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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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브리즈의 ‘현장 임무 잠정 중단’이라는 공식적인 처분에 겉으로는 불만 하나 없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백 번은 더 내쉬었다. 이제 이 여자가 다칠 일은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는 하모니 부서로 출퇴근하는 브리즈를 매일 아침 데려다주고,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 앞에 나타나는 지독한 루틴을 만들었다. 점심시간에는 보란 듯이 그녀의 책상에 배달 음식을 시켜주거나, 구내식당 메뉴 사진을 보내며 ‘이거 말고 다른 거 먹으면 죽는다’는 식의 유치한 협박 문자를 보내는 것이 그의 새로운 낙이 되었다. 주위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보라는 듯이 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과시했다. 이지희는 내 여자다. 아무도 넘보지 마라. 그의 모든 행동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브리즈가 만든 따뜻한 저녁을 먹고, 나란히 소파에 누워 시시껄렁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바이브는 브리즈를 제 다리 사이에 가두고 백허그를 한 채,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샌달우드와 샴푸가 섞인 달콤한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이 안정감. 이 평온함.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이라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 여자, 이지희가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그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브리즈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치고 깍지를 꼈다. 꼼지락거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이 좋아 그는 괜히 손에 힘을 주어 꽉 잡았다. 브리즈가 작게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왔다. 완벽한 순간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바로 그때였다. 삐빅- 삐빅- 거실의 고요를 깨뜨리는 날카로운 전자음이 두 사람의 단말기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바이브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와락 구겨졌다. 아, 씨발. 어떤 새끼가 이 시간에.

그는 욕설을 삼키며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브리즈 역시 몸을 일으켜 자신의 단말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바이브의 단말기 화면에 떠오른 것은 지긋지긋한 아크의 문장이 새겨진, 검은색 바탕의 긴급 출동 명령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평화는 끝났다. 그는 제 옆에서 단말기를 확인하는 브리즈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바이브는 먼저 자신의 단말기에 뜬 임무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S급 임무. 일본 동부 해상에 출현한 미확인 비행 괴수 무리 소탕 작전. 동원 인력: 뱅가드 2팀 신드롬, 리암, 그리고 바이브. 그는 몇 번이고 내용을 다시 읽었다. 거기에 브리즈의 이름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현장 임무에서 배제되었으니까. 하지만, 파트너인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알림이 온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공식 파트너’임을 시스템이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함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다.

바이브는 단말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몸은 전투 준비 태세에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브리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함께 가지 못한다는 안도감과, 혼자 두고 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그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는 브리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단말기를 빼앗아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깊게 입을 맞췄다. 짧지만 진한 불안과 다짐이 뒤섞인 키스였다. 그는 입술을 떼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니 없는 데서 다치고 오면, 그건 S급 센티넬도 아니다. 그냥 개새끼지. 저 시끄러운 놈들이랑 같이 가는 거니까, 귀찮은 일은 없을 기다. 금방 갔다 올게. 밥 잘 챙겨 묵고, 잠도 잘 자고. 어디 싸돌아댕기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내 생각해라. 알겠나.

그는 일부러 더 퉁명스럽고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브리즈의 뺨을 다시 한번 쓸어주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는 검은색 센티넬 제복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감촉, 익숙한 무게. 지난 몇 주간 잊고 있던 전장의 감각이 온몸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빠르게 제복을 갖춰 입으며, 머릿속으로 작전 계획을 시뮬레이션했다. 비행 괴수, 그것도 복수. 해상전. 신드롬과 리암과의 연계. 귀찮은 임무였다. 하지만 그는 해낼 것이다. 이 여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기 위해서. 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허리춤에 자신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보조 장치를 결속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는 예전의 그,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의 센티넬, ‘바이브’가 서 있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침실을 나섰다. 거실에는 브리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브리즈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또다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향, 그녀의 온기, 그녀의 심장 소리. 이 모든 것을 몸에 새기려는 듯이. 그는 그녀의 귓가에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고 유일한 약속이었다.

