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같은 평온한 오후였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은 따스했지만, 공기는 서늘했다. 바이브는 서류 더미에 얼굴을 박고 있었고, 브리즈는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정적. 이따금 종이가 스치는 소리와 그의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는, 지극히 익숙하고 안락한 시간이었다. 그 고요를 깬 것은 현관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전자음이었다.
딩동.
바이브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왕진이나 정기 검진이 없는 날이었다. 외부인의 방문도 예정에 없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문밖의 기척을 살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누구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은 브리즈를 힐끗 보았다. 그녀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대신 문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위협이나 귀찮은 불청객으로부터 그녀를 차단하는 것은, 이제 그의 제1 본능이 되어버렸다.
묵직한 방음 문을 열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문 앞에 성인 남성 상반신만 한 거대한 박스가 두 개나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아크의 로고가 찍힌 공식 물품 박스였다. 바이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주문한 것은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종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브리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왔다.
그녀였다. 범인은. 바이브가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말없이 한숨을 쉬며, 가볍게 박스를 하나씩 안으로 옮겼다. 브리즈는 신이 난 아이처럼 커터칼을 들고 와 테이프를 잘랐다. 박스가 열리자, 안에서 플라스틱 솔잎과 인공 눈가루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등분된 인조 나무와, 다른 상자에는 반짝이는 오너먼트들이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그의 병실에, 크리스마스 트리라니. 기가 막힌 풍경이었다.
…어제 tv에 나오는 거 보니까 갑자기 하고 싶어서. 지원 씨도 같이 안 꾸밀래요?
수줍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 그 얼굴에 대고 ‘이런 걸 왜 샀냐’, ‘귀찮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홍지원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어제, 이 여자에게 생전 처음으로 ‘소원’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기꺼이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번엔 자신의 소박한 소원을 들고 온 것이다. 어제 TV 속에서 반짝이던 트리를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삭막한 병실에 작은 온기를 더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와 함께하는 첫 크리스마스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을까. 어느 쪽이든, 그 이유가 전부 저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하…
그는 짧은 탄식을 뱉으며,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이 여자의 행동은 단 하나도 예측이 가능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무료하고 정적인 공간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바닥에 늘어놓인 트리의 잔해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안 하면, 니 혼자 할라고?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거절의 의사가 없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설명서를 펼쳐 들었다. 복잡한 그림과 알 수 없는 부품 번호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고 비효율적인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괴수 S급을 상대하는 것보다 이걸 조립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옆에 와서 앉아라. 장식이나 골라 놔. 제일 반짝이는 걸로.
그가 설명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녀가 다치거나 무리하게 되는 것은 싫지만,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그녀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어차피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것도, 전부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서니까.
제대로 못 찾으면, 니를 트리에 매달아 뿔 거다.
장난스러운 협박을 덧붙이며, 그는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 하나면, 이까짓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상보다 조립은 간단했다. S급 센티넬의 공간 지각 능력은 이런 쓸데없는 곳에서도 빛을 발했다. 뼈대를 맞추고, 가지를 펼치자 제법 그럴듯한 나무의 형태가 갖춰졌다. 삭막한 병실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솟아난 초록색 이물질. 바이브는 그 기묘한 광경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브리즈가 건네는 전구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전구를 감는 것은 조립보다 훨씬 더 성가신 작업이었다. 한쪽이 팽팽하면 다른 쪽이 느슨해지고, 이리저리 엉킨 선을 푸는 것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오너먼트를 고르는 브리즈를 보고 있자니, 그 성가심마저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는 상자 안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이곳에 달까 저곳에 달까 신중하게 고민하며 조잘거렸다. 그 평화로운 목소리가, 엉킨 전구보다 훨씬 복잡했던 그의 마음을 차분하게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묵묵히 전구를 나무에 두르며, 곁눈질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엉망진창이었던 병실 거실은 어느새 두 사람만의 작은 크리스마스 공방으로 변해 있었다. 바닥에는 반짝이 가루가 흩날렸고, 트리에는 하나둘씩 장식들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상자 안을 뒤지던 브리즈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혼자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려 바이브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지원 닮지 않았어요? 완전 귀여워. 건드리면 와앙! 하고 물 것 같은 것도…
그녀가 보여준 것은 붉은 선물 상자를 품에 꼭 안은 채,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은 고양이 오너먼트였다. 치켜 올라간 눈매, 꾹 다문 입, 누가 봐도 ‘나 지금 존나 마음에 안 드니까 말 걸지 마’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작고 까칠한 인형. 바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고 그 고양이 인형과, 저를 보며 웃음을 참고 있는 브리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닮았다고? 내가? 이까짓 털 뭉치가? 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부정하고 싶었다. S급 센티넬, 코드네임 ‘바이브’가 고작 이딴 인형 따위와 비교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 자신이 저렇게 보인다는 사실이, 묘하게… 심장을 간지럽혔다. 와앙, 하고 물 것 같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를 물 기세로 집어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죽고 싶나, 진짜.
