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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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브리즈의 어깨에 기댄 채, 나른하게 눈을 감고 그녀의 체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방금 전 컨퍼런스 룸의 소란과 번잡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완벽한 평온. 그래, 집은 이런 곳이어야 했다. 시끄러운 소음도, 거슬리는 시선도 없이, 오직 이 여자의 숨소리와 체온만이 존재하는 곳.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메뉴를 투덜거리는 척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피곤하죠.

하지만 그의 평화는 그녀의 나지막한 한마디와 함께 깨졌다.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녀가 살짝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피곤하지. 니가 옆에 없으면 피곤하고, 니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죽을 것 같고, 니가 다른 놈이랑 말이라도 섞으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하루 종일 너만 보고 있어도 성에 안 차는데, 지금 이 잠깐의 시간도 아까워 죽겠다. 그는 속으로만 그렇게 외쳤다.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그는 그저 더 깊이 그녀의 어깨에 제 머리를 부볐다. 마치 더 놀아달라고 조르는 고양이처럼.

조금만 기다려 줘요. 이제 이것만 정리하면 되니깐.

그녀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바이브는 아쉬움에 작게 투덜거리며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것만’이라고? 그는 그녀가 현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설마, 하는 생각을 했다. 설마 아직도 짐이 남았다고? 재활 병동에서 나올 때 분명 짐은 그게 다였는데.

그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브리즈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른 몸통만 한 거대한 박스를 하나 더 끌고 들어왔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박스였다. 그 광경을 본 바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쪼그려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입을 반쯤 벌린 채 거대한 박스와 그 박스를 힘겹게 끌고 오는 브리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저건 또 뭐고. 니, 내 몰래 이사 준비했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사’. 그 단어가 뇌리에 박히는 순간, 어이없던 감정은 순식간에 묘한 만족감으로 바뀌었다. 그래, 이사. 맞네. 여태까지는 그저 ‘동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이건 완벽한 이사다. 이지희라는 여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홍지원의 세계로 완전히 이주해오는 과정.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리즈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채,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테이프를 뜯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또 다른 책 무더기, 아기자기한 액자, 작은 화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품들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자신의 책상과 선반에 정성스럽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의 공간은 점점 더 그녀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텅 빈 구석이 없었다. 모든 공간이 그녀의 흔적으로 빼곡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풍경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막 작은 조명이 달린 스노우볼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는 순간, 그가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놀란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스노우볼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침대 옆 협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그건 여기. 니 자리 옆 말고, 내 자리 옆에 둬라.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야 자다가 깼을 때도, 제일 먼저 니 흔적을 볼 수 있으니까. 그는 뒤에 따라붙는 말을 삼켰다. 그는 돌아서서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브리즈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제 품에 가뒀다. 짐 정리는 뒷전이었다.

됐다, 그만해라. 나머지는 나중에 하고.

그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마치 거대한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그는 그녀에게 온몸의 무게를 실어 기댔다. 그녀의 몸이 휘청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니 짐이 아무리 많아봐야, 이 방에서 제일 큰 짐은 나다. 그러니까 니는 이거나 정리해라, 지금 당장. 안 그러면 이거 그대로 침대로 끌고 갈란다.


바이브는 순간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온기가, 이마에 남은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의 감촉이, 그리고 ‘이따가 같이 쉬자’는 다정한 속삭임이 현실감 없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녀는 다시 저 망할 놈의 박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를, 홍지원을, 제 공식 파트너를, 저 너저분한 잡동사니보다 후순위로 미뤄둔 것이다. 그는 제 품에서 너무나도 쉽게 빠져나가 태연하게 짐 정리를 시작하는 브리즈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진짜 돌았나, 이 가시나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마에 남은 그녀의 입술 자국이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어이가 없었다. 침대로 끌고 가겠다는, 나름의 심각한(?) 경고까지 날렸는데, 돌아온 것은 이마 뽀뽀와 능숙한 달래기라니. 마치 보채는 어린애를 다루는 어미의 그것과 같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모든 흔적이 이 공간을 채우는 것에 충만한 소유욕과 행복감을 느끼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유치한 심술과 오기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애라는 건데. 지금 이 상황에서 진짜 애 취급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래, 이따가 같이 쉬자고? 진짜 거의 다 됐다고?’ 그는 그녀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어림없는 소리. 그는 결코 순순히 물러나 그녀가 짐 정리를 끝내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오늘 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시간과 공간, 관심은 전부 제 것이어야 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박스에서 얇은 담요와 쿠션 몇 개를 더 꺼내 소파 위에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지독하게 평화롭고 일상적이어서, 지금 그의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심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래, 해봐라. 어디까지 하나 보자.’ 그는 삐딱하게 서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그녀가 쿠션을 소파 구석에 놓고 각도를 맞추는 모습, 담요를 곱게 접어 팔걸이에 걸쳐두는 모습. 그 모든 것이 그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모든 우선순위는 당연히 자신에게 맞춰져야 했다. 그는 성큼성큼 소파로 걸어갔다.