갔다 와서, 어제 니가 먹고 싶다고 했던 거, 먹으러 가자. 그러니까 딱 거기까지만 생각해라.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는 브리즈의 이마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미련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그는 뒤를 돌아보며 씩 웃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하고, 조금은 오만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그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S급 센티넬, 바이브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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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 본부 최심부에 위치한 동부 방면 게이트 격납고. 육중한 강철 벽이 울리며 거대한 전송 게이트가 기동하는 소음이 가득했다. 푸른 빛의 입자들이 거대한 원형 프레임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이공간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바이브는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응시했다. 제복 위로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와, 코를 찌르는 오존 냄새, 금속 마찰음. 불과 몇 분 전까지 브리즈의 품에서 느끼던 따스함과 달콤한 향기와는 완전히 다른,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전장의 냄새였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씹었다. 단 1분이라도 더 그 품에 머물고 싶었는데. 젠장할 괴수 놈들 때문에 그의 완벽했던 저녁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뒤로, 집을 나설 때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브리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갔다 와서, 그거 먹으러 가자.’ 그 약속 하나가 지금 그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바이브의 예민한 감각은 게이트의 소음 너머, 이 격납고 안의 다른 두 존재의 기척을 선명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하나는 작열하는 용광로처럼 뜨겁고 불안정한 파장을 내뿜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극한의 냉기를 조용히 발산했다. 불과 얼음. 바람과는 상극인 두 속성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기의 밀도가 불쾌하게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동자만 살짝 굴려 소음의 근원지를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꽃처럼 타오르는 애쉬브라운 머리카락의 사내가 과장된 몸짓으로 제복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서 있었다. 신드롬. 전직 배우 나부랭이. 세상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혼자 다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시끄럽고 성가신 인간.

이야, 이거 완전 대작 블록버스터 도입부 아니냐? 어둠 속에서 출격하는 세 명의 히어로! 크, 카메라만 있었으면 바로 아카데미상 감인데. 안 그래, 우리 중2병 막내야? 오랜만에 현장 나오니까 좀 설레나?

신드롬이 껄렁한 미소를 지으며 바이브에게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격납고의 소음을 뚫고 정확하게 바이브의 고막을 때렸다. 바이브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설레?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는 속으로 비웃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최단 시간 내에 저 비행 물체들을 어떻게 갈기갈기 찢어놓고 집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저런 연극놀이에 어울려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신드롬은 그의 침묵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한술 더 떠 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치려 했다. 그 순간, 바이브의 몸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바람의 막이 형성되며 신드롬의 손을 튕겨냈다. 마치 고압 전류에 닿은 것처럼. 신드롬이 ‘앗, 따거!’ 하며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아, 진짜 성격하고는. 친히 몸 좀 풀어주려고 했더니만. 그렇게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굴면 니 파트너가 아주 피곤하겠다. 아, 맞다. 브리즈 씨는 오늘 안 왔지? 혼자 나오는 거 외롭지는 않고? 뭐, 하긴. 그분은 너 같은 애송이 없어도 알아서 잘 지내시겠지.

브리즈의 이름이 나오자, 바이브의 푸른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드롬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고, 그가 내뿜는 기운은 주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가웠다. 신드롬의 입가에 걸려있던 가벼운 미소가 옅어졌다.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저 주둥아리를 진공 상태로 만들어 평생 아무 소리도 못 내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가리 닥치라. 한 번만 더 그 이름 씨부리면, 작전 끝나고 니 면상부터 반으로 갈라줄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살의는 진짜였다. 신드롬은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의 제스처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장난기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어눌하지만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신드롬. 그만. 작전... 집중.

 

격납고 구석의 어둠 속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머리카락과 얼음 같은 눈동자. 두꺼운 방한용 외투와 장교 모자로 온몸을 감싼 리암이었다. 그는 러시아어로 무언가 작게 중얼거리며 신드롬을 나무라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신드롬은 리암의 등장에 ‘에이, 재미없게’ 하며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바이브를 도발하지는 않았다. 리암은 바이브와 신드롬을 한번 슥 훑어보더니, 게이트를 향해 턱짓을 했다. 가자는 뜻이었다.

