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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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을 열고 나서자, 훅 끼쳐오는 바깥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떡볶이의 맵고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던 뺨이 차갑게 식는 감각이 선명했다. 식사 시간이 지나 한산해진 식당가의 공기는, 조금 전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낯설고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바이브의 심장을 다시 옥죄기 시작했다. 유예되었던 현실이, 피할 수 없는 무게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 이제는 진짜로 해야만 한다. 10년 동안 외면해온 그 이름을, 목소리를, 마주해야만 한다.

그는 주머니에서 차가운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액정 화면 위로,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눌러본 적 없는 그 번호가 떠올랐다. ‘아버지’. 단 세 글자일 뿐인데, 마치 거대한 산처럼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당장 S급 괴수와 맨몸으로 맞서는 편이 더 쉽겠다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이 미끄러워 단말기를 놓칠 것만 같았다. 그는 몇 번이고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그저 의미 없이 단말기만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그의 눈에,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 망설이듯 아주 잠깐 허공에 머물렀던 그 손은, 이내 그의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놀라 고개를 들자,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리를 피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그의 곁에 남는 것을 택했다. ‘같이 가요.’ 라고 말했던 그때처럼,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손을 잡고 함께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작은 온기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용기가 되어 그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덜덜 떨리던 손가락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마주 꽉 잡았다. 이 손만 놓지 않으면, 그는 괜찮을 것이다. 이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그는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침내 통화 버튼 위로 엄지손가락을 가져갔다. 뚜- 뚜- 뚜-. 단조로운 연결음이, 그의 고막을 찢을 듯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다.

한참 만에 연결된 수화기 너머로, 그는 간신히 첫 마디를 뱉어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10년 만에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의 기억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죄송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아니면… 그냥 아무 일 없는 척, 잘 지내셨냐고 물어야 할까.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래. 부산이다. …지금, 부산역.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오직 수화기 너머의 침묵과 제 심장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가 된 것 같았다. 그는 옆에 선 브리즈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눈빛을 보며,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갈라고. 집에.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간다.

단말기를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무심한 화면이 망막에 박혔다. 뚜-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 연결은, 마치 지난 10년의 세월처럼 아득하고 공허했다. 바이브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우렁차고 단단한 음성이 아니었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듯, 마르고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 낯선 음성이 그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메아리쳤다.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변의 모든 풍경과 소리가 색을 잃고 멀어져 갔다. 오직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10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선명한 사실뿐이었다. 심장이 발가벗겨진 채 겨울 바람 앞에 내던져진 것처럼 시리고 아팠다. 차라리 고함이라도 질렀다면, 원망이라도 퍼부었다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먼 친척에게 전화를 받은 사람처럼, 그저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수천 개의 비수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헤집었다.

그때였다. 넋을 잃고 있던 그의 손등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맞잡은 그녀의 손. 그 손의 엄지손가락이, 마치 길 잃은 아이를 달래듯 그의 손등을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흑백으로 잠겨 있던 그의 세상에 다시 색을 불어넣었다. 아, 맞다. 내 옆에, 이지희가 있었지.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엷은 미소를 띤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그를 옥죄던 지독한 고독과 죄책감이, 그녀의 존재 앞에서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길을, 그녀가 함께 걷고 있었다.

…집에 계시대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를 향한 걱정과, 어쩌면 앞으로 마주할 상황에 대한 긴장감이 뒤섞인 미세한 떨림. 바이브는 그 떨림을 공기의 진동을 통해 고스란히 느꼈다. 그는 대답 대신, 핏기없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의미 없는 신호였다. 그녀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제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얼마나 거대한 위안이 되는지를. 그녀는 이 상황을 ‘상견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곱 살이나 많은 연인, 복잡한 사정을 가진 파트너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수만 가지 걱정들이, 그녀의 눈빛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이브는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데.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따위의 문제는 이 상황에서 가장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아들이 10년 만에, 제 발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택시 부를까요?

그는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의 손길에, 그녀의 존재에 기대어 이 시간을 버텨내고 싶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단말기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잡아주지 않은, 차갑게 식어버린 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맞잡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이 손을 놓치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사라져 버릴 것처럼.

