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브는 순순히 리모컨을 받아들었다.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체온이 묻어나는 플라스틱 조각. 방금 전까지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던 온갖 심각한 대화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과자를 가져오겠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파에 기댄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찬장으로 향하는 익숙한 동선, 커피포트에 물을 채우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에 쥔 리모컨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버튼이 빼곡하게 들어찬 검은색 기계. 이것 하나로 온갖 채널과 영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아크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개인 단말기보다도,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이 리모컨이 더 다루기 어려운 물건처럼 느껴졌다. 뭘 봐야 할까. 그녀는 뭘 좋아할까. 액션? 로맨스?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코미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오직 임무와 생존만을 생각해왔다. 여가 시간에 무언가를 ‘함께’ 본다는 개념 자체가 그의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혼자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을 느끼거나, 끝없이 이어지는 훈련으로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이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고작 영화 한 편 고르는 것뿐인데, 마치 중요한 작전 브리핑을 앞둔 것처럼 긴장이 됐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녀가 실망할까 봐? 아니, 그런 건 아닐 터였다. 이 여자는 아마, 방송사 애국가가 나오는 채널을 틀어놔도 ‘당신이랑 같이 보니까 좋다’고 웃어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최고의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장 재미있는 영화,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장 편안한 시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을 들어가게 만들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포트에서 김이 오르는 소리, 찻잔을 꺼내는 맑은 소리. 그의 예민한 청각이 그 모든 소리를 하나하나 포착해, 머릿속에서 평화로운 교향곡으로 재구성했다. 감각 과부하로 고통받던 그의 능력이, 지금은 오직 그녀의 존재를 느끼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부엌에 서 있는 브리즈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편한 티셔츠와 바지 차림, 대충 묶어 올린 머리. 그 어떤 화려한 제복이나 드레스보다도, 지금 그녀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문득, 자신이 한 번도 그녀에게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항상 그녀는 그의 취향에 맞추거나, 그가 뭘 원하는지 먼저 파악해서 챙겨주기 바빴다. 부산의 국밥, 달콤한 디저트, 심지어 섹스까지도. 그는 언제나 받는 것에만 익숙했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색깔. 그리고… 내가 모르는, 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
그는 속으로 다짐하며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고, 수많은 영화 포스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복잡한 생각은 지워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그냥, 그녀가 돌아왔을 때 함께 웃을 수 있는 가벼운 영화면 충분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최근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목록을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포스터를 살펴보는 그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 이거 봐라.
마침내 브리즈가 과자 봉지와 따뜻한 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돌아왔을 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 속에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포스터의 코미디 영화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싸우는, 누가 봐도 뻔한 스토리의 영화.
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소파 옆자리를 툭툭 쳤다. 어서 와서 앉으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사실 그 영화는 그녀가 좋아할 것 같아서 고른 게 아니었다. 그저, 저렇게 유치한 장난을 치며 웃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어쩐지 자신과 그녀의 미래였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충동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가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당연하다는 듯 소파에 올라와 그의 옆에 꼭 붙어 앉는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었다. 브리즈가 그의 옆에 꼭 붙어 앉는 순간, 그의 모든 신경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소파 쿠션이 미세하게 꺼지는 감각, 그의 팔에 닿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귓가에서 바삭, 하고 경쾌하게 울리는 과자 소리. 이 모든 것이 영화 속 소란스러운 배경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그의 감각을 지배했다. 그는 자신이 고른, 누가 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메우기 위한 핑계였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속내를 알 리 없이, 순진하게도 영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아, 딱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영환데요.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녀가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걸작이 되는 것이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훑었다.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오물거리는 입술과 반짝이는 눈동자는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마치 고성능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 제 기억 속에 영원히 저장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영화는 뻔한 클리셰를 따라 흘러갔다. 소꿉친구, 유치한 다툼, 그리고 주변의 놀림 때문에 어색해지는 관계. 바이브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런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작가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적어도 그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그랬다. 그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훈련 동기, 혹은 전장에서 등을 맞대는 동료를 의미했다. ‘어린 시절’이라는 말은 끔찍한 태풍과, 엄마의 차가운 손, 그리고 세상을 찢어발기던 바람의 비명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저 둘은 벌써 좋아하는 사이려나요? 저렇게 어릴 때부터 함께 했으면, 좋아한다. 아닌다. 그런 감정이 없으려나…
