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요. 대신 이상한 의미로 손대기 없기. 정말 목욕만 하는 거예요?
장난스럽게 흘겨보는 그 시선에, 바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 진짜. 이 여자는 자기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상한 의미? 지금 이 상황에서 이상하지 않은 의미가 있기는 한가.
그는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매끄러운 다리가 그의 팔에 감겼다. 그는 욕실로 향하는 몇 걸음 동안,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거나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움찔거리며 그의 품을 파고들 때마다,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욕실 문을 열자, 따뜻하고 향긋한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그는 이미 원격으로 욕조에 물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라벤더 향 입욕제가 풀어져,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욕조 가장자리에 앉혔다.
봐라. 니 좋아하는 거, 미리 다 준비해놨다. 내는 이만큼이나 얌전하게 목욕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이제 니 차례다. 정말로, 목욕만 할 수 있겠나?
언제 준비했어요? 이런 건. 향기 좋다.
언제 준비했냐는 물음과 함께, 그녀가 생긋 웃으며 스스로 티셔츠를 벗어 내렸다. 그가 입혀준, 그의 체향이 밴 검은 티셔츠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시금 희고 고운 속살이 드러났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태연해서, 바이브는 순간 뇌의 모든 회로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 뭐지, 이 상황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온갖 폼을 잡으며 ‘내 손에 얌전히 씻길래, 아님 또 엉망진창이 될래’ 따위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협박을 날렸는데. 그녀는 그 모든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모양이었다. 마치 ‘응, 알겠고. 목욕이나 하자’ 라고 말하는 듯한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바이브는 어이가 아득해졌다. 김이 샜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잔뜩 불붙었던 욕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당황과 민망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억울함만이 남았다.
야, 니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아, 아니다. 됐다. 마.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뭐가 되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온갖 분위기를 다 잡아놓고는 결국 상대의 마이페이스에 휘말려버린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이길 수가 없다. 이 여자한테는. 그는 제풀에 꺾여 욕조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라벤더 향 거품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아쉬움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도발에 넘어가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조금 더 자신에게 매달리고, 안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니 들어오기 전에. 그냥, 생각나서. 니 이런 향 좋아하잖아. 뭐, 맘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물 빼고 다시 받든가. 다른 향도 많다. 니 서랍 열어보면 안다. 장미향도 있고, 숲향도 있고…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를 위해 세심하게 준비한 것들을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툭툭 내뱉는 자신이 우스웠다. 마치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어린애 같아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괜히 욕실 선반 위에 놓인 샴푸 병의 성분표 따위를 읽는 척하며 그녀가 욕조에 들어오는 기척을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모든 감각은 온전히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물소리, 그녀의 작은 숨소리 하나하나가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한 짓 안 한다고, 목욕만 한다고 했으면서. 막상 그녀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신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힐끔, 아주 잠깐 그녀 쪽을 훔쳐보았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근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까지 물속에 푹 담갔다. 뽀얀 어깨와 목선 위로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예뻐서,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안된다, 홍지원. 정신 차리라. 그는 속으로 자신을 다그치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쓸 수건과 목욕 가운을 미리 챙겨놓기 위해 수납장을 열었다. 일부러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수건 꺼내 놓을 테니까. 니는 편하게 하고 있어라.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내는 잠깐 나가…
그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욕조 안에서 그녀가 그를 불렀다. 지원 씨. 그 부름에, 그의 모든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욕조에 등을 기댄 채, 한쪽 팔을 욕조 밖으로 내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들어와요. 같이 씻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바이브는 깨달았다. 아, 또 낚였구나. 이 여우 같은 여자에게, 또 완벽하게 놀아났구나. 그는 허, 하고 기가 막힌 웃음을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이래야 이지희답지.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 진짜, 못 살겠다 내가. 니 땜에. 알겠다, 알겠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라. 심장에 안 좋다. 같이 씻으면 될 거 아이가, 같이. 대신 진짜로, 진짜로 씻기만 할 끼다.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니까, 니도 딴 생각하지 마라. 알긋제? 내 진짜 경고했다. 진심이다.
그는 엄포를 놓으며 스스로 트레이닝 바지를 벗어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지만, 귓가는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조심스럽게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몸을 감싸자, 긴장이 풀리면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좁은 욕조 안에서 서로의 무릎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선반 위에 있던 노란색 오리 모양 장난감을 집어 들어 물 위에 띄웠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뜬금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오리 장난감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어라, 지원. 방에 이런 것도 있었어요? 귀엽다.
