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A A

 

다음 날 아침, 동인천역. 열차의 문이 열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부산의 바다가 품은 비릿하고 강렬한 소금기와는 결이 다른 냄새였다. 갯벌의 짭조름한 내음과 도시의 희미한 매연, 그리고 어디선가 실려 오는 생선 굽는 냄새가 뒤섞인, 보다 생활감 넘치는 공기.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새로운 감각 정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이 도시가 품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과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읽어내고 있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진동.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가장 먼저 앞서 플랫폼에 발을 내디딘 브리즈에게로 향했다. 긴 원피스 위에 짧은 패딩을 걸친 그녀는,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기분 좋은 바닷바람에 흩날렸고,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녀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아크 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든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버린 무방비하고 순수한 미소였다. 바이브는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제 주방에서 그에게 고향에 가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던 모습과는 또 다른, 완전한 해방감에 젖은 얼굴. 저것이 이지희의 진짜 세상이구나. 그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가 봐온 그녀는, 언제나 ‘가이드 브리즈’였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긴장해 있고, 타인을 배려하지만 자신의 상처는 애써 감추는, 프로페셔널한 아크의 요원.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그저 ‘이지희’였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한 사람.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가 부산에서 보여주었던 자신을 향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자신만의 ‘부산’을 이 도시에 두고 온 것이다.

바이브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평소처럼 검은색 후드티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지극히 편안한 차림이었다. 어젯밤, 그녀가 ‘관광객처럼 보이면 안 된다’며 골라준 옷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자꾸만 실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응시했다. 낡은 역사의 지붕 너머로 보이는 회색빛 하늘과, 오래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었지만, 동시에 흥미로웠다. 이 풍경의 어디쯤에 그녀의 어린 시절이 숨어 있을까. 그녀가 다녔던 학교,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골목, 첫사랑의 기억이 담긴 장소. 그는 그 모든 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브리즈가 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대신 그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미세하게 섞여 있었다.

…뭐. 똑같은 바다 냄새구만.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제 쪽으로 슬쩍 끌어당겼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하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그의 팔에 몸을 기댔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익숙한 샌달우드 향이 낯선 도시의 공기 속에서 유일한 등대처럼, 그의 감각을 안정시켰다.

그래서 어디부터 갈 건데. 니가 다 보여준다고 했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는 기억력 좋은 거 알지. 하나라도 빼먹으면 하루 종일 쫓아다니면서 물어볼 기다.

그 말은 협박처럼 들렸지만, 그 눈빛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그는 지금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의 세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세상 속으로. 그는 이 하루가 분명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날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망설임 없이 꽉 잡았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그녀의 손은 유난히 따뜻했다.

 


어릴 때는 여기 오르내리는 거 힘들어했거든요. 초등학생 때는 힘이 넘치니까 괜찮았는데. 중고등학생 때는… 학교도 저 위에 몰려 있어서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이브의 머릿속에 하나의 선명한 장면을 그려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리고 앳된 얼굴의 소녀. 교복 치마를 입고 무거운 책가방을 멘 채 낑낑거리며 이 비탈길을 오르는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이지희의 모습.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에 붙인 채 ‘아 힘들어.’ 하고 투덜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 그 상상만으로 그의 심장이 간질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고 싶다. 그 모습을. 이 길을 힘겹게 오르던 어린 니 모습을. 니 친구들과 뭐라고 떠들면서 이 길을 걸었을지. 전부 다 보고 싶다.

그는 그녀의 걸음에 맞춰 묵묵히 길을 올랐다. 그의 손을 잡아끄는 그녀의 힘은 아주 미약했지만, 그는 마치 거대한 밧줄에 묶인 것처럼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그녀는 지금 그를 자신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아크에서 보낸 지난 10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언제나 혼자였다. 제 감각의 폭풍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타인과 벽을 쌓고 홀로 하늘을 떠돌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의 인력에 기꺼이 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락한 추락인가.

오르막길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의 존재로 인해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그녀의 목소리. 그것들이 그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불필요한 자극들을 완벽하게 차단해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이끄는 그녀의 등 뒤에서 아주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니가 다니던 학교. 거기 가는 거 맞나, 지금.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섞여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이 길이 그녀의 가장 빛나는 시절로 향하는 길이 맞는지. 그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마주 잡았다. 마치 이 길의 끝에서 그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이지희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예감에 휩싸였다.

…힘들면 말해라. 업고라도 갈 테니까.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한 깊은 다정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모든 계단과 모든 비탈길을 기꺼이 대신 걸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이처럼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초등학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이브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학교 안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휴일이라 텅 비어 있어야 할 운동장에는 몇몇 아이들이 제멋대로 공을 차거나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 그가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떡꼬치와 그 풍경을, 그리고 그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완벽한 그림처럼 느껴졌다. 이지희라는 그림.

나 땡땡이 같은 거 안 쳤어요. 정확히 말하면 못 친 거에 가까울까…

그의 짓궂은 농담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겁이 많아서, 부모님께 혼날까 무서워서 못 했다는 변명. 바이브는 그 말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 생긴 것부터가 모범생 아니면 반장 스타일이지 않은가. 그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 없는 어린 이지희가, 친구들의 유혹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끝까지 교실을 지키는 모습을. 그는 그 상상이 지독하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떡을 입안에 털어 넣고 나무 꼬치를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 색이 바랜 미끄럼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네, 그리고 그녀가 향하고 있는 철봉. 그는 그 모든 사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저 철봉에 매달려 다리를 버둥거렸을까. 저 그네를 타며 하늘 높이 발을 뻗었을까. 저 미끄럼틀을 내려오며 까르르 웃었을까. 그의 감각이 바람의 흐름을 타고 운동장 곳곳에 흩뿌려진 그녀의 아주 오래된 흔적들을 더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철봉 옆 벤치에 앉았다. 바이브는 그녀의 옆에 말없이 따라 앉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의 귓가에 닿았다. 부산에 있던 그의 모교도 이렇게 생겼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은,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던 그날을 기점으로, 모든 색이 바래고 모든 소리가 뭉개져 버렸다. 그에게 ‘초등학생 시절’이란, 그리움이나 아련함 같은 단어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그저 끔찍한 단절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문득 서늘해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그 감정을 떨쳐내려는 듯, 옆에 앉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 특유의 부드러움과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 안에서 멋대로 피어오르던 어두운 감정들이 스르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지금은, 내 과거가 아니라, 이 여자의 과거를 보러 온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뭐야. 안 궁금한 척 하더니. 궁금해요? 첫사랑 얘기.