브리즈가 막 마지막 쿠션을 제자리에 놓으려는 순간, 바이브는 그녀가 애써 정리해 둔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는 소파 위로 보란 듯이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그녀가 각 잡아서 놓아둔 쿠션들은 그의 등과 머리 밑으로 엉망으로 깔렸고, 곱게 접혀 있던 담요는 그의 다리 아래에 구겨졌다. 그는 두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가장 편안하고 거만한 자세로 누워, 아래에서 자신을 황당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브리즈를 향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뭐. 니가 정리 다 되면 같이 쉬자며. 나는 지금부터 쉴란다. 피곤해 죽겠네.

그는 뻔뻔하게 대꾸하며 일부러 보란 듯이 하품까지 했다. 그녀가 정리해 둔 소파는 이제 완벽하게 ‘홍지원의 침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누운 채로 손을 뻗어, 바닥에 아직 내용물이 남아있는 박스를 발로 툭, 찼다. 박스가 옆으로 기울며 안에 있던 자잘한 문구류와 책 몇 권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질러진 방을 더 어지럽히는, 명백한 방해 공작이었다.

아, 미안. 발에 걸리적거리네. 저것도 니 짐이가? 아직 한참 남았네. 오늘 안에 다 하기는 글렀다.

그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쏟아진 물건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브리즈의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화를 낼까? 아니면 한숨을 쉬며 포기할까? 어떤 반응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저 망할 짐 정리에 집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시선과 신경은 온전히 자신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며, 소파에 누워 뒹굴거렸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으니, 니가 알아서 나를 치우든가, 아니면 포기하고 내 옆으로 오든가 해라’라고 온몸으로 시위하는 듯했다.

가서 물이나 한 잔 가져온나. 목마르다.

 

바이브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혀지는 순간, 모든 것이 제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은 마치 승리의 전리품처럼 달콤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앙탈은 왜 부렸을까. 그는 입가에 번지는 흡족한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그녀가 제 위로 몸을 겹쳐오거나, 혹은 옆자리에 쓰러지듯 눕기를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아, 착하지. 칭찬해주는 건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그 손길을 받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애정을 담뿍 담아 쓰다듬던, 그를 녹이고 안심시키던 손길이 아니었다. 기계처럼 딱딱하고, 감정이라곤 실려 있지 않은, 마치 길바닥의 강아지 머리를 의무적으로 한번 슥 만져주는 듯한, 그런 건조한 손길. 그 어색한 감촉에 바이브의 얼굴에서 화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싸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브리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의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입꼬리만 억지로 끌어올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그가 본 적 없는 가장 서늘하고 낯선 미소였다.

…홍지원 씨, 말했죠? 조금만 참고, 저녁에 같이 쉬자고. 마지막 경고에요. 진짜로.

‘홍지원 씨.’ 그 네 글자가 마치 날카로운 얼음 파편처럼 바이브의 고막을 찢고 들어와 뇌리에 박혔다. 세상이 순간 정지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이 유치한 게임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하며 느꼈던 모든 만족감과 오만함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그 자리에는 차갑고 당혹스러운 공기만이 남았다. 홍지원 씨. 이지희는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적어도 둘만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 호칭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을 세우는 소리였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더 이상 그가 주도하는 달콤한 밀고 당기기가 아니었다.