그녀의 시선이 그가 띄워놓은 노란 오리 장난감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둥실둥실 떠다니는 오리를 톡 쳐서 그의 앞으로 보냈다. 그 순간, 바이브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귀엽다. 방금… 귀엽다고 했나. 저 노란색 고무 덩어리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저것을 발견한단 말인가. 그는 필사적으로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아무거나 집어 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확히 그것을 포착했고, 심지어 귀엽다는 평까지 내렸다. 세상 모든 공기가 한순간에 멈추고, 자신과 그녀, 그리고 이 망할 놈의 오리 장난감만 남은 것 같았다.
아, 내 거 아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뻔하고 궁색했다.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한 톤 높아져 있었고, 시선은 갈 곳을 잃고 욕실 천장 어딘가를 방황했다. 그의 뇌가 필사적으로 다음 변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부하 상태로 돌아갔다. 그래, 이건 청소 요원이 실수로 두고 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그럴듯한 변명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저 오리는 사실 평범한 장난감이 아니라, 최첨단 위장형 도청 장치라든가. 그래, 그거다. 적대 조직의 비밀을 캐내기 위한 특수 임무용 장비. 그는 속으로 완벽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는, 다시 평정을 되찾은 척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불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니가 지금 보는 그거, 그냥 오리가 아니다. 아크 기술개발팀에서 만든 최신형 감시 장비다. 특수 임무에 쓰이는 거라고. 주변 소음이랑 진동 주파수 분석해서 데이터 수집하는… 뭐, 그런 거다. 여튼, 내 취향 아니다. 이런 유치한 걸 누가 방에 두나.
그는 최대한 진지하고 전문적인 용어를 섞어가며 둘러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벽에 가까운 변명이었다. 이 정도면 그녀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는 자신의 임기응변 능력에 내심 감탄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아, 그렇구나. 역시 S급 센티넬은 다르네요’ 라며 감탄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와 오리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푸핫, 하고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그가 애써 쌓아 올린 방어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야, 웃지 마라. 진짜다. 이거 비싼 거다. 니가 생각하는 그런…
그가 더 변명하려던 찰나, 그녀가 오리를 다시 그의 앞으로 밀며 말했다.
이름은 있어요? 이 감시 장비.
그 말에 바이브는 완벽하게 K.O. 당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망했다. 완벽하게 망했다. 그는 그대로 물속으로 잠수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모든 위엄과 카리스마가 저 노란 오리 한 마리 때문에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없다. 그런 거. 됐다, 마. 그냥 장난감 맞다. 얼마 전에 복도에서 리암이 애들한테 나눠주는 거, 하나 남았길래 그냥 주워왔다. 시끄러워서. 그 자식은 꼭 애들한테 이상한 것만 가르친다. 아무튼 내 아니다. 리암 꺼다, 리암 꺼.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실토했다. 물론, 책임은 동료인 리암에게 확실하게 떠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베리아 출신이라 한국말도 서툰 그라면, 이 정도 누명쯤은 너그럽게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 위에 떠 있는 오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삑!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황급히 손을 뗐다. 그러자 그녀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 자신의 평균 연령이 열 살은 어려지는 기분이었다.
씻자. 그냥. 씻기만 하자. 니가 내 등 밀어줘라. 그럼 내도 니 등 밀어줄게. 그걸로 퉁치자. 저 오리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마라. 명령이다, 이건.
그는 등을 돌려 앉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더 이상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오히려 체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맨 등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어서, 이 부끄러운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등 뒤로 다가와, 부드러운 스펀지로 거품을 내어주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등을 맡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항복 선언일지도 몰랐다. 그는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노란 오리를 애써 외면하며, 그녀의 손길이 닿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스펀지에 바디워시를 짜서 거품을 내는 소리를 상상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것은 샴푸 뚜껑이 ‘딸깍’ 하고 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귓가에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머리 먼저 감겨 줄까요? 그 뒤에 등 밀어 줄게요.