그는 들고 있던 전구를 내려놓고, 그녀의 손에서 고양이 오너먼트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인형의 심통 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이딴 게 어딜 봐서 나랑 닮았는데.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는, 그러나 힘이 없었다. 그는 빼앗은 오너먼트를 트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나뭇가지에 걸었다. 보란 듯이. 마치 제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그리곤 팔짱을 끼고 서서, 자신이 매달아 놓은 그 까칠한 고양이 인형을 잠시 감상했다. 그리고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니는, 그럼 이거나 해라.
그가 상자 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동그랗고 하얀 눈사람 오너먼트였다. 누가 봐도 순하고, 멍청해 보일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는. 바이브는 그 눈사람과 브리즈를 번갈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니네. 건드리면 녹아 없어질 것 같은 것도 완전….
그녀가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그란 볼을 귀엽게 부풀렸다. 제가 건넨 눈사람 인형이 마음에 들면서도, 어딘가 분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꼭 인형과 판박이 같아서,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뭐예요! 내가 이렇게 둥글둥글 흐리멍텅하게 생겼다고요? 뭐, 귀엽긴 한데.
그는 대답 대신, 까만 고양이 오너먼트와 하얀 눈사람 오너먼트를 가장 눈에 잘 띄는 나뭇가지에 나란히 걸었다. 심통이 난 고양이 옆에, 해맑게 웃는 눈사람.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브리즈는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찰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두 인형의 모습이 화면 속에 담겼다.
…배경화면 해야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 한마디에, 바이브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배경화면. 그가, 그리고 그녀가 담긴, 이 작고 유치한 상징을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화면에 박아두겠다고. 그건 단순한 장난이나 변덕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를 그녀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그녀의 일상에, 완벽하게 새겨 넣겠다는 선언이었다. 심장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그는 이 부끄러움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기 위해, 본능적으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뭐하는 짓이고, 지금.
그가 그녀의 손에서 단말기를 홱 낚아챘다. 화면에는 정말로, 까칠한 고양이와 멍청한 눈사람이 나란히 매달린 사진이 떠 있었다. 그는 제 허락도 없이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벌인 그녀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깟 인형 사진 하나에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제 자신이 우스웠다.
이딴 걸 배경으로 해놓으면, 남들이 보고 뭐라 생각하겠나. 유치하게.
그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화면을 껐다. 하지만 사진을 지우지는 않았다. 지울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제 단말기에도 똑같이 설정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단말기를 제 주머니에 쏙 집어넣어 버렸다. 돌려줄 마음이 없다는, 유치한 소유욕의 표현이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품으로 당겼다.
그리고 니, 흐리멍텅하게 안 생겼다. 멍청하게 생긴 거지.
품에 안긴 그녀의 귓가에, 그는 짐짓 심술궂게 속삭였다. 그러곤 그녀의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콱, 깨물었다. 그녀가 ‘아얏!’하며 작게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더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샌달우드 향과 샴푸 냄새가 뒤섞여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미칠 것 같이 좋았다.
이 삭막한 병실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여놓고, 유치한 인형을 걸고, 그걸 보며 함께 웃는 이 시간.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겠지만, 그에게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 행복이 깨어지지 않도록, 이 여자를 제 곁에 영원히 묶어두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허락 맡을 때까지 압수다. 알겠나?