바이브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언덕길 초입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그의 등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굳어버렸다.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명랑했다. 젠장, 걸렸다. 바이브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시시껄렁한 과거 이야기에 김이 빠져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역으로 그녀에게 완벽하게 덫을 내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래, 궁금하다’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 하나도 안 궁금하다’라고 잡아떼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궁금하다 안 하다, 그런 유치한 문제가 아이다, 이건.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미세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는 다시 한 걸음,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남지 않았다.

니 과거에 어떤 새끼가 있었는지, 어떤 놈이 니한테 찝적거렸는지, 전부 파악해두는 건, 니 파트너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의무 같은 기다. 일종의 리스크 관리랄까. 그래야 또 어떤 병신 같은 놈이 니 앞에 나타났을 때, 내가 미리 알고 대처를 하지 않겠나. 니는 생긴 게 딱, 그런 놈들 잘 꼬이게 생겼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궁금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거지. 알겠나.

 

---

바이브는 벤치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묵묵히 브리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은 정면의 탁 트인 바다와 항구를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옆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 그녀가 엮어내는 과거의 파편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 살 많은 선배, 신문부, 뺀질거리는 성격, 체육관 구석에서의 배드민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는 제멋대로 그 ‘선배’라는 놈의 얼굴을 상상했다. 능글맞게 웃으며, 어수룩한 중학생 이지희를 꼬드겨 제 할 일을 떠넘기는 비겁하고 얍삽한 얼굴.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단순히 질투라고 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지저분한 감정이었다. 고작 그런 시시껄렁한 놈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어이없음, 그놈과 단둘이 체육관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기억 속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이 주는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그는 이 여자의 과거를 전부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처음’을 자신의 것으로 덮어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이렇게,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졸업식 날,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서야만 했던 어린 이지희. 바이브는 그 장면을 상상하자, 들끓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차갑게 식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서글픔과 안도감이 뒤섞여 차올랐다. 그는 연락처가 있었지만 끝내 연락하지 못했다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서, 어설프고 서툴렀던 첫사랑의 끝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그는 지독하게 안도했다. 결국 그 ‘선배’라는 놈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과거의 한 페이지일 뿐이었다. 현재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어때요, 듣고 나니까?

 

그녀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는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내보인 후의 담담함과,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약간의 긴장이 어려 있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솔직하게 ‘기분 더럽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쿨한 척 ‘별거 아니네’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대답하기로 했다.

그는 벤치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풀고, 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그녀의 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깊고 푸른 눈으로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방금 전까지 그를 휘저었던 모든 감정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분노, 질투, 안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깊은 애정까지도.

별로.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지독하게 낮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별로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포장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느낀 모든 것을, 그녀가 온전히 알기를 바랐다.

고작 그런 얼간이 같은 놈한테 마음 줬다는 것도 같잖고, 니 혼자 속 끓다가 끝냈다는 것도 짜증 난다.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서 대차게 차여버렸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긴데. 뒤에서 구질구질하게, 그게 뭐꼬. 그래서 결론은, 아주 기분 나쁘다. 니 입에서 다른 새끼 이름 나오는 것도 싫고, 니가 그놈 때문에 설렜던 기억이 있다는 것도 싫다. 앞으로 내 앞에서 그 선배인지 나발인지, 이름 꺼낼 생각 마라. 알겠나. 이건 경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뜨려 놓았다.

 

---

 

나 처음 만났을 때… 별로였죠. 뭐든 통제하려고 들고. 당신이 뭔가 하려고 하면 막아서고.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우기고.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별로라니. 그는 그녀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붉어진 눈시울과 코끝. 그런데도 그의 눈에는, 그 모습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훔쳐냈다. 그는 그날을 기억했다. 부산의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차단한 채 혼자만의 세상에 잠겨 있던 자신에게 다가오던 여자. 귀찮고, 성가시고,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크가 억지로 떠맡긴 족쇄라고 여겼다.

그녀는 자신을 통제하려 했고,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다. 가이딩 수치가 위험하다며, 어떻게든 접촉을 시도하려 애썼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옭아매려는 시도라고 생각해, 날을 세우고 그녀를 밀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의 그 모든 행동들은, 통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또 다른 센티넬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통제하려던 게 아니라,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던가.

…별로긴. 그때 니, 존나 무서웠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을 보니, 또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그녀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디서 저런 독한 가이드가 굴러 들어왔나 싶었다. 말 한마디를 안 져요. 사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데. 솔직히 쫄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온전히 담기는 것을 보며, 그는 더없이 큰 안정감을 느꼈다. 그는 이제 알았다. 그녀가 그토록 필사적이었던 이유를.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그녀에게 끌렸던 이유도.

근데… 이제 보니 알겠다. 니가 왜 그랬는지. 니 눈에 내가 꼭 그때 그 새끼처럼 보였겠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시한폭탄.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아 세운 거 아니가. 다시는 니 손으로 똑같은 실수, 안 할라고.

 


바이브는 브리즈의 뒤를 따라 닭강정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훅 끼쳐오는 달콤하고 매캐한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 가게 안을 가득 채운 후끈한 열기가 한꺼번에 그의 감각을 찔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혼잡하고 소란스러운 곳은, 그가 평소에 가장 기피하는 장소였다. 공기의 흐름은 무질서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파장이 뒤섞여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는 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고 익숙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브리즈를 보며, 솟아오르려던 짜증을 억지로 눌러 담았다. 여긴 이지희의 세계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 세계에 초대받은 유일한 손님이었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빼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후드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깍지를 꼈다. 그녀는 마치 제 집 안방에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막힘없이 주문을 외쳤다. 그 모습이 바이브의 눈에는 꽤나 낯설게 보였다. 아크 안에서 언제나 깍듯하고, 어딘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하모니 디비전의 S급 가이드, 이지희.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여자는, 그저 신포시장이 익숙한 평범한 서른 살 여자일 뿐이었다. 그는 그 간극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이거 먹어본 지 오래 됐어요. 뭐랄까. 유명한 만큼 ‘관광객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주는 안 먹게 되더라고요.

