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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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그녀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긴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충만했다. 하지만 젖은 청바지가 찝찝하게 달라붙는 감각은 현실이었다. 그는 브리즈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간단히 샤워를 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뽀송한 티셔츠와 편한 트레이닝 바지가 몸에 닿는 감각이 그제야 그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침실로 돌아오자, 여전히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멈춰 서서,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제 침대에서, 제 여자가, 저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그는 몸을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지금은 그녀의 휴식이 먼저였다. 자신 때문에 온몸이 뻐근할 테니.

그는 거실로 나와 책상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임무 보고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개인 단말기를 켜고, 무의식적으로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결혼’, ‘프로포즈 다음’, ‘같이 살 때 필요한 것’. 화면에 쏟아지는 정보들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어지러웠다. 예물, 예단, 상견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스물셋의 S급 센티넬에게, 이것은 난생 처음 마주하는 S급 괴수보다 더 어렵고 막막한 미션이었다.

‘…복잡네.’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다른 페이지를 열었다. 이번에는 가구 사이트였다. 2인용 소파, 더블 사이즈 침대, 넓은 식탁… 그는 자신과 브리즈가 함께 그 공간을 채워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함께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고, 식탁에 마주 앉아 그녀가 해준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눈을 뜨는 일상.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두 사람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너무 앞서나가는 자신이 우스워져 피식 웃었다. 우선 저녁 메뉴부터 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 신경을 단말기 화면에 쏟고 있던 그의 귓가에,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워언.

그것은 공기의 흐름을 타고 온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그의 세상에서는 그 어떤 폭발음보다도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화들짝 놀란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단말기 화면을 덮어버렸다. 마치 중대한 비밀 작전을 수행하다 들킨 요원처럼,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 뭘 본 건 아니겠지? 결혼 준비니 신혼 가구니 하는 걸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방금 전 욕실에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내보인 것보다 훨씬 더 수치스러웠다.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실 문 앞에, 그의 하얀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 서 있는 브리즈가 보였다.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 아직 잠이 덜 깬 듯 살짝 찡그린 미간, 그리고… 허리에 얹어진 손. 그는 그녀가 ‘아야야’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던 당혹감과 수치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은 걱정이 밀려왔다.

…깼나. 더 자지. 아직 밤이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의 무심한 톤을 유지하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미 그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선 그는, 먼저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뜨겁지는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려 그녀가 짚고 있는 허리를 바라보았다.

와 이래. 아프나? 허리 아픈 기가.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자신의 탓이라는 자각이 명백했다. 욕조 안에서, 이성을 잃고 그녀를 너무 거칠게 다루었던 순간들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는 죄책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허리에 얹힌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허리를 살살 주무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뭉친 곳을 찾아, 섬세한 감각으로 부드럽게 압력을 가했다. 겉으로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때문이다. 미안타. 너무 아프면 병원부터 갈까. …아니, 코어 팀에 연락해서 의료 가이드부터 부를까.

그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 여자에게, 자신의 흔적이 고통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제발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아프긴 한데 ……코어 팀에 가기엔 좀. 파트너 있는 가이드가, 밤중에 허리가 아파서 왔다니, 너, 너무 수상하잖아요…


의료 가이드를 부를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의 미간이 브리즈의 말에 살짝 찌푸려졌다. 수상하다니. 아픈데 치료를 받는 게 뭐가 수상하다는 건지, 그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브리즈가 아프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나다’라는 두 가지 명제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센티넬의 사고방식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 지금 그녀의 허리 통증이라는 문제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은, 당연히 전문 의료 인력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 그리고 ‘너무 수상하잖아요’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얼음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수상하다. 그는 그 단어의 진짜 의미를 뒤늦게 깨달았다. 한밤중에, 파트너가 있는 가이드가, 다름 아닌 ‘허리’가 아파서 의료팀을 찾는다. 아크 내의 모든 요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특히 가십에 굶주린 하모니 부서라면, 내일 아침이 되기도 전에 ‘S급 센티넬 바이브, 밤새 약혼녀 허리를 부러뜨릴 뻔하다’ 따위의 흉흉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다른 놈들이 자신과 브리즈의 밤을 상상하며 키득대는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났다. 당장이라도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가 모조리 진공 칼날로 썰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시선 때문에 아픈 것을 끙끙 참으려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자신의 서툰 사랑 때문에 그녀가 고통받고 있는데. 고작 남들 평판 따위가 무서워 아프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건 전부, 제 잘못이었다.