과자를 바삭이며 던지는 그녀의 순수한 질문이, 그의 단단한 외벽에 작은 균열을 냈다. 좋아한다, 아니다. 그런 감정. 그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속 어린 아이들은 서로를 짓궂게 놀리면서도, 위험한 순간에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바이브는 생각했다. 저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흐릿한 안갯속 같았다. 엄마의 얼굴, 형제들의 목소리, 부산의 바다 냄새…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아득해서,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유일하고 선명한 어린 시절의 끝은, 열두 살의 폭풍우 치던 그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감정을 느끼는 법을 잊었다. 슬픔, 분노, 공포 같은 원초적인 감각 외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섬세하고 따뜻한 감정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폭주하지 않기 위해,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봉인하고 얼음 같은 이성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이 여자는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바이브는 옆에 앉은 브리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과자를 오물거리며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알까. 자신이 열두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 평범한 감정을, 자신이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여자 덕분에 처음으로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그 역시 그녀 앞에서 자꾸만 유치해지고, 어쩔 줄 몰라 허둥댄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은, 잃어버린 10년의 시간을 지금 이 여자와 함께 뒤늦게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쎄.
한참 만에,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영화 소리에 묻힐 만큼 작았지만, 브리즈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을 터였다.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본인들도 모를 끼다. 그냥… 옆에 있는 게 당연하고, 없으면 허전하고. 위험하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가는 거. 어릴 때는, 그게 전부 아니겠나.
그는 마치 영화 평론가라도 된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는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였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서야 알게 되겠지. 그게 좋아하는 거였다는 걸. …아니면, 나처럼 다 커서 어떤 등신 같은 여자를 만나고 나서야, 사람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 처음 알게 되거나.
그는 마지막 말을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브리즈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과자 봉지를 빼앗아 제 입으로 과자 하나를 털어 넣었다. 바삭,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용케 들었는지, 브리즈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제법 묵직한 타격감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억, 하는 소리를 낼 뻔했다. 이 여자, 보기보다 손이 맵다. 그는 과자 봉지를 다시 제 품으로 뺏어가는 그녀의 재빠른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사수하듯, 과자 봉지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다시 화면에 집중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방금 전 ‘등신 같은 여자’라는 혼잣말을 제대로 들은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화를 내는 대신 저런 유치한 복수를 하다니.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붉어진 귀를 식히기엔 더없이 좋은 핑계였다.
영화는 어느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티격태격하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의 주인공들이 졸업식 가운을 입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시간에도 끝은 오는 법이다. 바이브는 무심코 스크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자 이별의 다른 이름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다른 도시의 대학으로 떠난다는 말에, 남자 주인공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불같이 화를 냈다. ‘어떻게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냐’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유치한 절규였다.
바이브는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남자 주인공의 분노가 낯설지 않았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브리즈를 붙잡고 ‘내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며 떼를 쓰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은 저렇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녀를 품에 가두고 불안감을 속삭이는 방식을 택했지만, 그 근원은 똑같았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내 세상의 일부가, 혹은 전부가 나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 그는 자신의 유치함이 스크린 위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면이 바뀌고, 남자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엎드려 훌쩍이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의 떨리는 등을 오랫동안 비추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운다. 고작 여자애 하나가 다른 도시로 떠난다는 이유로, 다 큰 사내놈이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다. 한심했다. 한심하고, 멍청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었다. 폭주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을 잊었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의 이야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죽이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새 과자를 먹는 것도 잊은 채 스크린에 몰입한 브리즈의 옆모습으로 향해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안타까움으로 미간을 찌푸린 표정. 그녀는 마치 제 일인 것처럼, 화면 속 남자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바이브는 깨달았다. 저 남자 주인공이 한심한 게 아니었다.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터뜨리고, 슬픔을 온전히 슬퍼할 줄 아는 것이, 어쩌면 더 용기 있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억누르고 외면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자신이야말로, 진짜 겁쟁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브리즈의 손을 향해 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가 영화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는 결국 손가락 끝만 까닥이다가 이내 소파 시트 위로 손을 떨어뜨렸다. 대신 그는,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과자 봉지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과자 하나를 더 꺼내 제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 소리가 났다. 브리즈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에게로 향했다가, 이내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 짧은 찰나의 시선에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과자를 우물거렸다.