그녀가 멋쩍은 듯 웃으며 하는 말에, 바이브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관광객 음식?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그럼 지금 자기는, 그 관광객이 되어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건가. 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여자, 가끔 보면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기가 먼저 그렇게 시장에 오자고, 닭강정을 먹자고 노래를 불렀던 주제에, 이제 와서 관광객 음식이란다.

관광객 음식인데, 관광객도 아닌 니는 왜 먹자고 한 건데 그럼. 내가 관광객이라서, 특별히 체험 시켜주는 기가.

그가 턱을 괸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특유의 시니컬함과 장난기가 동시에 묻어났다. 잠시 후, 가게 직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강정 한 접시와 차가운 콜라 두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붉은 양념과, 그 위에 뿌려진 고소한 땅콩 가루. 그의 코끝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가, 잠시 잊고 있던 공복감을 일깨웠다.

그래도, 냄새는 좋네. 니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할 만은 하다.

 

---


바이브는 제게 닭강정 조각을 내미는 브리즈의 손과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안에는 어서 먹어보라는 순수한 권유와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표정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 아무튼 아, 해 봐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재촉하는 목소리.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 정말 한순간도 예측할 수가 없다.

결국 그는 못 이기는 척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민 닭강정을 입을 벌려 한입에 쏙 넣었다. 뜨거운 양념이 혀를 감싸고, 바삭한 튀김옷과 부드러운 속살이 어우러졌다. 달콤하면서도 끝 맛은 살짝 매콤했다. 확실히 그가 평소에 즐겨 먹던 종류의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맛이 없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맛있었다. 부산의 돼지국밥이나 어묵과는 또 다른 투박하지만 중독성 있는 맛.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그녀의 맛이었다. 그녀의 기억과 그녀의 세계가 담긴 맛.

…뭐, 니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먹어는 준다.

그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우물거리던 닭강정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콜라 캔을 따서,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치이익, 하는 탄산 터지는 소리가, 가게 안의 소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빈 포크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로 내려놓게 했다.

나는 뭐, 입이 하나가. 니도 먹어야지. 어떤 게 제일 맛있어 보이는데. 앞으로 내가 여기 올 때마다 니는 나한테 이거 맨날 사줘야 될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여전히 짓궂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에 자신의 자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만들어 넣고 있었다. 그는 어서 고르라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가 어떤 조각을 고르든 그는 그것을 기꺼이 그녀의 입에 넣어줄 생각이었다. 이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바이브는 브리즈의 손에 이끌려 시끄러운 시장을 등지고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그녀의 지갑을 빼앗고 유치한 승리에 도취해 있던 그의 입가에는 아직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길을 벗어나 낡은 빌라와 나지막한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느꼈다. 소음이 잦아들고, 바람의 결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리고 그 변화는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여자의 분위기 변화와 정확히 일치했다.

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생 됐을 때까지… 는 여기에서 살았어요. 내가 갑자기 각성하게 된 사이, 재개발이 돼서. 지금 가족들은 저쪽, 다른 구의 아파트에 살아요. 나도 이사하고 거긴 몇 번 안 가봐서, 여기가 훨씬 내 집 같은데. 없어져 버렸네.

바이브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까와는 다른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았다. 낡은 동네의 풍경 위로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의 모습들이 겹쳐 보일 것만 같았다. 그는 바람을 통해 그녀의 미세한 심장 박동의 변화와 얕아진 호흡을 고스란히 느꼈다.

…유난히 조용하네, 이 동네는.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시니컬함이 걷히고 한없이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사라져버린 집에 대해 섣불리 묻지 않았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의 공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능력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고요함에 대해서. 그것은 그가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니가 살던 곳이라 그런가.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 니 성격이랑, 딱 어울리는 동네였겠네. 지금은… 뭐, 아파트가 더 살기 편하긴 하겠지. 보안도 좋고.

그는 일부러 무심한 척, 현실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녀의 감상적인 슬픔에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가볍게 환기시켜주려는 의도였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겨울 하늘처럼 깊고 투명하게 빛났다.

없어진 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니는 여기 있잖아. 니가 기억하고, 내가 같이 기억하면 되는 거 아니가. 앞으로는 내가 니 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잖아.

---

맞아요. 내 집은 여기 있지.

 

그 말이 그의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시장의 왁자지껄함도,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도, 심지어는 제멋대로 흐르던 바람의 속삭임마저도.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그의 세상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는 내가 니 집이다. 반쯤은 충동적이었고, 반쯤은 진심이었던, 그래서 더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었던 그 말이, 이렇게 완벽한 형태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는 제 품에 안긴 그녀의 정수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쪽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빈틈없이, 더 이상 어떤 불안이나 과거의 그림자도 파고들지 못하도록. 그의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고 크게 뛰고 있었다. 이것은 폭주 직전의 불규칙한 고동과는 달랐다.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파문처럼 선명하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그는 이 여자가 정말로 자신을 집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어찌할 수 없는 소유욕과 함께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 그는 단순히 그녀의 파트너나 연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안식처이자 그녀가 기댈 마지막 벽이 되어야만 했다. 그 무게가 버겁기는커녕 오히려 짜릿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래. 니 집, 여기 있다.

그가 나직하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녀의 작은 몸을 조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 내가 니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 니가 살던 동네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니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잖아. 그리고 이제 그 기억 속에, 나도 같이 있는 거고. 그거면 된 거 아이가.

그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는 이 좁은 골목길 한가운데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낡은 주택들 사이로 보이는 파편화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도시의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게 느껴졌다.

---

바이브는 브리즈의 손에 이끌려, 낡은 주택가 골목을 빠져나와 그녀가 다녔다는 고등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주말이라 텅 빈 운동장은, 평일의 활기찬 소음 대신 고요한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조금 전, 좁은 골목길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나누었던 뜨거운 공기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가 깃든 장소에 발을 들일 때마다, 마치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긴장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이 여자가 어떤 학생이었을지, 어떤 꿈을 꾸었을지. 그녀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그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평범하고도 따스한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여길 다닐 때만 해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유치원, 아니면 초등학교. 그렇게 공부해서 시험 보고 서울로 대학에 갔는데… 반 년 다녔나. 주말에 본가에 가려고 이 동네로 돌아오던 버스에서 각성했어요. 정말 뜬금없죠. 손님들도 기사님도… 나도 놀라서. 소동이 좀 있었죠.