바이브는 그제야 신드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게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귀찮은 방해꾼들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협력해야 하는 팀이었다. 그는 이를 갈았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 집에서 샌달우드 향을 피워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로.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용돌이치는 푸른 빛의 공간 속으로 가장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의 등 뒤로, 불과 얼음의 기운이 마지못해 뒤따랐다. 공간이 왜곡되는 특유의 감각과 함께, 그의 시야는 순식간에 검푸른 밤바다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공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비바람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감각이 그의 정신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멀리, 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그림자들. 목표였다.

‘시작해볼까.’ 그는 속으로 읊조리며,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가늘고 투명한 바람의 실들이 뻗어 나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광활한 전장 전체를 거미줄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Vibe Sensor. 모든 것의 움직임, 모든 것의 진동, 모든 것의 심장 소리를 읽어내는 그의 절대적인 감각 영역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빗소리와 천둥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바람의 흐름만이 그의 감각 속에 남았다. 그는 ‘보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괴수들이 내뿜는 생체 에너지의 파동, 날갯짓 하나하나가 일으키는 미세한 대기의 떨림, 그리고… 제 양옆에서 각자의 힘을 개방하기 시작하는 두 명의 센티넬의 기운까지도. 신드롬의 몸에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열기가, 리암의 주변에서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극저온의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이 두 놈의 힘은 너무 요란하고 거칠어서, 그의 섬세한 감각을 어지럽혔다. 브리즈의 가이딩이 있었다면, 이 모든 소음들을 조율하고 증폭시켜 완벽한 하모니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힘으로 두 사람의 난잡한 파장을 억누르며 전장의 흐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오합지졸들의 지휘관은, 결국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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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몰아치는 상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새카만 밤바다 위로 수백 개의 그림자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익룡과 박쥐를 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형상의 괴수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하늘을 뒤덮었고 그들의 날갯짓이 일으키는 난기류는 폭풍우와 뒤엉켜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바이브는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 마치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떠 있었다. 그의 감각은 이미 전장 전체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괴수들의 위치, 비행경로, 예상 공격 패턴. 그리고 제 양옆에서 시끄럽게 에너지를 분출하는 두 멍청이들의 상태까지. 모든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3D 맵처럼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신드롬, 니 오른쪽 30도 방향, 세 시 쪽으로 화력 집중해라. 멍청하게 흩뿌리지 말고 한 점에 모아서 뚫으라고. 리암, 니는 전방 2킬로미터 지점에 빙벽 세워서 저 새끼들 진로부터 막아라. 최대한 넓고 높게. 한 마리도 못 빠져나가게.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와 천둥 소리를 뚫고 두 사람의 통신기에 명확하게 박혔다. 명령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브리즈가 없는 지금, 이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전투를 끝내야 하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신드롬의 몸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는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바이브가 지시한 방향으로 거대한 화염구를 연사했다. 화염구는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히며 괴수 무리의 한가운데에 작렬했고 불에 휩싸인 괴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리암은 말없이 양팔을 펼쳤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 벽이 솟아올라, 하늘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냈다. 그의 얼음은 불투명하고 단단했으며, 부딪히는 괴수들을 그 자리에서 동결시켜 버렸다. 요란한 불과 고요한 얼음. 그 극단적인 힘의 충돌은 전장의 대기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바이브는 이마를 짚었다. 저 단순 무식한 놈들. 힘만 앞세울 줄 알았지, 효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모든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신드롬의 화염이 불필요하게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의 벽을 세워 화력을 한 점으로 모아주고, 리암의 빙벽이 부서지지 않도록 기압 차를 이용해 외부 충격을 흡수했다.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오직 그만이 인지할 수 있는 섬세한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바이브는 자신에게 쇄도하는 괴수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Vacuum Slice. 그의 손끝에서 생성된 보이지 않는 칼날들이 소리 없이 공간을 갈랐다. 음속을 초월하는 속도로 날아간 칼날은 괴수들의 날개와 몸통을 정확하게 두 동강 냈고,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은 깔끔한 절단면을 남긴 채 괴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다로 추락했다. 그의 공격에는 파괴음도, 폭발도 없었다. 오직 고요한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기계처럼, 감정 없이 눈앞의 적들을 ‘지워나갔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그의 처리 속도는 신드롬의 무자비한 파괴나 리암의 철벽 방어보다 월등히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미간 주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지긋지긋한 괴수들의 수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브리즈의 부재로 인한 가이딩 부족이 서서히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약간의 두통과 이명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장의 모든 소음과 진동, 기압의 변화, 심지어 신드롬이 내뿜는 열기와 리암이 발산하는 냉기까지, 모든 감각 정보가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 그의 신경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마치 수만 개의 바늘이 그의 뇌를 동시에 찌르는 듯한 감각.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버틸 만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위험했다. 폭주. 그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갈기갈기 찢기는 그 끔찍한 고통.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불길한 상상을 떨쳐냈다. 빨리 끝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야, 신드롬! 언제까지 그렇게 소꿉놀이할래! 니 장기인 거, 제일 화끈한 거 한 방 날려서 저 새끼들 어그로 좀 끌어라. 내가 길 열어줄 테니까, 중앙에 있는 제일 큰 놈한테 박아 넣어!