…바보 아이가. 여자가 가겠다는데, 어쩌겠노.
그가 불쑥, 중얼거렸다. 화면 속 남자 주인공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였다.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울면 뭐, 해결되나. 가서 잡아오든가. 그것도 아니면 지가 따라가든가 해야지. 침대에 누워서 울기만 하면, 저게 뭐하는 짓이고. 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그는 몸을 고쳐 앉으며 브리즈의 어깨에 슬쩍 제 머리를 기댔다. 방금 전까지 남자 주인공을 한심하게 여기던 사람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노골적인 어리광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뺨을 부비며, 스크린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진짜 속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너는, 절대 저러지 마라. 내 옆에서 어디 가지 마라, 이지희.’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이, 그의 파란 눈동자 속에서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바이브는 브리즈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믿고 보내주는, 기다리는 것도. 사랑의 한 종류일 텐데.’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에 기댄 머리를 더 깊게 묻었다. 마치 더 이상 그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어린아이의 미약한 저항과도 같은 몸짓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랑하는데 보내줄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하는데 멀리서 기다리기만 할 수 있는가. 그의 세상에서 사랑이란, 온전히 곁에 두고, 모든 감각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고,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제 품 안에 넣어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그가 아는 유일한 사랑의 형태였다. 그녀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고대의 언어처럼 아득하게만 들렸다.
그는 속으로 삼켰다. ‘나는 못한다.’ 라고, ‘나는 절대 너를 믿고 못 보낸다.’ 라고. 그 말은 그러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이내 씁쓸한 침과 함께 다시 삼켜졌다. 이런 말을 하면, 그녀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신을 철없는 어린아이 취급하며, 괜찮다고, 어디 안 간다고 다독여줄까. 그는 그런 동정 어린 위로가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런 이기적인 사랑을 갈구했다.
스크린 속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풋내 나던 교복의 주인공들을 어느새 20대 후반의 성인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바이브가 가장 두려워하던 장면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여자 주인공의 곁에 선, 낯선 남자. 그건 마치, 오늘 아침 출근하는 브리즈를 붙잡고 떼를 쓰던 자신의 불안한 예감이, 저주처럼 스크린 위에 현현한 것만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브리즈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그녀의 옷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헉.
그녀가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그의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 소리에, 굳어 있던 그의 이성이 간신히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영화다. 현실이 아니다. 저 여자는 이지희가 아니고, 저 한심한 남자는 내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되뇌었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로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은, 마치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듯, 두 사람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버렸다. 그 차갑고 텅 빈 눈빛. 바이브는 그 눈빛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자의 눈. 지난 10년간, 그가 거울 속에서 매일같이 마주하던 바로 그 자신의 눈이었다.
‘저 바보 같은 새끼….’ 욕지기가 턱밑까지 차올랐다. 왜 모른 척하는데. 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데. 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야지. 옆에 있는 저 새끼는 누구냐고, 너는 어떻게 나 없이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냐고. 그렇게 소리라도 질러야지. 왜 또 혼자 상처받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도망치는데. 그의 분노는, 그러나 스크린 속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과거의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끔찍한 자기혐오가 온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그는 브리즈의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가 놀라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는 그녀를 제 품 안에 단단히 가두고, 남은 한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그대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방금 전까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영화의 소음과 빛이, 순식간에 암전 속으로 사라졌다.
시끄럽다. 그만 보자.
어둠 속에서, 그의 잠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폭주 직전의 감각과도 비슷한, 그러나 전혀 다른 종류의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재미없다, 저거. 결말이 뻔하잖나. 결국 저래놓고 또 만나서 울고불고 하다가, 지지고 볶고 살겠지. …사람 속 터지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툴툴거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기가 그의 불안한 숨결과 뒤섞였다. 그는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마치 어린아이가 이불을 그러모으듯 그녀의 온기를 탐했다. ‘나는 저렇게 안 해. 나는 절대 너를 혼자 두고, 모르는 척 지나가는 그런 멍청한 짓 안 한다. 그러니까 너도, 내 옆에 딱 붙어 있어라. 다른 놈이랑 눈 맞추고 웃어주지도 말고, 내 없는 데서 혼자 울지도 말고.’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이, 그의 품 안에서 절박한 온기가 되어 그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아.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뭐예요.