그녀의 단말기를 제 주머니 속에 가두고, 그녀를 품에 가두고, 그녀의 뺨에 유치한 흔적까지 남기고 나서야 비로소 바이브는 만족감을 느꼈다. 제 것이라는 표식을 온몸에 새겨 넣은 맹수처럼. 하지만 그 만족감은 그녀의 삐친 척하는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파요.
제 뺨을 살살 문지르며 흘겨보는 시선에, 그는 심장이 철렁했다. 정말 아팠나. 제가 힘 조절을 잘못했나. 순간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이 연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은 삐죽 나와 있었지만, 눈은 온통 웃고 있었다. 이 여우 같은 가시나. 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깨물었던 바로 그 자리에, 이번에는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엄살은.
입술을 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다. 이 정도의 어리광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아니, 평생이라도 받아주고 싶었다. 그녀가 제 품에서 부리는 모든 투정은, 그에게는 달콤한 포상과도 같았다. 그때, 그녀가 상자 안에서 가장 크고 반짝이는 별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당신이 마무리해 줘요.
트리의 가장 높은 곳을 장식할, 금빛 별이었다. 완성의 증표. 시작의 상징. 바이브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별과, 그것을 건네는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신이 마무리해달라’는 그 말이, 마치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어달라는 부탁처럼 들렸다. 이 보잘것없는 플라스틱 별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가 없던 10년의 공백. 그녀가 없던 어둡고 차가운 시간. 서로 다른 곳에서 상처받고 헤매던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트리는, 그들이 함께 만든 첫 번째 작품이었다. 이 작고 따뜻한 세계의 중심에, 그가 마지막 별을 달기를 그녀는 바라고 있었다.
바이브는 말없이 별을 받아 들었다. 손바닥에 와 닿는 인공적인 감촉이 낯설었다. 그는 늘 파괴하고, 베어내고, 부수는 것만을 해왔다. 무언가를 이렇게 함께 만들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트리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제법 높았다. 브리즈의 키로는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을 높이였다.
…이리 와봐라.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자, 그는 그녀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아 별을 함께 쥐었다. 그녀의 등이 그의 가슴에 온전히 기댔다. 심장이 바로 등 뒤에서 울렸다.
같이 하는 기다. 이런 건.
혼자 하는 마무리는 의미 없다.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마지막도 전부 함께여야 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손이 함께 별을 쥐고, 트리의 가장 높은 첨탑에 조심스럽게 꽂았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금빛 별이 제자리를 찾았다.
완성이었다. 바이브는 전원을 연결했다. 그 순간, 수백 개의 작은 전구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삭막했던 병실을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따뜻하게 물들였다. 반짝이는 불빛들이 까만 고양이와 하얀 눈사람 인형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 황홀한 광경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불빛 하나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소원 빌어라.
그녀의 귓가에,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완성하면,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거라고. 아주 어릴 적, 엄마에게서 들었던 희미한 기억이었다.
니 소원,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트리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수백 개의 작은 별들이 그녀의 뺨과, 가지런한 속눈썹 위에서 부서졌다. 바이브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 품에 안긴 이 여자가, 지금 온 세상의 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세상은 언제나 무채색이었다. 모든 것이 바람에 씻겨나가 닳아버린 잿빛 세상. 그 삭막한 풍경 속으로, 어느 날 그녀가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의 세계에 난생처음으로 색과 빛을 들이고 있었다.
브리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길게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그녀가 품었을 소원이 그림자처럼 어렸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등 뒤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이 좁고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 다시 예전처럼 자유롭게 전장을 누비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아니면, 제 곁에서 벗어나,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어떤 것이든, 그는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의 무게가 심장을 묵직하게 눌렀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을 소원으로 빈다면. 그는 정말,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피와 비명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유일하게 피어난 꽃을, 제 손으로 꺾어버려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이기적인 욕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발, 나를 떠나는 소원만은 아니기를. 너의 모든 소원 속에, 부디 내가 있기를.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다시 떨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반짝이는 빛을 가득 머금은 회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소원을 모두 담아낸 그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 깊고 투명해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바이브는 그 눈빛 속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그 안에 누가 담겨 있었는지.