와… 진짜… 내 돌았네. 미친놈 아이가, 이거.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을 나직이 뱉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대신 그녀의 양쪽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다. 그럼 병원 안 가면 될 거 아이가. 코어 팀에도 연락 안 한다. 대신…

말을 끊은 그는, 그대로 무릎을 굽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브리즈가 당황한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장난기나 욕망이 아닌, 진심 어린 미안함과 단호한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업히라.

뜬금없는 말이었다. 브리즈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자, 그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려는 듯, 그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향했다.

방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업히라고. 이래 서 있으면 허리 더 아플 거다. 내가 이래 만들었으니까, 내가 책임지고 옮기는 게 맞다. 그러니까 군말 말고 빨리.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재촉하며, 그녀가 업히기 편하도록 등을 내밀고 자세를 낮췄다. 거대한 S급 센티넬이, 제 여자 앞에서 등을 내민 채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더없이 진지했다. 그는 브리즈가 망설이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다시 한번 나직이 중얼거렸다.

남들한테는 안 보여주면 될 거 아이가. …이 방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 맞제. 빨리 업히라, 진짜.


그의 등 뒤로, 아주 가벼운 온기가 내려앉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치 커다란 나비가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 같은, 미미한 무게감이었다.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자신의 등 뒤에, 자신의 세상 전부가 온전히 기대어 있다는 사실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전류처럼 짜릿하게 느껴졌다.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 근육이 저도 모르게 스르르 풀렸다. 그녀의 볼이 어깨에 기대는 감촉, 가슴께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숨결, 떨어지기 싫다는 듯 그를 감싸 안는 팔의 미약한 힘.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세상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강력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아주 잠시, 진심으로 바랐다.

…안 무거워요? 나, 병동에 있을 때… 살 찐 것 같아서.

하지만 그 평화로운 감상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 그녀의 말 한마디에 어이없이 깨져버렸다. 무겁냐고? 살이 쪘다고? 그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소리가 고작 그거란 말인가.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주제에, 제 등짝에 업혀서 한다는 소리가. 그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여자는 정말, 가끔 알다가도 모를 구석이 있었다. S급 센티넬인 자신에게, 고작 성인 여성 한 명의 무게가 대수일 리 없다는 걸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저렇게 맹한 소리를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더 한심했다.

그는 그녀가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살은 무슨 살. 병동에서 링거만 줄창 맞고 누워 있던 사람이, 찔 데가 어디 있다고. 오히려 헬쓱해진 뺨과 가늘어진 팔목을 볼 때마다 속이 상했던 게 누군데. 바람만 불어도 꺾일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제 품에 가둬두고 살이라도 찌워야겠다고 매일같이 다짐했던 게 바로 자신인데. 그녀는 정작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제 등 위에서 엉뚱한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진짜…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반동을 이용해 가볍게, 그러나 안정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그의 몸이 완전히 펴지자, 등 뒤의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치 제 몸의 일부인 것처럼, 혹은 커다란 솜이불을 하나 걸친 것처럼 가볍고 포근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 아래로 팔을 단단히 고쳐 받쳐 안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이없음과 약간의 심술,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다정함이 섞여 있었다.

살은 무슨. 뼈밖에 없는 게. 니 지금 내 무시하나? 이 정도 갖고 무겁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S급 달고 있겠나. 잔말 말고 꽉 붙잡기나 해라. 떨어져도 내 책임 아니다.

