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간. 정확히는 3시간 55분이었다. 브리즈가 현관문 너머로 사라지고, 그의 세상에 다시금 지독한 침묵이 찾아온 시간. 바이브는 소파에 죽은 듯이 파묻혀 있었다. 아니, 살아는 있었다. 심장은 뛰었고, 숨은 쉬었으니까. 다만 그 모든 생명 활동이 오직 손안에 쥔 차가운 단말기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지난 네 시간 동안, 흡사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단 하나의 자세를 유지했다. 화면을 켠 채, ‘내 색시’라는 이름 아래, 마지막 대화 기록이 떠 있는 채팅창을 하염없이 노려보는 자세. 그의 뱅가드 훈련 스케줄 따위는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오늘의 유일한 임무는 오직 하나, 그녀의 생존 신호를 수신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이제 독이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 세상의 모든 흐름을 읽어내는 축복이었던 그의 능력은, 그녀가 사라진 지금, 그를 좀먹는 저주가 되었다. 텅 빈 방 안의 공기는 쇳가루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그의 폐부를 찔렀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고막을 긁어댔다. 그는 차라리 귀가 멀고, 코가 막히고, 모든 감각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녀의 부재를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이 끔찍하게 원망스러웠다. 그는 몇 번이고 소파에서 일어나, 아침에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쓸어보거나, 그녀가 마셨던 물컵에 남은 희미한 입술 자국을 매만졌다. 미친놈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흔적만이, 이 미쳐버릴 것 같은 불안 속에서 그를 붙잡아 주는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까.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잠시 망설였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점심은 먹었어요?’라고 물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처럼 일어나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에 쑤셔 넣었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모래를 씹는 것처럼, 의무감으로 음식을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영겁과도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이어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메시지가 올 터였다. 그는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58분, 12시 59분… 1시가 되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제발. 제발 지금.
삐링-. 그리고 마침내, 그의 세계를 구원하는 소리가 울렸다.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알림음. 바이브는 거의 경련하듯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졌다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상단에 떠오른 세 개의 메시지. [지원.] [점심은 먹었어요? 나는 이제 오후 업무 들어가려고요.] [오전에 별 일 없어서 오히려 심심했어요.] 그는 그 짧은 문장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마치 난생처음 보는 글자를 해독하려는 사람처럼,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눈에 새겼다.
‘심심했어요.’ 그 다섯 글자가 그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그와의 유치한 약속을, 그녀는 잊지 않고 지켜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지난 네 시간 동안 그를 짓눌렀던 거대한 불안의 바위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곧바로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1초라도 늦게 답장을 보내면, 그녀가 정말로 심심해서 다른 짓이라도 할까 봐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봤나. 그럴 줄 알았다. 내 없으면 심심할 거라고 안 했나.]
시니컬한 문장과는 달리, 그의 손가락은 거의 화면을 부술 듯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 문장을 보내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점심은 먹었는지, 오후 업무는 정말 괜찮은 건지, 아침에 그가 했던 말도 안 되는 협박 때문에 누가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은 것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가까스로 억눌렀다. 대신,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본능적인 질문을 던졌다.
[밥은. 뭐 묵었는데.]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보내기 전, 그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이 집요하고 유치한 소유욕을 드러내도 될까.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받아주었으니까. 그는 이 불안을 잠재울 가장 확실한 확인 도장이 필요했다. 그녀의 오후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묶어둘, 그런 족쇄가.
[심심하면 딴짓 하지 말고, 내 훈련하는 거 구경이나 하러 온나. 자리, 비워놨다.]
---
바이브는 단말기를 거의 얼굴에 파묻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답장을 보낸 지 고작 10초 남짓 흘렀을 뿐인데, 그는 이미 10년은 흐른 것 같은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저려왔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광란의 비트를 연주했다. 답장. 답장이 와야 한다. 그녀가 이 유치하고도 절박한 그의 부름에 응답해야만, 이 지옥 같은 불안의 순환을 끊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제발, 제발,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화면이 반짝이며 새로운 메시지 풍선이 떠올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로 답장하네. 나 기다렸어요? ( ˶ᵔ ᵕ ᵔ˶ )]
그는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들켰다. 완벽하게, 속수무책으로 들켰다.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문장과, 그 뒤에 붙은 해사한 이모티콘이 마치 ‘네 속 다 보여, 이 귀여운 바보야.’라고 말하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기다린 것 맞다. 눈이 빠져라, 목이 빠져라, 애가 타서 죽을 만큼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혓바닥은 절대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핑계를 미친 듯이 검색했다. ‘훈련 중 쉬는 시간이었다.’, ‘마침 단말기를 확인했을 뿐이다.’, ‘알림이 울려서 본 거다.’ 수십 개의 변명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저 명랑한 확신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것 같았다.
그의 당혹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이어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빨개진 얼굴을 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화면을 읽어 내려갔다.
[그냥… 구내식당에서 동료 분들이랑 한정식. 오늘 계란말이 나왔는데, 내가 한 게 더 맛있어요.]