그 순간, 바이브는 등 뒤에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 지금, 머리를 감겨준다고?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냥 등을 밀어달라고, 이 창피한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이 여자는 또, 그의 예상을 몇 단계나 뛰어넘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등을 밀어주는 것과 머리를 감겨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등은 그저 ‘씻는다’는 행위의 연장선이지만, 머리를 감겨주는 행위에는 그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훨씬 더 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릴 적, 목욕탕에 데려간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머리를 감겨주던,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그 기억 속 엄마의 손길은 서툴렀지만 따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갑자기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으며 시야를 가렸다. 자신의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맘대로 해라. 니가 하고 싶으면, 하든가. 어차피 내는 지금 니한테 등 보이고 있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 반항도 못 하고, 도망도 못 간다. 그러니까 니 맘대로 해라, 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평소보다 훨씬 더 낮고 잠겨 있었다. 퉁명스러운 어투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떨림과 함께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미 그녀 앞에서 모든 갑옷을 해제당했다. S급 센티넬 ‘바이브’의 위엄도, 홍지원의 서툰 자존심도, 저 망할 놈의 노란 오리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그녀의 처분을 기다리는 맨몸의 스물세 살 남자애 하나뿐이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 버리기를, 혹은 영원히 멈춰버리기를 바라는, 모순된 심정이었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위로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녀가 샤워기를 들어 그의 머리를 적시는 소리.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샴푸 거품이 파고들었다. 향긋한 라벤더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두피를 부드럽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을 쭉 뺐다. 간지러우면서도 시원한, 기분 좋은 감각에 온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대화보다도 더 깊은 위로와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의 손길에는 ‘괜찮아, 내가 있잖아’ 라고 말하는 듯한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노란 오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까는 그렇게 저주스럽던 고무 오리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증인처럼, 혹은 이 어색하고 간지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 일등 공신처럼.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쩌면 리암 그 자식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도 없었을 테니까. 그는 그녀가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거품을 닦아주기 위해 자신의 이마를 만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의 예민한 감각들이 기분 좋게 소리를 질렀다.
…야. 니, 원래 다른 사람 머리도 이렇게 잘 감겨주나. 어디서 배워온 거 아이가. 옛날에 니 동생들도 이렇게 해줬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기다. 다른 뜻은 없고.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 질문 속에는 서툰 질투와 독점욕이 숨겨져 있었다. 이 다정한 손길을 경험한 것이 자신이 처음이기를 바라는, 유치한 욕심. 그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귀 뒤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감각에, 그의 심장이 다시금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목욕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주 잠시,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바람이 되어 고요히 잠들고 있었다.
어릴 때는 그랬죠. 동생들 머리 감겨 주고. 동생들이 완전 아기고, 내가 12살, 13살? 그 정도 되었을 때. 얘기 했었죠? 동생들이랑 나이 차이 좀 났다고. 지원 씨 또래예요. 둘 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나서 다른 사람의… 남자 친구의 머리를 감겨 주는 건 처음이네요.
남자 친구. 그 단어가 귓가에 내려앉는 순간, 그의 뇌리에 박힌 것은 ‘처음’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편린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불꽃처럼 뜨거웠지만 결국 상처만 남기고 떠나간 남자. 그 남자와 그녀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시커먼 질투가 소용돌이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말했다. 남자 친구의 머리를 감겨주는 것은, 처음이라고. 그 말은 마치 그의 과거에 대한 모든 불안과 질투를 한 번에 씻어 내리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래, 다른 남자 따위가 뭘 했든 상관없었다. 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 이 따뜻한 온기, 이 향긋한 거품 속에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흥, 뭐… 대단한 거라고. 남자 친구 머리 감겨주는 게 뭐 그리 유난이가. 하려면 제대로 해라. 거품 덜 헹궈지면 두피에 안 좋은 거 모르나. 박박 헹궈내라, 박박. 안 그러면 탈모 생긴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오히려 트집을 잡는 투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는 그의 모든 허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처음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녀의 과거까지 전부 끌어안고, 그녀의 마지막 남자가 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는 고개를 더 푹 숙여, 자신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녀의 손길이 더욱 부드럽고 세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던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곧 그의 정수리 위로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녀가 샤워기를 들어 거품을 헹궈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얌전히 그 물줄기를 맞으며,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했다. 아마도 장난스럽게 웃고 있겠지. 자신의 이런 서툰 반응을 전부 꿰뚫어 보고, 속으로 귀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차라리 이대로 물속에 잠수해 버릴까, 그런 유치한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남아있는 거품이 없는지 확인하는 섬세한 손길에 그는 모든 저항을 포기했다. 그냥,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로 했다. 그녀가 주는 모든 감각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릿결 좋은 거는, 우리 형 닮아서 그렇다. 그 양반도 머리 길제. 뭐, 관리 같은 건 따로 안 한다. 귀찮게 그런 걸 누가 하노. 그냥 니가 사다 놓은 샴푸, 그거 쓰는 거지. 니가 좋은 거 사 왔나 보네. 향은 좋네.