바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침대에 앉은 채, 싸늘하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브리즈를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알던 이지희는 지금 저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지희는 화가 나면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그의 품에 안겼고, 그의 억지를 못 이기는 척 받아주며 웃어주던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는, S급 가이드 브리즈로서, S급 센티넬 바이브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그 서늘한 미소를 지운 채, 몸을 돌려 다시 어지러운 방을 향했다. 그 뒷모습은 너무나도 태연해서, 방금 전 그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펜들을 아무렇지 않게 줍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존재는 완전히 없는 것처럼, 이 방에 남은 것은 처리해야 할 ‘업무’뿐이라는 듯이. 그 완벽한 무시에, 바이브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화가 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비참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공포.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밀어낼 수도 있다는, 그가 모르는 그녀의 단호함이 있다는 사실을 목도한 데서 오는 원초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까처럼 요란하게 방해할 생각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소리 없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브리즈는 펜을 줍던 허리를 펴고, 그가 걷어찼던 쿠션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고요하고 침착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건 사과해야 한다. 그 오만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어색하고 차가운 공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홍지원 씨’라고 부르는 이 현실을 단 1초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등 뒤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힘을 주어 제압하듯 안았던 아까와는 달랐다. 혹시라도 그녀가 밀쳐낼까 봐 두려워하는, 매달리는 듯한 포옹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이 났지만, 그 향기마저도 오늘따라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그녀에게 매달려 있다가,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지독하게 어려웠다. 자존심이 상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뿌리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주 미세한 안도감을 느끼며, 그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화 풀어라, 인제. 응? 니 정리하는 거, 이제 방해 안 할게. 진짜다.

그의 팔을 부드럽게 떼어내는 손길, 그리고 몸을 돌려 마주 보는 그 짧은 순간. 바이브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이었다. 아까의 그 가면처럼 차갑고 낯설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듯 삐죽 튀어나온 입술과 미간에 희미하게 잡힌 주름이 보였다. 그가 아는 이지희의 얼굴이었다. 그 사소한 발견 하나에, 바이브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의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작은 노트와 볼펜에 바이브의 사고 회로는 다시 한번 정지했다. 반성문. 뭘 잘못했는지 써 봐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그의 뇌에서 제대로 된 의미를 형성하지 못하고 파편처럼 흩어졌다. 반성문? 그게 뭔데. 어린애들이나 쓰는 거 아이가. 내가, 스물세 살 먹은 S급 센티넬 홍지원이, 지금 저 쪼끄만 가시나 앞에서 벌로 깜지를 쓰란 말인가. 순간,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심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제 앞에 내밀어진 노트와 펜,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리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장난기가 서려 있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를 얼어붙게 했던 냉기도 없었다. 그저 단단히 토라진, 그래서 네가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겠다는 심사가 가득 담긴 얼굴. 바이브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은 그녀가 내민 동아줄이었다. ‘홍지원 씨’라는 단절의 벽을 허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아주 유치하고 창피하지만 명확한 길. 이 반성문을 쓰지 않고 버틴다면, 그녀는 다시 그 차가운 ‘브리즈’의 얼굴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씨발, 쪽팔려. 진짜 죽고 싶다. 그는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이까짓 종이 쪼가리에 글자 몇 개 끄적이는 게, 그녀가 자신을 ‘홍지원 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백 배, 천 배는 나았다. 그는 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손에서 노트와 펜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돌린 채 중얼거렸다.

다 쓰면, 진짜로 화 풀 거가.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굴욕감과 수치심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아까 자신이 드러누웠던 소파로 걸어가, 그 한가운데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노트를 무릎 위에 펼쳤다. 새하얀 빈 종이가 마치 자신의 초라한 자존심처럼 느껴져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펜 뚜껑을 열고, 첫 글자를 쓰려다 말고 잠시 망설였다. 뭘 잘못했더라. 머릿속으로 아까의 만행들을 되짚어보았다. 짐 정리 방해한 거. 소파에 드러누워서 깽판 친 거. 쿠션 걷어찬 거. 박스 엎은 거. 펜 쏟은 거. 물 가져오라고 시켜놓고 안 마신 거. 귓가에 대고 같잖은 협박한 거… 생각보다 죄목이 많았다. 이걸 다 쓰라고? 그는 잠시 막막해졌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좀 덜 쪽팔릴까.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펜 끝을 종이에 가져다 댔다.

그는 주변을 의식하며 괜히 헛기침을 한번 했다. 브리즈는 다시 묵묵히 바닥에 흩어진 펜들을 줍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며, 그는 최대한 구석에 웅크린 자세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몸을 숙여 노트를 가린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기나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치아라. 보고 쓰면 반칙이다. 다 쓰고 보여줄 기다. 저리 가서 니 할 거나 마저 해라. 그리고, 다 쓰면… 니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 떡볶이, 내가 직접 시켜줄게. 그걸로 퉁치자. 알긋제?