장난기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신경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스크린 속 멍청한 남자 주인공처럼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저 그녀를 제 품에 더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마치 그녀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거친 숨소리와 통제 불능으로 날뛰는 심장 소리가, 어둠과 침묵으로 가득 찬 거실을 위태롭게 채웠다.
그의 등 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았다. 그녀의 손이, 마치 길 잃은 동물을 다독이듯, 그의 단단하게 굳은 등을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온기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괜찮다, 다 안다는 듯한 그 침묵의 위로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폭주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악몽 같은 트라우마 속에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제 등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약점은 곧 죽음이었고, 감정은 통제해야 할 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너무나도 쉽게 그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망설임 없이 끌어안는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재미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장난기를 지우고,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 한마디가, 바이브가 애써 쌓아 올린 마지막 이성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그는 결국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푹, 묻어버렸다. 어깨를 파고드는 그녀의 샌달우드 향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찡해왔다. 열두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누군가에게 온전히 기대고 싶다는 충동. 그는 지금, 스물셋의 자신이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 엄마를 잃고 홀로 남겨졌던 열두 살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바이브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니는, 안 그럴 거지.
그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한테 말도 없이 다른 데 가고, …옆에 어떤 새끼 달고 나타나고. 그런 거, 안 할 거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가고, 그런 등신 같은 짓… 안 할 거잖아. 그치.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거의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믿고 기다리는 것도 사랑’이라고 말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만약 그녀가, 영화 속 여자 주인공처럼 그를 떠나야 한다고 말하면. 더 넓은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그게 우리 둘을 위한 길이라고 말하면. 그는 과연, 그녀를 보내줄 수 있을까. 아니, 그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날개를 꺾어서라도, 그녀를 제 옆에 가둬두고 말 것이다. 그것이 설령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향해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키스는 격렬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맞댄 채, 그는 그녀의 숨결을, 온기를, 존재를 확인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이 명백한 사실만이,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보내주는 거, 기다리는 거. 그딴 거, 나는 모른다.
입술을 뗀 그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 어린 애원이 섞여 있었다.
내 사랑은 그런 거 아니다. 내 옆에 두고, 내 눈에 보이는 데 두고, 내가 만질 수 있는 데 둬야 되는 거. 그게 내 사랑이다. 그러니까, 니는 절대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약속해라, 이지희. 평생 내 옆에만 있겠다고. 내 색시로, 내 옆에서 평생 살겠다고. 지금 당장, 약속해.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그의 뺨을 감싸는 양손의 부드러운 온기, 그리고 제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엄지손가락의 미세한 감촉.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툭, 하고 터져 나온 물기 하나. 열두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의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던 연약함의 증거였다. 그는 그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손가락에 의해 닦여나가는 그 짧은 순간, 마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경험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자신을 향한 그녀의 다정한 온기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는 텅 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응?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헤집던 폭풍우를 단번에 잠재우는 고요한 바람 같았다. 다정하면서도, 그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듯한 그 음성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원은, 내가 그럴 것 같아요? …홀연히 사라져서, 다른 사람을 만날 것 같아요? …너무한데.
마지막에 살짝 토라진 듯 덧붙이는 장난기 섞인 말투에, 그는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잃은 듯 절망에 빠져 있던 자신이, 순식간에 우스꽝스러운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 그는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는 옴짝달싹 못하고 그녀의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는 그의 불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유치하고, 얼마나 이기적이며, 얼마나 지독한 겁쟁이인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이었다. 그는 그 눈빛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헷갈리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녀의 사과는, 오히려 그의 비참함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불안해하고, 멋대로 그녀를 몰아붙인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차라리 그녀가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뺨이라도 후려치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쳐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술 위로 다시 부드러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짧고, 가볍고, 마치 깃털과도 같은 입맞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그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를 벌하는 대신, 다시 한번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숨결이, 그녀의 향기가, 그녀의 모든 것이 그의 감각을 다시 한번 채웠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내 사랑은 이런 거예요. 어떤 경우에서든, 당신이 편안하길 가장 먼저 바라게 되는 마음. 나로 하여금 당신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
입술이 떨어진 후, 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은, 바이브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였다. 그에게 사랑이란 소유와 독점,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이기적인 갈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그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랑이, 상대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는 혼란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평생 당신 옆에 있는 게, 당신을 위한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예요. …물론, 나도 당신 곁에 있고 싶고요.