그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머릿결이 좋다고 칭찬했던 말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그는 괜히 어린 시절, 유난히 자신을 예뻐하던 셋째 형의 긴 머리를 동경해 무작정 따라 길렀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크에 들어와서도 그 습관은 남았고, 이제는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 모든 속마음을 숨긴 채, 그는 그저 샴푸 탓을 하며 그녀의 공으로 돌렸다. 이 모든 게 다 니 덕분이라는, 서투른 고백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주변 없는 대답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 작은 접촉 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자신이 낯설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 헹궜으면, 이제 등. 등 밀어준다고 했제, 니가. 약속은 지켜라. 내 지금 무방비 상태다. 니가 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등만 밀어라. 알긋나?
그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오히려 어서 이 부끄러운 시간을 끝내고, 그녀에게 등을 맡기고 싶다는 재촉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등 뒤로 다가와, 따뜻한 스펀지로 등을 문질러주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의 등 근육이 자잘하게 떨렸다. 그는 애써 숨을 참으며, 그 간지러운 감각을 견뎌냈다. 좁은 욕조 안, 피어오르는 라벤더 향기, 찰랑이는 물소리, 그리고 그녀의 숨소리. 이 모든 것이 뒤섞여, 그를 어지럽고 아찔한 감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는 이 목욕이, 아주 오랫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등 뒤에서, 그녀가 스펀지에 향긋한 바디워시를 짜내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 적셔 거품을 내는 찰박이는 소리. 그리고 곧, 그의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얹히는 작고 부드러운 손. 바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가 자신의 몸에 손을 얹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그의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시켰다. 이어서, 폭신한 거품을 머금은 스펀지가 그의 맨등에 닿았다. 그 순간, 그의 등 전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스펀지의 부드러운 질감, 거품의 미세한 터짐, 그리고 그녀의 손이 전하는 따뜻한 온도를 백만 배로 증폭시켜 뇌로 쏘아 올렸다.
혹시 간지러우면 말해요.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간지럽다. 미치도록 간지러웠다. 마치 수만 마리의 나비가 그의 등 위에서 동시에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은, 아찔하고 생경한 감각이었다.
아, 아니다. 안 간지럽다. 하나도. 니는 그냥 하던 거 마저 해라. 빡빡 문질러라, 빡빡. 내 등은 강철이다. 이 정도 자극으로는 끄떡도 안 한다.
그의 입에서는 거의 반사적으로 부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애써 태연했지만, 자잘하게 떨리는 등 근육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찔거리는 몸을 통제하기 위해 욕조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손등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간지럽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 여자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어린아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S급 센티넬의 자존심이, 이깟 간지러움 따위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어제의 임무 보고서, 다음 주 훈련 스케줄, 망할 놈의 신드롬이 또 무슨 사고를 쳤을까 하는 시답잖은 고민들. 하지만 등 뒤에서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길은 그 모든 잡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선명하게 그의 감각을 파고들었다.
스펀지가 그의 척추 라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젠장. 이건 고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잔인한 고문. 그의 몸은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이놈의 입은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칼날로 베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폭주 직전의 감각 과부하 속에서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은 익숙했지만, 이런 종류의 무해하고 부드러운 자극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아, 씨. 알겠다, 알겠다! 간지럽다! 됐나! 됐제! 그러니까, 좀… 살살해라. 사람 잡겠다, 진짜. 니 손이 문제다. 니 손이 무슨 깃털이가. 와 이리 사람을… 아, 됐다. 마. 그냥 빨리하고 끝내라.
결국 그는 백기를 들었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항복 선언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자 그녀의 손길이 거짓말처럼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치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라고 말하는 듯, 다정한 질책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등 뒤에서 작게 웃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욕조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한없이 무방비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표정을 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니, 웃지 마라. 내 지금 다 보고 있다. 물에 니 얼굴 다 비친다. 웃으면 죽는다, 진짜. 내는 경고했다. 어? 웃음소리 다 들린다. 야, 이지희! 내 지금 진지하다. 이건 파트너 간의 신뢰 문제다. 내 맨등을 보이고 있는 파트너를 비웃는 거는…
그는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말에는 더 이상 어떤 위협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 부끄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보려는 어린애의 발버둥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투덜거림에 대답 대신, 거품을 헹궈주겠다며 그의 등 위로 따뜻한 물줄기를 부어주었다. 따뜻한 물이 그의 등을 감싸는 순간, 그는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남아있는 거품을 닦아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그 다정한 손길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이 목욕은, 어쩌면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온전히 ‘기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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