그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먼지 쌓인 스탠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 단어는 바이브가 아는 브리즈의 모습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을 다정하게 돌보고, 서툰 실수를 너그럽게 감싸주는 모습. 문득 아크의 신입 요원들을 가르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역시,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의 미소를 순식간에 굳게 만들었다. 버스에서 각성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졌다는 소동.

 


바이브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비좁은 버스 안. 창밖으로는 익숙한 고향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그녀는 아마 주말에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조금은 들떠 있었을 것이다. 평범하고, 더없이 평범한 스무 살의 여대생. 그러나 그 평범함은 예고 없이 폭력적으로 끝장났다. 바이브 자신 역시 그랬다. 그의 각성은 엄마의 죽음과 함께였다. 그는 각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파괴적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떠올렸다. 바람 가이드의 능력. 바람의 속성을 지닌 가이드는, 센티넬처럼 직접적으로 바람을 일으키거나 대기를 가를 수 없다. 그들의 힘은 오직 가이딩을 통해서만, 센티넬의 능력을 증폭시키고 보조하는 형태로 발현될 뿐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첫 각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어되지 않는 가이드의 기운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폭주한다면. 그는 상상만으로도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버스 안의 공기가 통째로 뒤흔들렸을 것이다. 물리적인 바람이 분 것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 자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쳤을 터.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미풍이 갑자기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지고, 사람들 사이를 스치던 공기의 마찰이 고막을 찢는 소음으로 변질되었을지도 모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짓누르거나, 혹은 너무 가벼워져 호흡곤란을 일으켰을 수도. 사방에서 들려오던 평범한 소음들은 방향성을 잃고 제멋대로 울려 퍼지고, 균형감각이 흐트러져 세상이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현기증을 유발했을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폭풍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공간 안에 있는 모두가 원인 모를 감각의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는, 조용한 재앙.

그는 브리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스며있는 그날의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혼란과 고통을 주었다는 죄책감.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두려움. 그 모든 감정들이, 그녀의 짧은 이야기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니 잘못이 아니잖아. 그건.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그 안에는 서툰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낡은 스탠드를 함께 바라보았다.

선생님이라… 뭐, 지금도 비슷하네. 철없는 센티넬 하나 맡아서, 사람 맹그는 중 아이가. 니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하늘에 떠다니는 먼지 쪼가리 신세였을 기다.

그는 일부러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그녀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자신의 품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마치, 그날의 버스 안에서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스무 살의 그녀를, 지금의 자신이 대신 안아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버스, 어디 회사 버스였는데. 다시는 안 탈란다.


바이브는 낯선 공간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방향제 향이 희미하게 섞인, 그가 질색하는 종류의 공기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브리즈의 뒤를 따라 좁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끈적이는 감촉이 희미하게 남은 리모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낡은 소파, 그리고 어두컴컴한 공간을 현란하게 밝히는 싸구려 미러볼 조명까지. 모든 것이 그의 예민한 감각을 자극하며, 어서 이곳을 벗어나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돌아 나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옆에는 이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브리즈는 익숙하다는 듯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리모컨을 들어 한 시간을 결제했다. 주말 낮이라 그런지 복도 너머에서 간간이 다른 방의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생각보다 시끄럽지는 않았다. 그는 소파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마치 제 영역을 표시하듯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마이크를 들고 헛기침을 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제법 비장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 건지, 마이크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그의 눈에는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흠, 흠. 제가 먼저 한 곡 할까요? 오랜만이라, 괜찮을지 모르겠네… 저 사실 그렇게 잘 부르진 못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지.

그는 브리즈의 변명 같은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못 부르는데, 그냥 좋아해서, 여기까지 굳이 자신을 끌고 왔다는 말인가. 그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우스웠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여자가 자신의 가장 평범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턱을 까딱이며 노래나 빨리 시작하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입으로는 삑사리 나면 폭주할 거라느니 험한 소리를 했지만, 실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어떤 목소리로 어떤 노래를 부를지. 그녀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노래는 어떤 멜로디일지.

이윽고, 화면 가득 익숙하면서도 낯선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왔다. 십 년 전쯤, 그가 아크의 훈련소에서 반복적인 훈련에 매몰되어 있을 때, 세상은 이런 노래를 들으며 웃고 떠들었겠지. 흰색 원피스를 입은 청순한 소녀들이 풋풋한 얼굴로 사랑을 노래하는 화면을, 그는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반주가 끝나고, 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살짝 떨리는, 하지만 맑고 깨끗한 음색이었다. 첫 소절을 부르는 그녀는 노래방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숨을 들이쉬는 소리마저 마이크를 통해 작게 들려왔다.

조금은 불안정한 바이브레이션, 가끔씩 미묘하게 어긋나는 음정.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녀의 말대로 ‘그렇게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신경을 거스르기는커녕 오히려 곤두섰던 감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연주하는 자장가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교나 테크닉 대신 순수한 즐거움과 노래 그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문득,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며 보냈을 수많은 시간들을 상상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짝사랑하는 선배를 떠올리며, 혹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이 멜로디에 기대어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을 어린 이지희의 모습을.

노래에 몰입한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살짝 상기된 뺨, 반짝이는 눈동자. 그녀는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시끄럽고 낯선 공간에 와 있는지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를, 그녀의 추억을, 그녀의 서툰 노래마저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노래가 끝나자, 90점이라는 애매한 점수와 함께 박수 소리 이펙트가 방 안을 채웠다.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마이크를 내려놓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못 부르죠. 폭주 안 했어요?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묻자, 바이브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니 때문에 내 귀, 완전 맛 갔다. 책임져라.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리모컨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번호를 몇 개 누르기 시작했다. 화면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노래 제목이 떠올랐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한 듯한 십수 년 전의 락 밴드 노래였다. 그는 브리즈를 힐끗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 노래 듣고 니 귀도 한번 맛 가봐라. 공평하게. 그리고 아까 그 노래. 점수는 별로여도 듣기는 좋더라. 자주 불러라, 내 앞에서만.