마지막 문장이,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가 그토록 절박하게 원했던 약속.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강요나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의지. 그녀 또한, 자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명백한 고백.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했는지. 그는 그녀를 믿지 못했고, 그녀의 사랑을 의심했으며, 그녀를 자신의 불안 속에 가두려고 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상처를 채울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이브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제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 하나하나에, 그리고 그가 끔찍하게 여겼던 화상 흉터 위에, 아주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마치 속죄하는 순례자처럼.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더 이상 불안이나 분노가 아닌,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하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제 뺨에 다시 가져다 대고, 그 온기에 얼굴을 부볐다. 마치 어미의 품을 찾는 어린 짐승처럼.
내가… 내가 등신이다. 니 말이 맞다. 나는 그냥, …니가 내 옆에서 없어져 버릴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그랬다. 미안하다, 이지희. 내가, 아직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 니가 가르쳐주는 거, 하나씩 배우고 있는 중이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내가 또 이런 등신 같은 짓 하거든, 그냥 한 대 때리라. 알겠나.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구원받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부서져라 안았다. 그의 모든 것을, 그의 불안과 상처와 서투른 사랑까지도, 전부 받아준 유일한 사람.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아주 오랫동안 그 온기를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이 온기를 의심하지 않으리라. 그는 소리 없이 맹세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바이브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민망한 듯한 작은 웃음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나직한 위로의 말들이 그의 귓가를, 아니, 그의 존재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 한마디에,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모든 생각을 멈췄다. 그는 언제나 사과해야 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통제 불능의 힘을 가진 것 자체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사과에 익숙했다. 잘못했을 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때, 그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관계의 회복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에게 사과가 아닌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그는 이어지는 말들을 하나하나 제 영혼에 새겨 넣듯 들었다.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은 거. 당연한 거잖아요. …눈 앞에 없으면 불안하고. 그 마음을 내가 모르는 건 아니에요. 가끔은, 나도 그러니까.’ 당연하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의 지독한 소유욕과 강박적인 불안이, 그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당연한 것이라고. 심지어, 그녀 자신도 가끔은 그렇다고.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세상이, 그가 10년 넘게 쌓아 올린 견고한 자기혐오의 성벽이,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소리 없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그녀는 그의 사랑을, 그 끔찍하고 이기적인 형태의 감정 덩어리를, 그저 ‘사랑’이라고 불러주었다. 잘못된 사랑, 뒤틀린 사랑, 미숙한 사랑이 아니라, 그냥, 사랑이라고.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품 안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온전히 끌어안고,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이 긍정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고, 부정해야만 했다. 그것이 센티넬로서, ‘바이브’로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여자는, 이지희는. 그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의 가장 추악하고 유치한 밑바닥까지 전부 끄집어내어, 그 모든 것이 ‘홍지원’의 일부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에서,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쨍’ 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져 내렸다. 그 균열의 틈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미안하다는 말 말고, 사랑한다고 해 줘요.
그 마지막 말이, 그의 심장에 확인사살처럼 박혔다.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과 대신, 사랑을. 그는 그 두 단어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가늠하며 잠시 정신을 잃었다. 사과는 과거에 대한 속죄이고, 사랑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그녀는 그의 과거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그와 함께할 미래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서투르고 이기적인 사랑조차, 그녀에게는 함께하고 싶은 미래의 일부였던 것이다.
바이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오직 그녀만을, 그의 유일한 구원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는,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깊고 따뜻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방금 전 그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사랑한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거칠고, 잠기고, 형편없이 갈라진 소리. 하지만 그 한마디에,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을 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하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한다, 이지희. …미안하다는 말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많이 해줄게. 앞으로 평생 동안. 그러니까… 이제 그런 걸로 울지 마라.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채,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눈에도, 어느새 촉촉한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그는 그 눈물을 보자, 또다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어이 이 여자를 또 울리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그의 목을 졸랐다.