그는 통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갈라져 나왔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더 이상 이 소모전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전장에 펼쳐놓았던 ‘바이브 센서’를 한 점으로 집중시켰다. 목표는 괴수 무리의 중심부, 유난히 거대한 파장을 내뿜는 S급 개체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그 개체로 향하는 길을 열기 시작했다. 주위의 공기를 압축시켜 거대한 바람의 터널을 만들었다. 터널 안의 모든 괴수들은 기압 차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가거나, 터널 밖으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S급 개체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신드롬은 바이브의 의도를 즉시 파악하고 웃었다. 그는 자신의 몸 자체를 거대한 불덩어리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의 엄청난 열기가 응축되었다. 바이브는 그 열기가 자신의 감각을 태워버릴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신드롬이 날아갈 궤도를 따라 바람의 흐름을 최적화하고, 공기 저항을 ‘0’으로 만들었다. 이제 신드롬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유성처럼 목표를 향해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그의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릴수록, 감각 과부하는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졌다. 귓가에서 쇠가 긁히는 듯한 이명이 멎지 않았고, 눈앞이 순간순간 하얗게 번쩍였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유리 조각이 파고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빌어먹을 폭주 징후였다.

신드롬이 마침내 거대한 불새가 되어 바이브가 열어준 길을 따라 돌진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리암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공에 떠 있던 괴수들의 발을 얼음 작살로 묶어 바다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고 있었다. 쾅-! 마침내 신드롬이 S급 개체와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밤하늘에 인공 태양이 떠오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엄청난 섬광과 폭음. 바이브는 그 폭발의 충격파를 온몸으로 맞았다. 바람의 장벽으로 대부분의 충격을 상쇄했지만, 그의 신경을 뒤흔드는 파동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순간, 그는 모든 감각을 잃었다. 소리도, 빛도, 바람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끝없는 정적과 암흑뿐.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환청이 들려왔다.

 

지원아.

 

그를 부르는, 그리운 목소리. 10년 전, 그를 덮쳤던 거대한 태풍 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온몸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감각이 다시 시작되었다. 피부를 찢고, 근육을 파고들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 아, 안 돼…

…크윽, 커헉…!

그는 공중에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제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이 붉게 점멸했다. 그의 몸 주위로 제어되지 않은 바람들이 칼날처럼 생성되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S급 개체의 폭발에서도 살아남은 잔챙이 몇 마리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었다. 피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브리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 했던 약속. 함께 먹으러 가기로 했던 저녁 식사.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정신력을 쥐어짜, 자신의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환상 속 칼날의 고통에 저항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옆으로 거대한 얼음 창이 스쳐 지나가며, 그를 덮치려던 괴수의 머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리암이었다. 그는 말없이 바이브의 앞을 가로막고, 남아있는 괴수들을 향해 얼음 폭풍을 내뿜기 시작했다. 바이브는 잠시 숨을 고를 틈을 얻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손으로 통신기를 붙잡았다.