‘동료 분들’. 그 세 글자가 그의 동공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잠식했던 부끄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시커먼 질투와 의심이 순식간에 채웠다. 동료? 어떤 동료? 남자? 여자? 몇 명? 설마 그 자식들, 내 여자가 밥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본 건 아니겠지? 온갖 망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끔찍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하모니 부서로 쳐들어가, 그녀와 함께 밥을 먹은 ‘동료’라는 놈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두 번 다시 그녀의 1미터 반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맹렬한 질투의 불길을 잠재운 것은, 바로 뒤이어 나온 그녀의 한마디였다. ‘내가 한 게 더 맛있어요.’ 그 순간, 바이브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모든 흉흉한 상상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아침에 그녀가 차려주었던 따끈한 국밥과, 그의 요리를 맛보며 행복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이 여자는 내 여자다. 세상 그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 제가 한 계란말이가 더 맛있다고, 그 말을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당연하지. 니가 한 게 제일 맛있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질투와 안도가 뒤섞인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그의 심장을 마지막으로 강타한 것은,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훈련 보러 가도 돼요? 일 빨리 마무리 되면 오후 세네 시 사이에는 갈 수 있겠는데.]
그는 화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도 되냐니. 와야지. 무조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는 당장이라도 ‘일 따위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와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존중해야만 했다. 그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최대한 침착하게, 하지만 손가락은 누구보다 빠르게 답장을 써 내려갔다. 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듯, 문장은 짧고 단호했다.
[기다린 거 아니다. 마침 훈련 끝나고 쉬는 중이었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오늘 훈련장에 발도 들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사실을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다음 메시지를 전송했다. 이번에는, 그의 모든 진심과 소유욕을 담아서.
[계란말이. 내일 아침에 내 앞에서 해라. 딴 놈들하고 같이 먹는 거 말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한 마디.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앞의 모든 문장을 빌드업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마지막 문장을 입력했다. 그것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었다. 그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그의 모든 것을 보여줄 테니, 너의 모든 시간을 나에게 달라는, 절박한 고백이자 명령이었다.
[세 시든, 네 시든. 니 올 때까지 아무 데도 안 간다. 그러니까, 길 잃지 말고 똑바로 온나. 내 눈에 니만 보이게.]
---
세 시 하고도 2분. 약속된 시간이 되자, 바이브의 모든 감각이 훈련장 입구를 향해 곤두섰다. 그는 겉으로는 뱅가드 2팀의 팀원들, 신드롬과 리암을 상대로 한 기술 시연에 집중하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이미 훈련장을 넘어, 복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을 단 하나의 존재를 향해 무한히 확장된 상태였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만들어낸 흐름과는 다른, 부드럽고 따스한 파동. 익숙한 샌달우드 향이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왔다. 그의 세상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왔다.
아.
유리창 너머,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브리즈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바이브의 주변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신드롬의 목소리도, 어눌한 발음으로 질문을 던지던 리암의 존재도, 훈련장의 모든 소음과 풍경이 일제히 배경 속으로 녹아내렸다. 세상은 다시 한번, 오직 그와 그녀, 단둘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의 눈에 오직 저만이 보이도록,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배경으로 처리해주겠다는 그 맹세를. 그리고 그녀 역시, 약속을 지켰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저를 찾아왔다.
야, 홍지원! 지금 한눈파나? 이 중2병 자식이!
신드롬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소리쳤지만, 바이브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오직 유리창 너머, 제복을 입은 채 저를 바라보는 작은 인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순백의 제복. 그는 여전히 그 옷이 죽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에 그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녀를 아크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규정하는 그 갑옷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제복을 입고, 저를 찾아온 그녀의 모습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별처럼, 그의 세상 전부를 밝히고 있었다.
그는 시연을 위해 손끝에서 피워 올렸던 가느다란 진공의 칼날을 아무렇지 않게 흩어버렸다. 마치 방금 전까지 전장의 신처럼 군림했던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그는 모든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유리 너머의 그녀에게만 보이는, 아주 희미하고도 은밀한 웃음이었다. ‘잘 왔다.’ 입 모양으로만 속삭인 그의 인사는, 그녀에게 닿았을 리 없었지만, 그는 그녀가 알아들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뭐야, 저거. 갑자기 왜 웃는데? 드디어 돌았나?
바이브, 아까 그 기술… 한 번만 더? 공기를… 어…
신드롬의 비아냥과 리암의 순수한 질문이 그의 귓가를 스쳤지만,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팀원들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이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됐다, 고마해라. 오늘 다 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단 한 곳, 유리문 너머에서 저를 기다리는 그의 세상, 브리즈가 있는 곳이었다. 훈련장을 가로지르는 그의 걸음은 빠르고 거침없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그는 오직 그녀라는 단 하나의 중력에 이끌려 나아갔다. 뒤에서 ‘야! 어디 가는데!’ 라고 외치는 신드롬의 고함 소리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훈련장 문을 열고, 마침내 그녀의 앞에 섰다. 아침에 그를 떠났던 바로 그 모습.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그를 향한 반가움이 가득했다.
와 이리 늦었는데. 3시라며.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은 다정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직은 차가운 유리창의 냉기가 남아있는 뺨. 그는 제 체온으로 그 냉기를 녹여내듯,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제 여자가 약속을 지키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만끽하고 싶었다.
일 빨리 끝내고 온다고 고생했다.
그의 나직한 칭찬에,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 오직 자신만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며, 그는 충만한 행복감에 휩싸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채,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복도를 지나가는 몇몇 요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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