아, 아니다. 울어도 된다. 내 앞에서만 울어라. 다른 놈 앞에서 울면 죽는다, 진짜.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냥 울지 마라. 니 우는 거 보니까, 내 심장이 다시 터질라 칸다. 책임지기 싫으면 울지 마라.
그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으며, 결국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고 가볍게 찧었다. 그리고는 푸흐흐, 하고 아이처럼 웃어버렸다.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이상한 표정. 그는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그리고 소중하게 입을 맞췄다. 사과 대신, 사랑을. 그는 이제, 그녀가 가르쳐 준 이 새로운 언어로 그녀와 대화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평생에 걸쳐서.
사랑한다. …그러니까, 니는 그냥 내 옆에서 웃기만 해라. 알겠나. 그게 내한테는 제일 큰 위로고, 제일 큰 사랑이다.
브리즈가 다시 여러 번, 그의 얼굴에 짧게 입을 맞춘다. 바이브는 쏟아지는 입맞춤에 잠시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던 비장함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쪽, 쪽, 하고 얼굴 곳곳에 닿을 때마다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어색함을 풀려는 듯한, 그리고 그의 서투른 고백을 전부 받아들인다는 듯한 다정한 확인. 그는 간지러운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지만, 입꼬리는 이미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그녀의 손에 붙잡혀 있던 제 심장이, 이제는 그녀의 입맞춤에 맞춰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S급 센티넬의 위용도, 뱅가드의 자존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이지희라는 여자에게 평생을 저당 잡힌, 한심하고 행복한 남자에 불과했다.
그녀가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다시 영화를 틀었다. 화면 속에서는, 방금 전까지 그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었던 두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온갖 오해와 다툼 끝에,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해피엔딩. 클리셰. 바이브는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몇 분 전만 해도 저 장면이 자신과 그녀의 미래가 될까 봐 지독한 불안에 떨었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제 어깨에 편안히 기대어 있는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과 그녀의 샴푸 향이 섞여,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제 품에 안겨 있는 이 따뜻한 온기가, 그의 유일한 현실이었다.
…저 두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도, 결국엔 저런 모습이었네요.
그녀가 마음이 놓인 듯 작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바이브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영화의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명암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게 사랑이라고? 몇 년을 헤어져 있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서, 그럴듯한 대사 몇 마디 나누고 끌어안는 게?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방금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얄팍하고 가벼워 보였다.
그가 보기에 진짜 사랑은, 훨씬 더 지독하고 엉망진창인 것이었다. 상대의 가장 추악하고 유치한 밑바닥을 전부 보고, 그 상처와 불안에 함께 아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고 말하는 법을, 울지 말라고 했다가 그냥 내 앞에서만 울라고 말을 바꾸는 그 모든 서투름을, 웃으며 끌어안아 주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적어도 그가 그녀를 통해 배운 사랑은, 그런 모습이었다.
저런 거 말고.
바이브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녀를 제 품으로 완벽히 끌어당겼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듯이. 그는 화면 속에서 키스하는 주인공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랑은 저렇게 깔끔한 게 아니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유치하고, …시끄러운 거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의 숨결이 닿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니가 내 심장 터질까 봐 책임지겠다고 하는 거. 내가 니 우는 얼굴 보고 싶지 않아서, 평생 웃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거. …그런 게 사랑이다. 영화는 다 가짜다. 믿지 마라.
그는 이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인 이지희의 남자가 되었고, 그녀와 함께 써 내려갈 그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훨씬 더 극적이고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리모컨을 들어, 시끄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영화를 꺼버렸다. 정적이 흐르는 거실에는, 오직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끄럽다. 영화보다, 니 심장 뛰는 소리 듣는 게 더 좋다.