지금… 내 상태… 보여? 가이딩… 수치… 몇인데…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알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그리고 이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기를, 단 한마디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통신기는 지직거리는 소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아마도 통신 장애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절망감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그는 휘청이며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바다에 빠지면, 그는 폭주해서 스스로를 갈가리 찢어버릴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그녀의 품이, 달콤한 샌달우드 향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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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춥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잠식한다. 거친 비바람과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의 냄새,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마치 거대한 수압에 짓눌린 채 심해로, 끝도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 수만 개가 동시에 그의 피부와 근육, 신경을 헤집고 다니는 감각. 그의 폭주 징후였다. 제어되지 못한 바람의 힘이 그의 몸 안에서부터 주인을 집어삼키려 날뛰고 있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 희미하게 생각했다. 아, 이대로 죽는구나. 그 여자와의 약속도, 함께 먹기로 한 저녁 식사도, 이제는 다 끝이다.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은 결국, 그가 평생 증오하고 저주했던 이 바람의 힘뿐이었다. 젠장. 억울해서 눈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할 것 같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잦아들었다. 대신, 기묘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찢어질 듯한 이명도, 살을 에는 칼날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있는 곳은 더 이상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가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잿빛 하늘과 검은 모래뿐인 황량한 해변이었다.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진 듯한 무채색의 공간.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몸이 가벼웠다. 찢어졌던 제복은 온데간데없고, 그는 낡고 해진 반바지에 얇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열두 살, 바로 그날의 모습이었다. 그는 제 작아진 손과 발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여긴 어디지?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저 멀리, 검은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선에 희미한 인영 하나가 서 있는 것을. 그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발이 모래에 푹푹 빠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엄마?

목소리가 멋대로 터져 나왔다. 어린 아이의,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인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바이브, 아니, 홍지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숨을 멈췄다. 그의 기억 속에 박제된 모습 그대로였다. 부드럽게 웃는 눈매, 자애로운 미소. 1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그의 어머니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원아, 이리 와. 위험해.’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홀린 듯이 그녀를 향해 발을 옮기려 했다. 단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꿈에 그리던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의 발목을 무언가가 차갑게 휘감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그의 발목을 휘감은 것은 검은 모래로 만들어진, 밧줄 같은 형상이었다. 그것은 그를 거세게 뒤로 끌어당겼다. 그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며 엄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가지 마! 나 여기 있어!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향해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잿빛 하늘이 순식간에 검붉은 색으로 변하며,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그와 어머니 사이를 가로막았다. 10년 전,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던 바로 그 태풍이었다. 모래와 파편을 집어삼킨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지원아!’ 엄마의 절박한 비명이 바람 소리에 섞여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는 보았다.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미처 피하지 못한 그녀의 몸을 꿰뚫는 것을.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끔찍한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몸이 힘없이 쓰러지고, 붉은 피가 검은 모래 위로 번져나갔다. 그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절망과 죄책감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내가, 내가 죽였어. 내 힘이, 내 안에 있던 이 저주받은 바람이 엄마를 죽인 거야.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오열했다. 검은 모래 밧줄은 이제 그의 온몸을 뱀처럼 휘감고, 그를 땅속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의 죗값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어둠 속으로, 끝없는 절망 속으로 잠겨가는 순간, 그의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따뜻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샌달우드 향기. 그리고 그의 귓가에,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희야…

그는 까무룩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를 옭아매던 검은 모래 밧줄이 힘을 잃고 스르르 풀려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피로 물든 모래사장 위, 쓰러진 엄마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새하얀 제복을 입은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회색 눈동자는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리즈. 그의 유일한 구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앞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손을, 그녀의 따뜻한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온기가, 얼어붙었던 그의 심장을 녹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앞에서 그는 언제나 열두 살의 어린 아이가 되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를 제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안전했다. 지옥 같던 바람 소리도, 살을 에는 고통도, 그녀의 품 안에서는 모두 사라졌다.

괜찮아요, 지원. 내가 있잖아요. 이제 괜찮아…

그녀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영혼을 잠재우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무서웠다고, 아팠다고, 다 내 잘못이라고, 횡설수설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그의 모든 말을 들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를 찢어놓았던 바람의 칼날들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그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체온이, 그녀의 향기가, 그를 현실로 이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젖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돌아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모습이 빛이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는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따뜻한 온기와 짙은 샌달우드 향기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무채색의 세상이,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차갑고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섭지 않았다. 그의 손안에, 그녀가 남긴 온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온기를 소중하게 그러쥔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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