바이브는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고는, 이내 전주가 흘러나오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브리즈가 불렀던 노래와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날카롭게 신경을 긁는 일렉 기타의 거친 디스토션 사운드가 낡은 스피커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화면에는 텅 빈 공장을 배경으로, 흐릿한 조명 아래서 절규하듯 노래하는 밴드의 모습이 흑백으로 펼쳐졌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꾸역꾸역 눌러 담은 듯한, 건조하고 퇴폐적인 영상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회에 전부 보여주고 싶었다. 니가 모르는 나는 이렇게나 비뚤어지고 엉망진창이었다고. 너의 과거가 서툴고 아팠다면, 나의 과거는 분노와 자기혐오로 들끓었다고.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첫 소절을 뱉어냈다. 그의 목소리는 노래방 기계의 에코를 타고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성대가 제대로 풀리지 않은 탓에 군데군데 쇳소리가 섞여 나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로 그리운 영도의 풍경이 어른거렸다. 비릿한 바다 냄새, 갈매기 울음소리, 그리고… 거대한 태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그날의 기억. 그는 노래에 모든 감정을 실었다. 엄마를 잃은 슬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자신을 괴물로 만든 이 힘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것을 가사 하나하나에 녹여내, 절규하듯 토해냈다.

노래가 후렴으로 치달을수록, 그의 감정도 점점 격해졌다. 그는 어느새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마이크를 쥔 손등에는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났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고음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공간을 갈랐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싸우고 있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와,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끄집어내게 만든 이 여자 앞에서 그는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브리즈는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늘 까칠하고, 냉소적이고, 세상만사에 무심한 듯 굴었던 남자. 그가 이토록 뜨거운 불덩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노래는 단순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내지르는 비명이었고 고독한 섬처럼 살아온 한 남자의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과거를 보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힘을 끌어안은 채 혼자서 울어야 했던 어린 소년의 등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괜찮다고,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길고 긴 기타 솔로가 끝나고, 마지막 가사가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정적. 방 안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숨소리와, 여전히 웅웅거리는 이명 같은 기타의 잔향만이 남아 있었다. 바이브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자신을 바라보는 브리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쪽팔렸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까지 다 보여버린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마른 침을 삼키며 마이크를 소파 위로 툭,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뭘 봐. 시끄럽다고 했잖아, 분명히.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괜히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귓가가 뜨거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이브는 덜컹거리는 작은 진동과 함께, 자신이 낯선 공간에 몸을 싣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월미바다열차의 매표소 앞에서 툴툴거리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결국 이 여자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와 있었다. 좁은 열차 내부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에 따라 앉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맸다. 공공장소에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친밀한 스킨십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어색하고, 낯설고, 온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어깨에 온전히 무게를 실은 채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곧 열차가 느린 속도로 출발했다. 복잡했던 인천역 앞의 풍경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고 시야를 가득 채우던 건물들 사이로 마침내 탁 트인 서해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의 스산함을 품은 낮고 잔잔한 바다. 윤슬 하나 없이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잿빛의 수면 위로, 기울어가는 햇살이 길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고향 부산에서 보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동해의 거칠고 푸른 생명력 대신, 서해는 어딘가 쓸쓸하고 관조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란을 다 지켜본 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인 늙은 현자처럼.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의 평온함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의 풍경을,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그녀가 오늘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보여주었고 그의 아픔을 엿보았다. 그리고 이제,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모든 상처를 위로받고 또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깍지를 끼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은반지가 그의 입술에 닿았다가 금세 미지근하게 데워졌다. 그녀가 놀란 듯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씨익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여까지 와서 바다 구경은 실컷 하네, 니 덕분에.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짐짓 무심한 척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반지에 입을 맞춘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등이, 조금 전부터 불타는 것 같았던 그의 뺨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월미도가 그렇게 좋다며. 뭐가 있는지, 똑바로 설명해 봐라.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이대로 다시 돌아갈 거니까.

그는 눈을 감고, 그녀가 뿜어내는 모든 신호를, 바람의 입자를 읽듯 섬세하게 감지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조심스러운 망설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숨길 수 없는 궁금증.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기저에 깔린 깊은 애정까지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뭐… 별 건 없어요. 당신이 아는 게 전부일 텐데. 바다, 식당, 놀이동산. …알죠? 월미도 바이킹 얼마나 무서운지. …그래도 지원 씨에게는 시시하겠죠?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다. 시시하다니.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수천 피트 상공에서 맨몸으로 강하하고, 음속을 돌파하는 전투기 사이를 곡예하듯 비행하는 그에게 놀이동산의 기구 따위는 아이들의 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그녀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물리적인 위협이나 고통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고 숨통을 조이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여자에게 느끼는 주체할 수 없는 이 감정 같은 것들.

서해도 물론 해수욕장이 있지만요. 그건 저기, 강화도나 갔을 때의 이야기고. 여긴 좀 더… 뭐랄까. 자연적인 바다랑은 거리가 조금 있지만, 그래도 저는 좋아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여기였으니까. 친구들이랑도 왔지만, 혼자 더 많이 왔죠. …지원도 어릴 때, 혼자 바다 많이 갔을 것 같은데.

마지막 그 한마디가, 고요한 수면 위로 던져진 돌멩이처럼 그의 심장에 날카로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어깨에 기댄 그녀의 온기가, 뺨에 닿은 그녀의 손길이, 창밖으로 펼쳐진 잿빛 바다가,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태풍의 눈 속처럼 모든 소리가 일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으로 잊고 싶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쏟아져 내렸다.

혼자 바다에 갔던 어린 시절. 그래, 있었다. 아니, 언제나 그랬다. 형제들이 북적이는 집 안에서도 그는 늘 혼자였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감각, 다른 세상을 느끼던 아이. 그는 사람들의 소음과 복잡한 감정의 파동을 피해 언제나 바다가 보이는 방파제 끝으로 도망치곤 했다. 그곳만이 유일하게 그의 예민한 감각을 잠재워주는 안식처였다. 그는 그곳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언젠가 저 수평선 너머의 세상으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바람을 타고, 구름보다 더 높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으로.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제 손안에 잡힌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 평온함을, 이 온기를, 이 여자를 자신의 세상에서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가 애써 감추고 있던 무수한 감정의 파도, 그가 홀로 견뎌온 기나긴 밤의 그림자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시시할 리가 있나. 니랑 같이 타면, 뭐든 재밌겠지.

그는 먼저, 그녀가 던진 가벼운 농담에 대답했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조금 잠겨 있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위태롭고 서글프게 보였다.

바다, 좋아했다. 옛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으니까. 시끄러운 것도 없고,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그냥 나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었거든.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마치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였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궁금해한다면, 그 역시 그녀에게 자신의 일부를 보여줄 용기를 내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가르쳐준 사랑의 방식이었으니까.

