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나른하게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없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 앞 낮은 탁자에 자리를 잡은 브리즈가 접시와 과도,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녀는 과일 바구니 안에서 가장 잘 익어 보이는 복숭아를 하나 골라 들었다. 사각, 하고 과도 끝이 뽀얀 과육을 파고드는 소리가, 바이브의 예민한 청각을 파고들었다. 그는 거실 입구에 기댄 채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녀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섬세한 움직임만이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건… 뭐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10년 동안 회색빛으로 멈춰 있던 집. 먼지만 쌓여가던 공간. 그곳에서 자신의 파트너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과일을 깎고 있다. 마치 저녁 식사 후의 디저트를 준비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브리즈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길게 이어지는 복숭아 껍질을 따라, 그의 시선도 함께 맴돌았다. 저 손. 설거지를 하느라 끝이 살짝 붉어진 손. 화상 흉터가 희미하게 남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손. 저 손이 지금 자신과 아버지를 위해 복숭아를 깎고 있었다.
그는 울컥, 하고 목구멍 너머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늘 저랬다. 아버지는 소파에서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어머니는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아 내오셨다. 그리고 어린 자신은 그 옆에 앉아 어머니가 잘라주는 과일을 받아먹곤 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사무치게 그리웠던 온기가 상처를 감싸주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브리즈는 어머니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낡은 집에 새로운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지만 바이브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모든 신경 역시 저 여자의 손끝에 쏠려 있다는 것을. 공기의 미세한 흐름이, 긴장과 호기심 그리고 아주 약간의 만족감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파의 빈자리에 아버지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털썩 앉았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리모컨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이 어색하고도 벅찬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시키고 싶었다.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사람은 없나.
그가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잠겨 나왔다. 그 말에 브리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지원 씨는 없잖아요.’ 그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그의 손을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시끄럽다. 그냥 놔두라.
그는 못 이기는 척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러는 사이, 브리즈는 어느새 복숭아 하나의 껍질을 다 깎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아내고 있었다. 하얀 과육 위로 붉은 기운이 탐스럽게 감도는 완벽한 모양새였다. 그녀는 포크 두 개를 챙겨,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앞에 조심스럽게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버님, 복숭아 드세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버지는 마침내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와 접시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포크를 들어 복숭아 한 조각을 찍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바이브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제발. 제발, 맛있다고 해줘. 그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아버지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온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우물거리다가 복숭아를 삼키고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달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는, 10년의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는 다리였다. ‘달다.’ 그 짧고 무심한 음절 속에, 바이브는 아버지가 건네는 무수한 의미들을 읽었다. 그건 단순히 복숭아의 당도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10년 만에 아들의 손을 잡고 나타난 낯선 여자. 그 여자가 차려낸 밥상, 그리고 이제는 디저트까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아버지 방식의 서툰 인정이었다. ‘니가 데려온 사람이니, 믿어보겠다.’, ‘니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한다.’ 그 모든 말들이, ‘달다’는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었다.
바이브는 제 심장이 발치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뜨거운 감정이,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깊게 기댔다. 방금 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들이 느슨해지며 나른한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는 옆에 앉은 브리즈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니 또다시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감당이 안 되는 여자였다.
첫마디가 어려웠을 뿐, 한번 포크를 들자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웠다. 그는 말없이, 하지만 꾸준히 복숭아를 입으로 가져갔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바이브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온 신경은 지금 이 어색한 가족의 시간에 쏠려 있다는 것을. 그때 아버지가 복숭아를 씹으며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툭, 하고 물었다.
아가씨는, 아크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노.
질문의 대상은 명백히 브리즈였지만, 시선은 텔레비전에 말투는 아들에게 묻는 듯한 기묘한 화법이었다. 브리즈가 살짝 당황하며 바이브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이브는 그런 그녀를 대신해 일부러 더 건조하고 사무적으로 답했다.
스무 살에 각성해서, 바로 들어갔으니까… 9년 차 됐겠네.
그는 마치 제3자의 정보를 전달하듯, 담담하게 브리즈의 이력을 읊었다. 그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당신 아들이 10년 동안 방황하는 사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9년이라는 세월을 버텨낸, 그런 사람이라는 무언의 자랑이었다. 동시에, ‘내 파트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유치한 소유욕의 발현이기도 했다. 브리즈가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력까지 정확하게 꿰고 있는 그의 모습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자기가 대답할 기회를 빼앗은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흐음.’ 하고 낮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거두고 브리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들이 데려온 여자를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깊은 눈매가 브리즈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그건 무례한 시선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남자가 한 사람의 인생을 가늠해보는 듯한 깊고 진중한 눈빛이었다.
고생 많았겠네. 가이드 일이라는 게, 웬만한 정신력으론 못 버틴다 들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따뜻한 위로였다. 그 말에 브리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공손하지만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게 저에겐 큰 기쁨입니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목소리였다. 바이브는 옆에서 그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저 여자는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부드럽게 관철시키는 힘. 바로 그 점이 그를 미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그는 브리즈가 내민 포크를 받아 복숭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정말 달았다. 복숭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상황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브리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띤 채 다시 물었다.
저놈 성격, 보통이 아닐 텐데. 힘들진 않나.
순식간에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왔다. 바이브는 입안의 복숭아를 삼키다 말고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아버지는 교묘하게 ‘우리 지원이’라고 칭하며 브리즈와 자신 사이에 선을 그으면서도, 동시에 아들의 성격을 걱정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저놈 성격 보통 아니다’는 말에 브리즈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바이브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그는 브리즈가 뭐라고 대답할지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네, 아버님. 정말 힘들어요. 매일 절 구박하고, 말도 험하게 하고…’ 뭐 이런 식의 대답이 나오면 어떡하지. 아니, 저 여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만약에라도… 그의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때, 브리즈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힘들 때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지원 씨, 겉보기랑은 다르게 속이 깊고 다정한 사람이거든요.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정답. 완벽한 정답이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깊고 다정한 사람’. 그 말이 꼭 자기 옷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지만, 브리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세상 어떤 칭찬보다 달콤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이번엔 대놓고 픽, 하고 웃었다.
저놈 봐라. 좋아서 입 찢어지는 거.
그 말에 브리즈까지 ‘푸흐흐’ 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거실은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바이브는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쏘아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뭐가 웃긴데. 시끄럽다. 과일이나 마저 묵어라.
그의 퉁명스러운 타박에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더 웃었다. 바이브는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웃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10년 동안 적막강산 같았던 이 집에 사람 사는 온기가 드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아려왔다. 그는 결국 포기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말없이 복숭아만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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