말은 그렇게 쌀쌀맞게 내뱉었지만, 그녀를 받쳐 든 그의 팔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일부러 더 쿵, 쿵, 소리를 내며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몸이 살짝씩 흔들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고, 그는 저도 모르게 목 뒤가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이건 반칙이다. 그는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최대한 빨리 이 민망한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침실에 도착한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의 모든 동작은 극도로 섬세했다. 그녀의 몸이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완전히 눕혀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뻐근한 듯 허리를 문지르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 움직이지 말고. 알았나.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있는 구급 상자로 향했다. 상자를 열자, 각종 비상약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 근육 이완제와 진통 효과가 있는 겔 타입의 파스를 꺼내 들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옷, 잠깐만 올린다. 약 발라야 되니까.

그는 허락을 구하는 말을 하면서도, 이미 그녀가 입고 있는 제 티셔츠의 밑단을 조심스럽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허리가 드러나자,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 욕실에서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차가운 겔을 손바닥에 적당량 덜어, 제 체온으로 살짝 데운 뒤에야 그녀의 허리에 부드럽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의 크고 투박한 손이, 원을 그리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약을 발랐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손끝에, 그리고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브리즈가 엎드린 채 나른한 신음을 뱉었다. 잠결에 웅얼거리는 듯한, 그러나 더없이 선명한 바람이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매일 지원이 이렇게 돌봐 주면 좋겠다. 평생요.

평생. 그 한마디가 공기의 흐름을 멈췄다.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던 그의 손이, 그 자리에 그대로 멎었다.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린 것처럼, 그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핏줄을 타고 맹렬하게 솟구쳐 오르는 감각.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그녀의 따스한 체온과, 코끝을 맴도는 달콤한 살냄새, 그리고 귓가를 점령해버린 ‘평생’이라는 단어가 뒤엉켜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미친나. 진짜. 이 여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뭐 있나. 그는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거칠고 서툰 행동 때문에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에 심장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 욕망 하나 제어하지 못해 사랑하는 여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이 순간이 평생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서툰 폭력마저도 사랑의 일부로 기꺼이 끌어안겠다는 듯이. 그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그는 천천히,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조심스럽고, 경건한 손길이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그는 뭉친 근육을 찾아 섬세하게 풀어주면서, 고개를 숙여 하얀 그녀의 등에 제 뺨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차가운 약 기운과 그녀의 따뜻한 살결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녀의 고른 숨소리와 제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

‘평생… 돌봐달라.’ 그는 입술을 달싹여 소리 없는 말을 엮어냈다. ‘웃기지 마라. 내가 니한테 평생 돌봄 받아야 하는 아인데. 내 색시가 내를 평생 돌봐줘야지.’ 겉으로 뱉지 못할 어리광이 속에서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돌보는 이 순간조차, 실은 그녀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존재가,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온기가, 언제나 자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폭풍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유일한 닻이었다. 자신이야말로, 그녀 없이는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애였다.

그는 그녀의 등에 뺨을 기댄 채, 나직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평생. 내 손으로 다 해줄 기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약 기운이 스며들도록 잠시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구급상자로 가, 이번에는 접착식 파스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엎드린 채 잠이 들 수도 있으니, 겔보다는 파스가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침대 옆에 앉아, 파스의 비닐을 벗겨냈다.

뒤척이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거 하나만 붙이자.

그는 가장 통증이 심해 보이는 허리 중앙에, 차가운 파스를 조심스럽게 붙여주었다. 파스가 피부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 위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눌러, 열기가 잘 전달되도록 했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는, 서툴지만 진심 어린 애정과 책임감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는 문득, 이제 정말 그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녀를 돌보고, 그녀에게 기대고, 그녀와 함께하는 이 일상이, 이제는 S급 센티넬로서의 사명보다 훨씬 더 중요해져 버렸다.

배는 안 고프나. 뭐라도 좀 묵어야 약 기운도 잘 받을 낀데.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물었다. 아직 저녁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뭐라도 간단하게 만들어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브리즈가 몸을 돌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여전히 잠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그는 또다시 모든 것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안 갈게. 옆에 있을게. 그러니까 그냥 자라, 좀. 내일 아침에 국밥 끓여준다며. 그거 묵을라면, 지금 푹 자둬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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