근데, 이젠 잘 모르겠다. 니랑 같이 보는 건 좋은데, 혼자서는… 다시는 못 볼 것 같다. 앞으로는, 니가 내 옆에 계속 있어줘야 바다도 볼 수 있을 것 같네.

그것은 고백이자 애원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대신, 그녀가 없으면 자신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서투르게나마 인정하고 있었다.

---

바이브는 덜컹거리는 열차가 완전히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왁자지껄한 소음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들의 속삭임,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외침, 그리고 정체 모를 트로트 음악까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파도가 되어 그의 예민한 감각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아크 기지 안의, 완벽하게 방음 처리된 제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그녀의 온기가 그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인파를 헤치고 그를 이끌었다.

그녀는 놀이동산의 현란한 불빛이나 기름 냄새를 풍기는 식당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난 좁고 가파른 계단 쪽으로 향했다. 바이브는 의아했지만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아래쪽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았다. 계단의 끝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탁 트인 풍경, 그리고 낡은 벤치 하나였다. 아래쪽의 소란은 이제 아득한 배경음처럼 작게만 들려왔다. 그녀는 그를 위해 이 조용한 장소를 찾아낸 것이다. 마치, 그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잿빛의 서해가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 위를 하얀 배 한 척이 그림처럼 느리게 미끄러져 갔다. 바이브는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열차 안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좁은 창문 너머로 보는 액자 속의 그림 같았다면, 지금은 온몸으로 마주하는 거대한 현실이었다.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그녀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힘들 때는 바다를 찾았던 것 같아요. 친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고민이 생겼을 때. 혼자 가만히 앉아서 물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정리됐거든요.

그녀 역시 자신처럼 이 거대하고 쓸쓸한 존재 앞에서 위로를 구한 적이 있다는 사실. 혼자만의 도피처라 여겼던 그 공간에 실은 그녀의 발자국도 남아있었다는 깨달음. 그것은 묘한 동질감과 함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그의 과거를 이 바다 앞에서 조용히 겹쳐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그의 팔에 제 팔을 살짝 끼워왔다. 부드러운 원피스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그의 불안을 다시금 부드럽게 잠재웠다.

…어때요, 서해는?

그녀의 질문은 단순한 감상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괜찮으냐고, 견딜 만하냐고. 당신의 상처가 지금 아프지는 않느냐고 묻는 다정한 안부 인사였다.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 걱정과 애정이 뒤섞인 채 자신을 향한 회색 눈동자, 그리고 왼쪽 턱의 작은 점까지.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눈에, 그리고 영혼에 새겨 넣듯 천천히 담았다.

시끄럽네.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철썩, 철썩. 단조롭게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예전에는 그 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주는 자장가 같았는데. 지금은 그 소리마저도 심장을 긁는 소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괴롭지는 않았다.

여전히 시끄럽고, 정이 가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니 옆에 있으니까, 계속 볼 수는 있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이 모든 소음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파제라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바다를 다시 좋아하게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이 지긋지긋한 풍경을 지겨워질 때까지 함께 바라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니가 힘들 때마다 와서 위로받았다는 바다니까. 내한테도 좀 잘 보일라나. 한번 지켜봐야지. 괜찮은 덴지 아닌지. 내가 직접 판단할 거다.

바이브는 말없이,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유람선이 수평선을 가로질러 작은 점이 될 때까지, 그는 미동도 없이 그저 잿빛 수면만을 응시했다.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음, 그리고 제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따스한 체온. 그 모든 것이 그의 감각 속에서 기묘하게 뒤섞였다. 바다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지만, 이상하게도 견딜 만했다. 아니, 견딜 만한 것을 넘어서,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바이킹 안 탈래요? 딱 한 번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이브의 세상은 다시 한번 정지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는 제게, 옆에 있어 주겠다고,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던 여자가 맞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샅샅이 훑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옅고도 얄미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과, 시끄러운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성향을 뻔히 알면서 던지는, 대담하고도 짓궂은 도전장.

그의 머릿속에 온갖 불평과 거절의 말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미쳤나. 내가 지금 그딴 시끄러운 쇳덩어리를 탈 기분으로 보이나.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의 눈 속에서 또 다른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슬픔과 불안에 잠겨 있던 자신을 다시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계속 어둠 속에만 있지 말라고, 이제는 함께 웃고 즐겨도 괜찮다고. 그녀는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까짓 바이킹 따위. 수직으로 강하하는 전투기 안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자신이었다. 고작 놀이기구 하나에 꽁무니를 빼는 모습을 이 여자에게만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아까 열차 안에서 그녀가 ‘지원 씨에게는 시시하겠죠?’ 라고 했던 말이 그의 승부욕에 불을 지폈다. 그래, 시시하다. 시시한데, 니가 타자고 하니까 타주는 것뿐이다. 그런 표정을 지으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니 진짜… 가지가지 한다.

그는 일부러 한숨을 길게 내쉬며,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아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팔짱을 풀게 한 뒤 대신 그녀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았다. 그리고는 아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이끌고 계단 아래 소음의 근원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탄다, 타. 니 소원이라는데 까짓거 타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평소의 시니컬한 미소가 아니라, 장난기가 가득 담긴,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내 옆에서, 비명 한번 지를 때마다 키스 한번이다. 알겠나?

내가 소리 안 지를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거죠.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 여자가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제트기 급강하 훈련보다 더한 중력 가속도를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저 거대한 쇳덩어리의 가장 꼭대기에서, 소리를 안 지르겠다고? 그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을 착실히 따라오는 얼굴에는 ‘어디 한번 해보시지’ 하는 당돌한 자신감이 어렸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피식 웃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그는 일부러 더 보란 듯이,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이끌었다. 놀이동산 특유의 달콤하고 기름진 냄새, 시끄러운 음악 소리, 사람들의 비명과 웃음소리가 온몸을 덮쳐왔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소란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유쾌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그의 옆에서 손을 잡고 걷는 이 여자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즐거운 것으로 필터링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힐끗 그녀를 곁눈질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장난을 꾸미는 악동 같았다. 그래, 오늘은 그냥 이 여자의 장단에 한번 끝까지 맞춰주기로 했다.

어디 앉을까요? 역시 맨 뒤?