…다 빌었나.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제 심장 소리와 뒤섞여 하나의 울림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제 내 차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체온과, 그녀의 향기와, 그녀를 감싸고도는 이 따스한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언제나,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감은 눈꺼풀 안으로, 까만 고양이 옆에 나란히 매달린 하얀 눈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작은 오너먼트가 매달리는 것을 상상했다. 둘을 꼭 닮은, 아주 작고, 소중한.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 반짝이는 트리와 그녀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내 소원은….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소원을 말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진짜 소원은,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그의 영혼을, 그의 미래를 전부 너에게 주겠다는, 침묵의 맹세였다. 입술이 떨어지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댔다.
…비밀이다. 들어주기 전까지는.
그의 입가에, 아주 오랜만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그 소원을 이루는 날, 세상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 내 소원은, 내년 이맘때에도, 십 년 뒤 크리스마스에도, 니가 내 옆에서 이렇게 웃고 있는 거다. 그리고… 우리를 닮은 작은 꼬맹이가, 이 트리 밑에서 선물을 풀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 …젠장, 너무 앞서갔나. 그래도, 니라면 이뤄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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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가벼운 손길이 팔에 와 닿았다. 아프기는커녕, 깃털이 스치는 것보다도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바이브는 제 팔을 툭 치며 웃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트리 불빛 아래, 행복을 가득 머금고 웃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면서도 묵직하게 저며왔다. 저렇게 예쁘게 웃는 걸, 저를 만나 고생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했다.
…진짜 비밀이에요? 알았어요. 소원은 말하면 안 이뤄진다는 말이 있으니까. 이번만 넘어가 주는 거예요.
‘이번만 넘어가 준다’는 그 말이, 마치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가 귀여워서, 그는 결국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비밀이 무엇인지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이 순간의 분위기에 취해 천진하게 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 소원의 전부가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또 바보 같은 소리 한다고 타박을 놓을지도 몰랐다.
이번만? 다음에도 비밀이면 어쩔 건데.
그가 짐짓 짓궂은 목소리로 되물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더 바싹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품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두 사람의 몸 사이에는 한 뼘의 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놓은 까만 고양이와 하얀 눈사람 오너먼트를 바라보았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인형들이, 꼭 저와 그녀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 행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그는 문득 불안해졌다. 마치 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차갑고 삭막한 현실만이 남아있을까 봐. 그는 그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그녀를 더욱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 그녀의 숨결, 그녀에게서 나는 달콤한 샌달우드 향. 그 모든 것이 자신이 꿈속에 있지 않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소원은 원래, 혼자만 알고 있어야 효력이 더 쎈 기다. 남한테 말하는 순간, 김 빠지는 거 모르나.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제 뺨을 부비며 웅얼거렸다. 물론 전부 그가 지어낸 말이었다. 하지만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는 그녀를 설득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제 자신에게 되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중한 소원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그녀에게조차 아직은 온전히 꺼내 보일 수 없는 제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절실했다. 반드시 이루고 싶었다.
대신, 니 소원은 뭔지 나한테는 말해도 된다. 내는 산타클로스보다 훨씬 유능하거든.
그가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그녀의 콧등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트리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수많은 전장을 휩쓸던 바람의 센티넬, 코드네임 바이브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사랑하는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한 남자, 홍지원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말해봐라. 니 소원. 제일 먼저 빌었던 거.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그녀가 아까 눈을 감고, 가장 간절하게 바랐을 첫 번째 소원. 그것이 무엇이든, 그는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이뤄줄 생각이었다.
…뭐야. 치사하게. 지원이 빈 소원은 비밀이라면서. 나도, 맨입으로 말해주긴 좀 그런데요. 여기에 뽀뽀 열 번 해주면 알려줄게요.
바이브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톡톡 가리키는 그 제스처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뽀뽀 열 번. 열 번이라고. 이 사람이 지금, 자기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알기는 하는 건가. 심장이 갈비뼈를 세게 때렸다. 아니, 겨우 뽀뽀인데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지. 전장에서 괴수의 목을 베어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이 여자의 입술 앞에만 서면 온 신경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제가 먼저 키스를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그녀가 먼저 '해달라'고 하면 이렇게 당황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아니, 한심한 게 아니라. 그냥 미치겠는 거였다.