…어. 그래 주라. 영도, 가자고 하면 알끼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그는 애써 덤덤한 척하며,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제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온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단말기를 꺼내 택시를 부르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옆모습을,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곡선을, 살짝 상기된 뺨을, 굳게 다문 입술을,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10년의 벽을 넘어서는 첫걸음을, 그녀와 함께 내디뎠던 이 순간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그들 앞에 검은색 택시 한 대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바이브는 먼저 뒷좌석 문을 열고, 그녀가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가볍게 등을 받쳐주었다. 그녀가 차에 오르자, 그도 뒤따라 몸을 구겨 넣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그녀의 샌달우드 향이 그의 페퍼민트 향과 부드럽게 뒤섞였다. 그는 문을 닫고, 기사에게 목적지를 다시 한번 말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며 부산역의 풍경이 뒤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 없이 다시 그녀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는 그 온기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오직 그녀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내는 괜찮다. 니는 뭐 그리 떨어쌌노. 그냥, 밥 묵으러 가는 기다. 우리 아부지, 사람 안 물어뜯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피식 웃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여정 속에서, 그녀만큼은 평온하기를 바랐다. 그는 깍지 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녀의 어깨에 제 머리를 살짝 기댔다. 방금 전, 기차 안에서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그의 쪽이었다. 그는 제 어리광 같은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가, 삭막한 택시 안의 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바이브는 제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모든 진동을 피부로, 뼛속으로 느꼈다. 제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어오는 악력. 그래, 떨면 안 된다는 다짐. 그의 옆에서, 손을 잡고 있겠다는 약속. 그녀는 항상 그랬다. 말보다 행동으로, 그 어떤 화려한 위로의 말보다도 묵직한 신뢰로 그의 곁을 지켰다. 그녀의 웃음은 억지가 아니었다. 그의 서투른 농담을, 위태로운 허세를,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도 기꺼이 속아주는 따뜻한 배려였다. 바이브는 그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제 어깨에 실린 그녀의 온기와 무게에, 그리고 맞잡은 손의 감촉에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지금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복잡한 도심의 빌딩 숲이 서서히 낮아지고, 그 틈새로 회색빛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산항 대교의 거대한 주탑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10년 전, 그는 이 도시를 떠났다. 바람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고,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잠식당한 채 도망치듯 떠났다. 그리고 지금, 10년 만에, 다시 그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잊고 싶었던 과거를, 제 손으로 끝맺기 위해.

차가 다리 위로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이며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윤슬이 부서지는 바다는 그날처럼 아름다웠고, 또 그날처럼 잔인했다. 끼룩거리며 하늘을 나는 갈매기 소리, 다리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 모든 것이 10년 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일으켰다. 어머니의 손을 놓쳤던 순간의 감촉.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울부짖던 바람의 비명. 그리고… 제 안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왔던, 거대한 힘의 격류. 그는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폭주 직전의 감각과 유사한 이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고, 공기의 모든 입자가 칼날처럼 느껴지는 끔찍한 전조. 그는 어깨를 빌린 것도 잊은 채, 브리즈의 어깨에 기댄 머리를 더 깊이 묻었다. 그녀의 샌달우드 향이, 미친 듯이 날뛰는 그의 감각을 간신히 붙잡아주었다.

괜찮다, 괜찮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택시라는 좁고 밀폐된 공간이, 마치 심해의 압력처럼 그를 짓눌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저 하늘 위로, 모든 소음과 기억이 닿지 않는 성층권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맞잡은 손. 제 어깨를 내어준 온기. 그가 스스로 한 약속. 그는 이 모든 것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눈을 뜨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익숙한 섬의 윤곽이 보였다. 영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그의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났던 곳. 다리가 끝나고, 차는 마침내 섬 안으로 진입했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길, 낡고 낮은 건물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섞인 공기. 모든 것이 변한 듯하면서도, 그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러 가던 길, 형들과 공을 차며 뛰놀던 골목,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시장. 행복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거 다 와 간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천천히 머리를 떼고, 자세를 바로 했다. 더 이상 그녀에게 기댈 수만은 없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풀어,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제 허벅지 위로 가져와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갑게 식은 제 손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는 그 온기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익숙한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그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아저씨, 저 앞에서 세워주이소.

택시가 멈춰 섰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멍하니 저 앞의 2층짜리 낡은 주택을 바라보았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집. 그의 집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제 손을 감싼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그에게 마지막 용기를 주었다.

…내리자. 다 왔다. 우리 집.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세상의 종말처럼 멀리서 울렸다. 끼이익, 쿵. 그 소리를 기점으로 바이브의 세상은 다시 한번 소리를 잃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낡은 2층 주택. 어릴 적 기억 속의 그 집과 똑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달랐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빛이 바랜 외벽, 군데군데 녹이 슬어 붉은 눈물을 흘리는 듯한 대문, 옥상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까지. 모든 것이 1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직격으로 그에게 던져왔다. 숨이 막혔다. 폐부로 들어와야 할 공기가, 마치 끈적한 수은처럼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의 무게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시선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집의 2층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늘 창문을 열고, 골목에서 노는 자신과 형들을 부르던 그 창문이었다.