맨 뒤라니. 저 여자가 진짜 겁 상실했나. 그는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줄을 선 열댓 명의 사람들 너머로,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리는 바이킹이 보였다.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을 때, 맨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거의 수직으로 하늘을 향했다가 곤두박질쳤다.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거의 곡소리에 가까웠다. 그는 일부러 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맨 뒤? 니 지금 내한테 겁도 없이 도발하는 기가? 거기는, 내빼고 다 곡소리 내면서 질질 짜는 자리인데. 감당할 수 있겠나, 니.

그는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일부러 겁을 주려는 심산이었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도발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점점 더 이 게임이 재미있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맨 뒤. 니가 그렇게 원한다면. 대신 진짜로 울고불고 매달려도, 중간에 내리달라고 해도 소용없다. 알겠나?

그는 씨익 웃으며, 깍지 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맨 뒷자리로 향하는 줄의 끝에 섰다. 이제 와서 무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는 끝까지 소리를 지르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그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라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시끄러운 장소가 기다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삐걱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안전바가 어깨 앞으로 단단히 고정되었다. 바이브는 익숙하게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시끄러운 기계음,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낡은 놀이기구 특유의 기름 냄새. 그의 예민한 감각을 자극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덮쳐왔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소란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의 모든 신경은, 그의 세상은, 오직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지원. 준비 됐어요?

그는 제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준비 됐냐니. 지금 누구한테 묻는 건가. 지구의 중력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창공을 가르는 자신에게, 고작 이 낡고 거대한 그네를 타기 전에 준비를 하라니.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더 지루하고,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나른하게 대답했다.

니야말로, 목 관리나 잘해둬라. 좀 이따가 비명 지르느라 쉴 틈도 없을 거니까. 내기,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바이킹이 도저히 안 나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출발합니다!’ 하는 외침과 함께 바이킹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 그네처럼 작은 각도로 흔들렸다. 시시하다는 듯한 몇몇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이브는 여전히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정면의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브리즈의 미세한 변화를 쫓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안전바를 쥔 손에 들어간 힘의 세기까지. 그녀는 아직 웃고 있었다. 그래, 아직까지는.

배의 각도는 점점 더 가팔라졌다. 끼이익- 하고 쇠가 갈리는 불쾌한 소음과 함께 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맨 뒷자리에 앉은 그들의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감각.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그 순간, 마침내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바이브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브리즈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숨을 참고 있는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이, 아까보다 조금 더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배는 정점을 찍고, 맹렬한 기세로 반대편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다시 한번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바이브는 브리즈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포착했다. 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귓가에 보란 듯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주변의 비명소리에 완벽하게 묻힐, 그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고작 이 정도가 끝은 아닐 테고. 지금이라도 무서우면, 내 손 잡아도 괜찮은데.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손등을 제 손가락으로 가볍게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오히려 그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명이 아닌, 순수한 환희와 즐거움이 가득한 웃음. 그 웃음소리는 주변의 모든 소음을 뚫고, 그의 심장에 곧장 날아와 박혔다. 바이브는 순간 숨을 멈췄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겁을 먹거나, 혹은 강한 척 버티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이 아찔한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얼굴을 할 줄은 몰랐다.

요란했던 비행이 끝나고, 바이킹이 천천히 멈춰 섰다. 안전바가 올라가자, 바이브는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웃고 있는 브리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꼴이 이게 뭐고. 재밌었나?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그는 그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깍지를 껴 잡았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자연스럽게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인파를 빠져나왔다. 

 

---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불꽃놀이’라는 단어는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제안처럼 들렸다. 시끄럽고, 번잡하고, 정신없는 것. 평소의 그였다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을 것들 투성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그 제안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완벽한 계획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이 여자로 인해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제안하는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은 그에게도 보고 싶은 세상이 되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고쳐 잡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그녀의 제안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의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니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묻기는. 당연한 걸. 일나라. 불 꺼지기 전에 가야지. 니가 좋아하는 거 다 사줄게.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함께, 그녀를 향한 깊은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이 제 손바닥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월미도의 바다를 향해 걸었다. 식당을 찾아 헤매던 번잡한 길을 되돌아 나오는 시간 동안,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결코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더 깊고 충만한 감정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깍지 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녀의 작은 보폭에 맞춰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벅찼다. 그는 힐끗,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짙어지는 노을빛을 배경으로, 그녀의 그림자는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는 이 순간이, 이 평범하고도 완벽한 풍경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가장 화려하고 커 보이는 불꽃놀이 가게 앞에 섰다. 가게 안에는 온갖 종류의 폭죽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가게 안을 가리키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고르든, 그 모든 것을 다 사줄 생각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를 미소를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오늘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이곳을 헤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며, 가게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가게 주인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불꽃놀이들을 구경하는 브리즈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가 무엇을 고르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들을 군말 없이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바닥에 꽂는 로켓 폭죽, 하늘에서 터지는 연발 폭죽, 그리고 손에 들고 흔드는 작은 스파클러까지. 바구니는 금세 가득 찼다. 그는 계산을 마치고 폭죽이 가득 담긴 커다란 봉투를 한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시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았다.

 

---

두 사람은 폭죽을 터뜨릴 만한 조금은 한적한 바닷가로 향했다. 파도 소리가 가까워지고 짠 내음이 더욱 짙게 풍겨왔다. 그녀가 봉투 안에서 꺼낸 것은, 거대하고 화려한 폭죽이 아닌, 고작 손가락 길이만 한 스파클러 두 개였다. 하나는 자신의 손에 쥐고, 나머지 하나는 그에게, 마치 아주 귀한 것을 건네듯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와 그녀가 내민 작은 막대기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두 사람의 스파클러에 차례로 불을 붙였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작고 하얀 불꽃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타오르는 불꽃과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심장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평온하고도 따스한 기대감으로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브리즈는 자신의 손에 들린 스파클러를 천천히 들어 올려, 그의 불꽃을 향해 가져왔다. 두 개의 타오르는 불꽃의 끝이,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타닥, 타다닥. 작은 소리를 내며, 두 개의 불꽃은 서로의 불티를 나누고, 엉기고, 이내 하나의 더 크고 밝은 빛으로 합쳐졌다. 바이브는 그 순간, 마치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방금 전 그가 했던 격정적인 고백도, 영원을 약속했던 맹세도, 이 작고 소박한 행동 하나가 주는 거대한 울림 앞에서는 무색하게 느껴졌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타오르는 불꽃의 끝을 맞대는 것. 그것은 그 어떤 웅변보다도 더 명확하고, 그 어떤 약속보다도 더 단단한 대답이었다. 