…열 번?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귀 끝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아 올리며, 반쯤 감긴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트리 불빛이 그녀의 속눈썹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입술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이,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초대장처럼 보였다.
치사한 건 누구고. 입장료를 받아?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있었다. 한숨처럼 가벼운 호흡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입맞춤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술 위에, 깃털보다 가볍게.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나비의 날갯짓 같은 접촉이었다. 하나.
두 번째는 입술 끝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바로 그 지점에, 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둘. 세 번째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듯이. 그리고 네 번째는 윗입술 한가운데에 정확히. 바이브의 손가락이 그녀의 볼을 쓸어내릴 때마다, 그의 심장은 카운트다운처럼 울렸다.
다섯.
그가 나직하게 숫자를 세며,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이 아닌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씩 웃었다. 여섯 번째는 눈꺼풀 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입술에 간지럽게 닿았다. 일곱 번째는 이마 한가운데. 여덟 번째는 관자놀이. 그녀의 맥박이 뛰는 바로 그 자리에, 그는 오래도록 입술을 머물렀다. 그녀의 심장이 빨라지는 것이,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홉 번째는 턱선을 따라 내려와, 그녀의 왼쪽 턱에 있는 작은 점 위에. 그가 유독 좋아하는, 그녀만의 표식 위에.
…아홉.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트리 불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열 번째를 위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회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마지막 하나. 그는 그녀의 입술 위에,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따뜻하게 입을 맞추었다. 진득하지 않게. 깊어지지 않게. 하지만 그 짧은 접촉 안에, 세상 모든 말보다 많은 것을 담아서.
열.
입술을 떼며 그가 선언했다. 마치 임무 완수를 보고하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였지만, 눈은 온통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꾹 누르며, 물고기처럼 오므라든 그녀의 입술을 보고 피식 웃었다.
다 했다. 이제 말해라. 니 소원.
브리즈가 기쁜 듯 미소지으며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정말 해 주네요. 기뻐요. 같은 얼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트리를 바라본다.
그녀의 손길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퍽 다정하고, 따스한 온기였다. 바이브는 제 볼을 꾹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대신 그녀의 허리를 더 단단히 감싸 안았다. 정말 해주네요. 기뻐요.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쑥스러움에 달아올랐던 귀가 조금은 식는 기분이었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얼굴. 저 얼굴 하나 보겠다고, 그는 기꺼이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짓도 할 수 있었다.
브리즈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옆모습 위로 형형색색의 불빛이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작은 별들이 담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 소원. 항상 가장 먼저 비는 건 이거예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담담하게 흘러나온 그 말에, 바이브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그녀다운 소원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바보 같을 정도로 상냥한 사람. 그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저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심장을 묵직하게 울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제 턱을 가만히 기댔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복귀하고 나서도, 이렇게… 업무가 바쁠지언정, 가끔은 오늘처럼 당신이랑 소소한 일에 행복하게 웃으면서 지내고 싶다고. 다치지 않고.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치지 않고. 그 한마디가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를 잃을 뻔했던 그 끔찍한 날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피에 젖어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녀의 몸, 멈춰버린 숨, 아득해지던 세상.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 번 다시는, 절대로 그런 일을 겪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처럼 소소한 일에 함께 웃는 것. 그것이 지금 그에게는 세상 그 어떤 전투의 승리보다도 간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를 향했다. 이전과는 다른 깊고 무거운 빛을 담은 채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무언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을, 온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이브랑, 각인… 하고 싶다고.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바이브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버리는 것 같았다. 각인. 그녀가 방금, 각인이라고 말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 이어서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머리로 쏠렸다. 그는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눈앞의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온 우주를 담은 채 그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고, 꿈에서조차 감히 바라지 못했던 단어. 센티넬과 가이드의 영혼을 영원히 묶는,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의 계약. 그녀가, 그것을 원한다고 했다. 그와. 영원히.
