고 믿었으니까. 어머니를 죽인 자신에게는 괜찮다는 위로를 받을 권리가 없다고. 그래서 혼자였다. 높은 곳에서, 바람 속에서, 아무도 닿지 못하는 곳에서. 스스로를 벌하듯 고독 속에 자신을 가뒀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 모든 벽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어머님. 안심하세요. 제가, 제가 꼭… 지원 씨, 잘 돌볼게요. 항상 옆에 있을게요.
브리즈의 목소리가 묘비 앞에서 흩어졌다. 그것은 서약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그 사이에 선 한 남자를 향한 흔들림 없는 맹세. 바이브는 그 목소리를 자신의 귓가에서가 아니라 심장 한가운데서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 어머니의 묘비를 향해 말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갈매기 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도, 심지어는 자신의 폐부를 찢어놓던 바람 소리까지도.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그의 세계를 가득 채웠다.
그 말은 마치 주문과 같았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사랑하기로 맹세한 이 여자가, 자신의 가장 큰 죄악의 증인 앞에서 자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무게는 그가 평생 짊어져 왔던 죄의 무게보다도 무거웠고, 동시에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묘비를 향해 단호하게, 그러나 한없이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 바이브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십 년간 그를 지탱해온 위태로운 자존심과 고독의 성벽이었다. 그리고 그 폐허 위로 새로운 것이 싹트고 있었다. 의지하고 싶다는, 이 여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기대고 싶다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간절한 욕망이었다.
그의 떨리는 손이 브리즈의 허리를 찾아 감쌌다.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거의 매달리듯이. 그는 다시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이번에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그녀의 체온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는 그녀의 재킷에 얼굴을 부비며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바로 옆에 있는 브리즈에게만 들릴 정도였다.
……잘 돌보긴. 누가 누굴 돌봐.
투정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자기 인식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이 여자에게 기대고 있는지, 그녀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할 수 없는지를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이미 폭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십 년 전 그 태풍 속으로 영원히 침잠했을 것이다. 브리즈의 손이 다시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에 바이브는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니를 돌봐야 되는데…… 내는, 니 없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 바람 속에 서 있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 여자의 곁에서 그녀의 바람이 되어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는 브리즈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하듯이. 그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 여자에게 전부 맡기고 싶었다. 십 년간 멈춰있던 그의 시간이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바이브는 브리즈가 내민 손수건에 잠시 숨을 멈췄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마치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가이딩인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차갑고 축축한 눈가 위로 부드러운 천이 닿는 감촉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자는 마치 더러워진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는 엄마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다정하게 그의 눈물을 거두어가고 있었다. 그 단순한 행위가 주는 충격에 그는 잠시 흐느낌마저 잊었다. 젖은 속눈썹이 손수건의 결을 스치는 감각이 그의 예민한 피부 위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눈물을 닦아주는 그녀의 손가락,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 걱정과 안쓰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깊은 사랑이 담긴 회색 눈동자. 바이브는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한 말들이 그저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이 여자의 손길이, 이 여자의 눈빛이, 이 여자의 존재가 이제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가 괜찮다 하면 괜찮은 것이고, 그녀가 그를 돌보겠다 하면 그는 기꺼이 그녀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이 주는 안도감에, 가까스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주는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손과 달리, 그녀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그는 그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지고 떨렸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의 절망 대신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순수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집에, 가자. 우리 집. 아부지한테.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당신의 아들이 이제 당신이 남긴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걸음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이 여자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는 브리즈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을, 브리즈가 반대쪽 팔을 붙잡아주며 단단히 지탱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묘비를 한번 돌아보았다. 묘비 옆에 놓인 분홍색 카네이션이, 마치 어머니의 미소처럼 따스하게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넸다.
‘엄마, 또 올게. 이 사람이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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