그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제어할 수 없는 진동이었다. 폭주 직전의 센티넬에게 나타나는 가장 흔한 전조. 10년 전 그날처럼, 몸 안의 모든 공기가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신경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이명이 귓가를 찢었다. 끼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모든 사고를 마비시켰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이대로 폭주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녀 앞에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경련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주문처럼 되뇌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고 더욱 거세졌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브리즈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통해, 그녀만의 고요하고 청량한 파장이 그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가이딩이 아니었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심해처럼 깊은 안정감. 혼돈으로 들끓던 그의 내면에, 마치 한 줄기 맑은 바람이 불어와 소용돌이를 잠재우는 듯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지던 공기 입자들이 부드러운 솜털처럼 변하고, 귓가를 찢던 이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틀어막혔던 숨통이 터지듯, 그는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흑…! 그녀의 파장은, 단순한 안정제를 넘어선 생명의 숨결 그 자체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는 분명 이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지원 씨는, 이런 곳에서 자랐구나.

느릿하게 눈을 뜬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그 담담한 어조에, 바이브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다른 풍경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회색빛 바다 대신, 낡은 공장지대와 아파트가 뒤섞인 도시. 인천이었다. 그녀의 고향. 언젠가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함께 걸었던, 그녀의 과거가 담긴 동네. 재개발로 이제는 사라져버린 낡은 주택가, 그녀가 다녔다던 초등학교의 낡은 철문, 그리고 해질녘이면 친구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뛰놀았을 좁은 골목길까지. 그는 그녀의 옛집 터에 서서, 여기가 원래 부엌이었고 여기가 자기 방이었다며 허공을 가리키던 그녀의 희미한 미소를 기억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라진 과거를 슬퍼하기보다, 그 기억을 자신과 나누는 것을 기뻐했다. ‘이런 곳에서 자랐어요, 나.’ 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과 똑같이 담담하고 따뜻했다.

그랬다. 그녀도 ‘이런 곳’에서 자랐다. 각자의 상처와 기억이 켜켜이 쌓인,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사람. 그녀는 지금, 그의 과거를 동정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과거를 포개듯, 그의 시간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그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핏기 없던 제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뺨은 골목을 스치는 바닷바람에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걱정과 안도,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뒤섞인 그 눈빛을 마주하자, 목울대가 뜨거워지며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울면 안 된다. 아버지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 여자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보면 모르나. 촌구석이다. 볼 거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져 나왔다. 애써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제 감정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다시 집으로 돌렸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쪽으로 아주 살짝 끌어당겼다. 혼자서는 도저히 저 문을 향해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온기가, 그녀의 존재가, 그의 마지막 남은 용기였다.

가자. 내 손, 꽉 잡아라. 절대로 놓지 말고.