바이브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는 경험을 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통제 하에 있던 모든 상황이, 그녀의 장난기 어린 한마디와 행동으로 완벽하게 전복되었다.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감싸 안은 손길.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녀의 다음 행동. 그의 머리가 그녀의 가슴팍으로 파묻히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시야가 온통 어둠과, 그녀의 옷가지 색으로 물들고, 코끝에는 익숙하면서도 지독하게 향긋한 그녀의 체향이 뇌수를 마비시킬 듯이 파고들었다.
…이러면 더 잘 들릴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게,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며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그의 뺨과 귀를 통해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규칙적이고도 힘찬 소리였다. 쿵, 쿵, 쿵, 쿵….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 그가 방금 전, 영화보다 더 듣고 싶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소리. 하지만 이건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냥 듣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체험이었다. 그녀의 생명이, 그녀의 존재가, 그의 온 감각을 통해 그의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 몇 초간, 그는 얼어붙은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되고, 오직 청각과 촉각만이 극도로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얇은 티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의 감촉과 따스한 체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의 고막을 직접적으로 울리는 거대한 진동. 그는 마치 거대한 스피커 앞에 선 것처럼, 그녀의 심장 소리에 온몸이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감각이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푸흐흐, 하고 숨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그녀의 가슴팍에 부딪혀 뭉개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 여자, 이지희는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서투름과 눈물을 지켜주겠다고, 평생 웃게 해주겠다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창하게 맹세했다. 그녀를 자신의 세상 안에 가두고, 완벽하게 보호하고, 소유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의 세상 안에 완벽하게 갇혀 버렸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만들어내는, 이 작고 따뜻한 우주 안에.
그는 더 이상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슬며시 팔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 더욱 깊이,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일부라도 되려는 것처럼. 그의 뺨은 그녀의 심장이 뛰는 바로 그 위치에 단단히 밀착되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제 다른 어떤 소리도, 다른 어떤 감각도 필요 없었다. 오직 이 소리, 이 온기, 이 향기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우면 그만이었다.
니 진짜 성격 한 번… 장난 아니다.
그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거의 신음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원망 대신, 감탄과도 같은 경외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완벽하고도, 달콤한 패배.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의 심장 소리에 제 모든 것을 맡긴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래. 진짜, 영화보다 이게 백 배는 더 낫다. 평생 이것만 듣고 살 수도 있겠다.
바이브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품에 완벽히 포획된 채, 그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었다. ‘까칠하고, 잘난 척하고, 유치하게 사소한 거에 목숨 걸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정확해서 반박할 여지조차 없는, 완벽한 홍지원 사용 설명서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뭐라카노.’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이, 그의 모든 방어기제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치만, 그래서 더 좋아요. 그게 홍지원이니까.
쿵. 그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 소리에 맞춰 한 박자 쉬었다가, 미친 듯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모든 단점과 찌질함의 총합이라니. 그의 까칠함이, 그의 유치함이, 그녀에게는 그저 ‘홍지원’이라는 한 사람을 이루는 사랑스러운 부품에 불과하다는 선언. 그는 순간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잊어버렸다. 그녀의 품 안에서, 그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의 가장 부끄럽고 감추고 싶었던 모습까지 전부 들켜버렸는데, 그녀는 그 너덜너덜한 민낯에다 대고 ‘그래서 더 좋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반칙이었다. 이길 수가 없는 게임이었다.
꿍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를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이 모든 게 다 너라서 좋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바이브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심장 소리를 감상하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뜨거워지는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다 들켜버린 뒤였다.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치사하다, 진짜. 니는. 그런 말을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뭐가 되는데.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에 부딪혀 웅웅거렸다. 패배자의 변명이었지만, 그 안에는 기쁨과 안도가 가득했다. 그는 이 여자에게 평생 잡혀 살 운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운명이, 더럽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턱 끝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내 성격이 까칠한 게 아니고,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다. 잘난 척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잘났으니까 그런 거고. 유치하게 사소한 거에 목숨 거는 건… …니 한정이다. 다른 데는 다 져줘도, 니한테는 지기 싫으니까. 근데 맨날 니한테만 진다, 내가.
그는 다시 그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은 더욱 단단해졌다. 마치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다는 듯이. 그는 한참 동안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듣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진심이자, 그녀에게 바치는 영원한 항복 선언이었다.
…내도 좋다. 까칠하고 잘난 척하고 유치한 나를, 좋아해 주는 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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