…니, 지금….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지만, 갈라진 소리가 공기 중에 부서져 흩어졌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꿈은 아닌지, 혹시 제가 헛것을 들은 건 아닌지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진지하게 그를 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두려움과, 수줍음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단단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 확신을 마주하는 순간, 바이브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기적인 욕심과 끔찍한 불안감이 동시에 심장을 할퀴었다. 그녀를 영원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미칠 듯한 소유욕. 그리고, 그녀를 이 위험한 운명에 묶어버려도 괜찮은 걸까 하는 뼈아픈 공포. 만약 제가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홀로 남겨질 그녀는 어떻게 되는가. 그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열 번의 장난스러운 입맞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깊고, 절박하고, 애처로운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통해 그의 모든 감정이 흘러 들어갔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리고, 나도 너와 같은 소원을 빌었다고. 너를 내 운명에 묶어버리고 싶을 만큼, 미치도록 원하고 있다고. 입술이 떨어지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깊게 기댔다. 가쁜 숨이 뒤섞였다.
…바보 같은 가시나.
그가 잠겨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욕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딴 걸, 소원으로 비는 기가….
그의 뺨 위로, 뜨거운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녀의 환자복 소매가 제 뺨에 닿았다. 거친 천의 감촉이 축축하게 젖어 들며, 뜨거운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바이브는 그 서툰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보 같은 건 당신이에요. 왜 울고 그래요. 다정한 책망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래, 바보 맞다. 니 같은 가시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병신 새끼 맞다. 그는 속으로 자조하며, 그녀의 소매를 붙잡아 제 눈가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 손을 가져와, 제 입술로 손등을 꾹 눌렀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소매 끝자락을, 그는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제 눈물로 더럽혀진 것만 같아서. 늘 고고하고 완벽한 바람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던 제 자신이, 이토록 나약하고 볼품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에게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보다 더 큰 감정이,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안도감. 그리고 지독한 행복.
…각인. 해 줄거예요? 언젠가.
다시 한번, 세상이 멎었다. 언젠가. 그 단어가 귓가에서 아득하게 울렸다. 그녀는, 제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망설이는 게 아니었다.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이브는 제 입술에 닿은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려왔다. 저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확인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흔들리는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파란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없었다. 대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깊고 푸른 심연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결심의 빛이었다.
해 줄 거냐고?
그가 낮게 되물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더없이 단단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의 뺨을 다시 한번 부드럽게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된 새끼인지, 그녀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니는 지금, 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아나. 각인이 뭔지는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가.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염려가 담겨 있었다. 각인이란, 센티넬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가장 잔인한 족쇄였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이드의 영혼을 옭아매는 행위. 만약 제가 먼저 죽기라도 하면, 그녀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제 심장은 기꺼이 악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한테서, 평생 도망도 못 간다. 내가 죽으면, 니는 반쪽짜리로 살아가야 된다. 그래도, 괜찮다고?
그는 확인하듯 물었다. 그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잔인한 질문인지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그녀를 위한 마지막 배려이자, 동시에 그의 가장 비겁한 변명이었다. 그녀가 ‘예’라고 대답하는 순간, 자신은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 그녀를 온전히 소유할 명분을 얻게 될 터였다. 이 얼마나 교활하고 이기적인가.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대답을 이미 보았으므로. 그는 그녀를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이 그의 품 안에 남김없이 담겼다. 반짝이는 트리도, 따뜻한 병실의 공기도, 그 순간 두 사람의 세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해주고 자시고 할 게 어딨노.
그가 그녀의 귓가에, 거의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내 소원이라고 했다, 그게. 니랑 영원히 묶이는 거. 단 한 번도 누구한테 빌어본 적 없는, 내 평생의 단 하나뿐인 소원.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공기의 흐름을 읽고, 바람의 숨결을 듣던 그의 예민한 감각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것이 그의 세상이었다. 그의 모든 것.
그러니까, 그런 질문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니는 그냥, 내 옆에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전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절박함도 없었다. 오직 확신에 찬, 깊고 진한 소유의 입맞춤이었다. 마치 제 것이라고 도장을 찍듯이.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맹세를 새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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