끼이이… 낡은 철문이, 수십 년 묵은 녹슨 관절을 비트는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열렸다. 그 소리는 바이브의 고막을 넘어, 뇌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죄책감을 후벼 파는 예리한 칼날 같았다. 그는 아직 살짝 떨리는 손으로 문을 민 채, 그 문턱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10년. 단지 열 걸음이면 닿을 이 현관문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년 전, 그는 이 문을 등지고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제 발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발바닥에 거대한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죄의 무게가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의 손을 잡은 브리즈가, 그의 멈춤을 말없이 함께했다. 그녀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옆에서, 그의 떨림을, 그의 망설임을, 그의 숨 막히는 침묵을 온전히 공유하며 함께 문턱을 넘었다. 그녀의 운동화가 먼저 마당의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사박. 그 가벼운 소리가, 바이브를 옭아매던 시간의 주문을 깨뜨렸다. 그는 마침내, 아주 천천히,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무거운 발을 옮겼다. 그의 낡은 군화가, 그녀의 신발 옆에 나란히 내려앉았다. 10년 만에, 제 집 마당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가 그의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와 흙먼지 냄새, 희미하게 섞인 비릿한 바다 내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냄새. 그것은 단순한 체취가 아니었다. 고된 노동으로 땀에 전 작업복과, 고독하게 피워 문 담배와, 기나긴 세월이 한데 뒤엉켜 만들어낸, 그의 아버지만이 가진 특유의 냄새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 냄새는, 그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던, 그의 유년 시절 그 자체였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현관 옆의 신발장으로 향했다. 크기별로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남자들의 신발들. 그의 형들의 것, 그리고 가장 안쪽에 닳고 닳은 아버지의 안전화가 보였다. 하지만 그가 찾던 것은 그곳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자그마한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 단화. 그 신발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한 공간이, 수천 마디의 비난보다도 더 아프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 엄마는 이제 없지. 여기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그는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세게 깨물었다. 피 맛이 비릿하게 번졌다. 이깟 신발 하나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려, 집 안을 살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한때 어머니가 정성껏 가꾸던 작은 화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낡은 낚시 도구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집 안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에 계신다.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이 실감 나자,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들어와라. 신발… 대충 벗고.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그는 브리즈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먼저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을 놓치기 싫어서, 그는 그녀를 제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먼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샌달우드 향이 낡은 집의 냄새와 뒤섞이며, 그를 짓누르던 공기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 주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군화 끈을 풀 생각도 못한 채 대충 발을 구겨 넣어 신을 벗었다. 비틀. 몸이 휘청이는 것을, 간신히 벽을 짚고 버텼다. 맞잡은 그녀의 손이 없었다면, 그는 분명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집 안은 어두웠다.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만이, 먼지가 내려앉은 실내 풍경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등을 돌리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낯설고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기억 속보다 훨씬 작고, 훨씬 더 외로워 보이는 등. 아버지였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1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무엇일까. 죄송합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수만 가지 단어들이 목구멍 안에서 뒤엉켜, 그 어떤 소리도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는 그저, 마른 침을 삼키며, 제 곁에 선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시간이 멈췄다. 아니, 바이브의 시간만 멈췄다. 거실 소파에 앉은 아버지의 등. 그 넓고 단단했던 등이, 기억 속보다 한 뼘은 족히 줄어들어 있었다. 세월이라는 무자비한 망치가 쉴 새 없이 내리쳐 닳아버린 것처럼, 등허리는 구부정했고 어깨는 왜소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왁자지껄한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가, 이질적인 배경음악처럼 고요한 집 안을 공허하게 채웠다. 아버지는 아직 그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어쩌면 아들의 귀환을 예감하면서도, 먼저 돌아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도 똑같이 무거운 벽이었다.

바이브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현관에 우뚝 선 채, 그는 그저 소파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맞잡은 브리즈의 손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녀의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손을 더 단단히 마주 잡아주었다. 그 온기가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증발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제 존재 자체가, 이 집에 새겨진 상처를 다시 벌어지게 하는 소금 같았다. 어머니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 아버지가 홀로 견뎌왔을 고독.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죄책감이, 검은 늪처럼 그의 발목을 휘감고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는 눈을 감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다시 10년 전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곁에는 브리즈가 있었다. 그녀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목구멍까지 차오른 뜨거운 것을 삼켰다. 울지 않겠다던 다짐이,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순간부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부지.’ 하고 불러야 했다. 하지만 성대가 굳어버린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는 낡은 기계처럼 몸을 돌렸다. 텔레비전 화면의 현란한 빛이, 아버지의 얼굴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얼굴. 주름이 깊게 파인 이마,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피로와 세월에 지쳐 푹 꺼진 눈. 그의 기억 속에 있던, 바다처럼 넓고 강인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늙고 지친 한 남자가, 무감정한 눈으로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허공을 잠시 헤매다, 마침내 바이브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그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브리즈에게로 옮겨갔다.

아버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바이브는 그 입모양을 똑똑히 읽었다. ‘…지원아.’ 10년 만에 듣는, 아버지가 부르는 제 이름이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을 옥죄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 돼. 여기서 울면 안 돼. 그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턱이 덜덜 떨리고, 주먹 쥔 손이 경련했다. 폭주 직전의 감각과는 다른, 순수한 슬픔과 회한의 격류가 그의 온몸을 휩쓸었다. 그의 위태로운 상태를 감지한 브리즈가, 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그녀의 고요한 파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그의 감정을 간신히 붙잡아주었다.

침묵을 깬 것은 브리즈였다. 그녀는 바이브의 팔을 잡은 채,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지희라고 합니다.

맑고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먼지 쌓인 집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갈랐다. 그 목소리에, 아버지는 잠시 멍하니 브리즈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아들에게로 돌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아들의 얼굴을, 10년 전보다 훌쩍 커버렸지만 여전히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낮고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왔나.

단 두 글자였다. 원망도, 반가움도, 그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무미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그 한마디에, 바이브는 지난 10년의 세월이 송두리째 담겨 있음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애써 외면했던 뜨거운 것이, 기어이 그의 뺨을 타고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버지에게, 그리고 제 옆에 있는 브리즈에게, 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쥐어짜듯 대답했다.

…어. 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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