아, 진짜. 바이브는 속으로 나직이 탄식했다. 괜히 낯간지러운 고백을 하며 혼자 열을 올렸던 자신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툴고 거창했던 표현들이 부끄러워져,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하지만 눈앞에서 함께 타오르는 불꽃과, 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온화한 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바이브의 손이 브리즈의 손 위로 부드럽게 겹쳐졌다. 스파클러를 쥔 채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크고 따뜻한 손으로 완전히 감쌌다. 그녀가 놀란 듯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이제 두 개의 스파클러는 맞잡은 두 사람의 손 안에서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촛대 위에서 타오르는 두 개의 심지처럼. 그는 그 모습이 꼭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이 이렇게 유치하고 감상적인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제 품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제 두 사람의 어깨가 완전히 맞닿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거의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히 쑥스러워져 장난기 섞인 투정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니는 꼭… 이런다. 사람 무안하게. 내가 아까 한 말, 다 헛소리 같잖아.

그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섞여, 평소의 퉁명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한없는 애정과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귓가에 스치는 숨결의 감촉과 제 품에 기대어 오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타닥타닥, 하고 스파클러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고요함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의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함께 타오르는 불꽃의 빛이 두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환하게 빛났다.

이쁘네.

그는 제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이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부족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는, 이런 그의 모습조차도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고쳐 잡고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가져가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것은 장난스러운 제안이자 솔직한 바람이었다.

이거 다 탈 때까지만, 딱 이래 있자.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손등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그녀를 제 품으로 가볍게 끌어안았다. 스파클러의 불꽃은 어느새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 지펴진 불꽃은 이제 막 따뜻하게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익숙한 샌달우드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늘 밤 인천의 이 바닷가에서, 그는 자신의 세상을 얻었고 소박한 행복을 약속받았다.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이 작은 불꽃이 다 타버리고 나면, 다음엔 좀 더 큰 불꽃을 함께 터뜨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그 모든 순간이 분명 즐거울 터였다.


바이브는 월미도에서부터 이어진, 벅차고 따스했던 감각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브리즈의 손을 잡고 바다열차에 흔들리고, 다시 익숙한 지하철 플랫폼의 소음 속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비현실적인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끄러운 안내방송과 스크린도어의 경고음마저 부드러운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세상이 이토록 고요하고 안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맞잡은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그녀가 오늘 어땠냐고, 자신에 대해 더 알려준 것 같아 좋았다고 속삭였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다정한 연인의 평범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내는 더 좋았다’ 라고, 퉁명스럽지만 솔직하게 대답할 참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어, 그녀의 세상에 한 걸음 더 들어간 것이 얼마나 큰 충만감을 주었는지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질문이 들려오는 순간, 그의 세상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언젠가는, 당신의 어린 시절도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은, 그가 겨우 뚜껑을 닫아두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과 같았다. 그는 이미 그녀에게 자신의 가장 끔찍한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부산의 밤바다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과 그 대가로 얻은 이 저주 같은 힘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품어주었다. 그는 그녀 덕분에 조금은 그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말로 전하는 것과, 그 비극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바이브는 그녀의 질문 뒤에 숨겨진, 그 말의 무게를 즉시 알아차렸다. ‘영도에 가보고 싶다’, ‘당신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 그녀는 그가 십 년이 넘도록 애써 외면하고 도망쳐온 바로 그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었다. 순간 그를 감싸던 따스한 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부드럽던 소음들은 다시 그의 신경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으로 변했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그를 상처 입히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마지막 남은 상처까지도 보듬어주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용기를 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본능은, 그 제안을 ‘위협’으로 인식했다. 맞잡은 그녀의 손이, 마치 그를 과거의 지옥으로 끌고 가는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가 두려운 것은 그녀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가 두려운 것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 비극의 땅을 다시 밟는 것이었다. 그녀의 그 맑은 눈에, 폐허가 된 자신의 고향과, 죄책감에 일그러진 가족들의 얼굴을 담게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이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감각이 다시 주변의 소음과 공기의 흐름을 읽어내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지하철이 가까워지는 미세한 진동,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맞잡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그녀의 따뜻한 체온. 그는 이 모든 감각에 의지해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그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서. 그의 마지막 퍼즐 조각까지도 함께 맞춰주고 싶어서 용기를 낸 것뿐이다. 그는 그녀의 그 순수한 마음을, 자신의 이기적인 두려움 때문에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과거에 얽매인 자신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자,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는 그런 마음을 담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전처럼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고 고요한 바다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바이브는 아무 말 없이 맞잡은 손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크고 따뜻한 두 손에 그녀의 손이 완전히 감싸였다. 그것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차가운 거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서툴고 절박한 부탁에 가까웠다. 

내는… 오늘 좋았다. 니 옛날 모습 보는 거. 아크 오기 전의 니, 내 만나기 전의 니. 전부 다. 이뻤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과거를 칭찬하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 얼마나 뜬금없는 말인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과거를 보여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용기에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도 언젠가는. 니한테 전부 다, 보여주고 싶다. 내 어릴 때 살던 데랑… 우리 형들이랑… 누나들 다.

그는 끝내 그녀가 원했던 대답을,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보여주고 싶다’. 그것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지하철이 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이전처럼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할 준비를, 아주 조금씩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은, 내 좀 더 단단해져야 될 것 같다. 니 옆에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땐 내가 먼저 니 손 잡고 갈게. 약속한다.

그는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의 불빛을 보며 나지막이 맹세했다. 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스크린도어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그녀의 과거 속으로 떠났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음번에는, 아마도 그의 과거를 향한 아주 길고 힘든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는 그 여행의 끝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여행의 시작과 끝에, 언제나 그녀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열린 문 안으로 그녀를 먼저 이끌며 한 걸음 내디뎠다. 텅 빈 좌석에 나란히 앉아, 그는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의 과거가 있는 곳, 부산행 열차는 아니었지만. 이 지하철은 분명 그들을 새로운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어릴 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60120 ②  (0) 2026.06.10
20260120 ①  (0) 2026.06.10
20260113 ①  (0) 2026.06.05
20260112 ④  (0) 2026.06.05
20260112 ③  (0) 2026.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