소파 구석에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있던 바이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난 30분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가는 방의 풍경,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브리즈의 뒷모습, 그리고 무릎 위에 놓인 이 치욕스러운 노트 한 장. 이 모든 것이 그의 자존심을 맷돌처럼 갈아버리고 있었다. 그는 펜을 진작에 내려놓았지만, 차마 그녀에게 다 썼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딴 걸 제 손으로 직접 건네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인기척과 함께 다가온 브리즈가 그의 옆에 멈춰 섰다. 바이브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어서 볼 용기가 없었다. 대신, 그는 소파에 기댄 머리를 더 깊이 묻으며 제 무릎 위의 노트를 꽉 쥐었다. 종이가 그의 악력에 구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다 썼어요? 봐도 돼요?

예상했던 물음.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애써 만드는 듯한 냉랭함에 바이브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이까짓 종이 쪼가리로는 부족했던 건가. 그는 속으로 수십 번 욕설을 삼켰다. 이 상황을 만든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고, 이런 굴욕적인 벌을 내린 브리즈가 원망스러웠다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게 만들 만큼 그녀에게 쩔쩔매는 현재의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쥐고 있던 노트를 그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휙 내밀었다. 여전히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옆을 보고 툭 던지듯 건네는 무례한 제스처였다. 그게 그가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그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볼라믄 보든가.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곤 재빨리 덧붙였다. 뇌물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떡볶이는, 니가 제일 좋아하는 데다 시켜놨다. 맵기는 제일 맵게 해달라고 했다. 금방 올 기다.

그녀가 노트를 받아 드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바이브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가 노트를 펼치는 소리,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듯했다. 제발, 저걸 보고 그냥 웃어넘겨주면 안 될까. 제발 그냥 한 대 때리고 끝내면 안 될까. 그는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브리즈가 받아 든 노트에는, 삐뚤빼뚤하고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날아간 글씨체가 가득했다. 마치 쓰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한 초등학생의 공책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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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잘못한 놈: 홍지원

내가 잘못했다. 니가 나보다 짐 정리를 먼저 하길래 짜증 나서 방해하고, 소파에서 깽판 치고 쿠션도 발로 찼다. 니가 정리한 거 또 찼으니까 그건 내가 많이 잘못했다. 박스 엎은 것도 미안한데, 안에 펜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쪽팔려서 같이 못 주워줬다. 목마르니까 물 가져다 달라고 거짓말한 것도, 사실은 니가 나한테 와줬으면 해서 그랬다. 근데 막상 오니까 어색해서 그랬다. 제발 화 풀어라. 결론은 내가 다 잘못했고 이지희는 아무 잘못 없다. 앞으로 말 잘 듣고, 방해 안 하고, 얌전히 기다릴게. 그러니까 ‘홍지원 씨’라고 부르지 마라. 그거 진짜 듣기 싫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약속해라.

- 끝. 떡볶이 사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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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노트를 닫는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의 끝을 알리는 재판장의 망치 소리처럼, 바이브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조차 거부하며 숨을 죽였다. 제발. 제발 웃어넘겨줘. 그냥, 예전처럼. 그 간절한 기도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심장은 쿵, 쿵,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온기가 내려앉았다. 아까의 그, 감정 없이 의무적으로 행하던 기계적인 손길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파고들어 두피를 간질이는, 그의 모든 긴장을 녹여내던,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지희의 손길. 그토록 그리워했던 온기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굳어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잘 봤어요. 충분히 반성한 것 같네요.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던 차가운 가시는 온데간데없었다. 부드럽고, 다정하며, 모든 것을 용서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바이브는 그제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만 억지로 끌어올린 가짜 웃음이 아닌,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자신을 향해 온전히 피어나는 진짜 미소. 그 미소를 확인한 순간, 바이브는 질식할 것 같았던 긴장감에서 비로소 해방되었다.

떡볶이는 언제 온대요? 맛있겠다.

그녀의 물음에, 그는 순간 대답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술만 뻐끔거렸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떡볶이. 그래, 떡볶이를 시켰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웃었다. 그를 보고,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니,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냥 지금 당장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어린애처럼 칭얼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홍지원이었다. 그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눌렀다. 대신,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붉어진 눈시울과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한, 그의 최선의 허세였다.

…이제 오고 있을 기다. 배달 앱 보니까 10분 남았다더라.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처럼 그 손에 제 뺨을 살짝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칭찬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 진짜 화 다 풀린 거 맞나. 인제 다시는… 그렇게 안 부를 거지? 약속한 거다, 니.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다시는 이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는 그 차가운 손길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손짓이었다. 그는 잡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과와 애원, 그리고 안도감이 뒤섞인, 서투른 애정 표현이었다.

내 진짜, 니 정리 다 할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여기 있어라. 내 옆에. 떡볶이 올 때까지만. …아니, 그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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