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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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바이브는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잠시 동작을 멈췄다. 제안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녀가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며 구체적인 메뉴까지 콕 집어 말할 줄은 몰랐다. 항상 제게 맞춰주고, 먼저 배려하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아주 사소하지만 명확한 ‘요구’를 했다. 그 사실이 낯설면서도, 심장 한구석을 간질이는 이상한 만족감을 주었다.

‘…카레. 감자 많이. 맵게.’

그는 머릿속으로 세 단어를 되뇌었다. 간단한 주문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요리. 해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아크에 들어온 이후로는 줄곧 정해진 식사를 받아먹었고, 그 이전에는…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었다. 가족들이 북적이는 부엌에서 어깨너머로 본 기억은 있지만,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본 경험은 전무했다.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 같았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맛이 없으면. 혹시라도 태우기라도 하면.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작은 성공에 한껏 들떠있고, 그런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데. 그 기대를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전장에서 수천 번의 생사를 넘나들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이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기대감에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브리즈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방 수납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재료부터 찾아야 했다. 카레 가루, 감자, 양파, 당근… 다행히도 S급 요원에게 지급되는 병동의 식료품 저장고는 웬만한 마트 수준으로 풍족했다. 그는 감자 두어 개와 양파를 꺼내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맵게 묵다가 또 혀 데이지나 마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그의 미숙함과 긴장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그는 칼을 집어 들었다. 평생 사람을 베는 바람의 칼날만 다뤄왔던 손으로, 생전 처음 감자의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생각보다 손이 떨렸다. 마치 폭탄 해체라도 하는 듯, 그의 모든 신경이 칼끝과 감자의 표면에 집중되었다.

‘등신이가, 홍지원. 이게 뭐라고 이래 긴장하고 있노.’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그의 손길은 지극히 신중하고 꼼꼼했다. 그의 능력 특성상, 그는 본래 극도로 섬세한 감각과 제어력의 소유자였다. 비록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그는 금세 감을 잡기 시작했다. 감자 껍질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져 나선형으로 벗겨져 나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집중하며, 꽤나 그럴듯하게 껍질을 벗겨낸 감자를 보며 희미한 성취감을 느꼈다. 그는 힐끗, 브리즈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여전히 저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괜히 더 잘하고 싶은 유치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오래 걸리니까 저기 가서 TV나 보고 있어라.

그렇게 쏘아붙인 그는, 다시 도마 위로 시선을 돌렸다. 감자를 깍둑썰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과 크기로 잘려나가는 감자를 보며, 그는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래, 별거 아니었다.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그가 만들어주는 것. 그뿐이었다. 그는 매운맛을 내기 위해 찬장에서 베트남 고추가 담긴 작은 병을 찾아냈다. 그녀의 말대로, 아주 맵게.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러면서도 맛있다고 웃으며 먹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물이나 한 잔 갖다 줄까.

요리에 집중하는 척하며, 툭 던지듯 물었다. 그녀가 괜찮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컵에 시원한 물을 따라 그녀가 앉은 소파 옆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눈이 매워지는 것 따위는, 지금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낯간지러운 사랑의 속삭임은 희미한 배경음악이 되었다. 바이브의 세상은 오직 가로세로 3미터 남짓한 이 작은 주방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공기의 미세한 흐름을 읽고, 진동을 포착해 적의 위치를 파악하던 S급 센티넬 '바이브'는 지금, 인생 최대의 적수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하얗고 둥근 양파였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다. 감자 껍질을 성공적으로 벗겨냈을 때의 그 작은 성취감은 '요리 따위 별거 아니군'이라는 오만한 착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감자를 썰던 그 기세 그대로 양파를 도마 위에 올리고, 능숙한 척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썰기 시작했다. 탁, 탁, 탁… 규칙적이던 칼질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미묘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마치 최루탄이 터진 전장 한복판에 떨어진 것처럼,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지독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씨발, 이거 뭐고.’

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삼켰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넘어 따끔거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건 물리적인 공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방어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속수무책의 화학 공격. 그는 이를 악물고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본능적인 생리 현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새파란 눈에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하필이면 도마 위에. 망할.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거실을 훔쳐보았다. 다행히 브리즈는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들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저런 유치한 걸 대체 왜 보나 싶으면서도, 지금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지독한 안도감을 느꼈다. S급 센티넬 바이브가, 고작 양파 따위에게 패배해 눈물을 질질 짜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는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이미 터져 나온 눈물샘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 할 일을 계속했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킁, 코를 훌쩍였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거, 감각으로 썰면 된다. 그는 눈을 감았다. 공기 중에 퍼져나가는 양파의 분자 구조와, 칼날이 양파의 섬유질을 가르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며 칼질을 계속했다. 탁, 탁, 탁. 오히려 눈을 감으니 칼질은 더 정확하고 빨라졌다. 그래, 이거다. 역시 난 천재다. 그는 속으로 유치한 자기만족에 빠졌다.

양파와의 사투를 끝낸 그는 냄비에 기름을 둘렀다. 썰어놓은 채소를 볶기 시작하자, 매캐했던 양파 냄새 대신 고소한 향이 주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한숨 돌리며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감자, 당근, 양파. 그가 썰었지만 꽤 그럴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다시 한번 슬쩍 거실을 쳐다보았다. 브리즈는 여전히 TV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냄비를 젓는 주걱을 일부러 '달그락' 소리가 나게 움직였다. 나 지금 요리하고 있다, 아주 잘. 그런 무언의 시위였다.

…저딴 게 재밌나.

누가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현실에서 저러면 그냥 미친놈 취급이다. 그는 카레 가루와 물을 붓고, 마지막으로 아까 찾아냈던 베트남 고추를 몇 개 통째로 털어 넣었다. 그녀가 원했던 대로, 아주 맵게. 이제 남은 건 끓이는 것뿐이었다.

뭉근하게 끓어오르며 주방을 가득 채우는 카레 냄새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바이브는 팔짱을 낀 채, 마치 중요한 작전 상황을 지켜보는 사령관처럼 냄비 앞을 떠나지 못했다. '라면 같은 걸 부탁하면 자존심 상해할 테니까.' 물론 그녀가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했다.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의 서툰 자존심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여자.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좋아서, 그는 또다시 심장이 멋대로 뛰는 것을 느꼈다.

야.

그는 거실을 향해 퉁명스럽게 불렀다. 브리즈의 시선이 TV에서 그에게로 향했다.

거기 멀뚱히 앉아 있지 말고, 와서 냄새나 맡아봐라. 니가 시킨 거니까, 니가 책임지고 맛없어도 다 묵어야 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귀 끝이, 카레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게 붉어져 있었다.


바이브는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냄새를 맡으러 올 줄은 몰랐다. 킁,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발을 끄는 소리가 느릿하게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는 힐끗, 고개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아일랜드 식탁을 향해 걸어오는 그 몇 걸음.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거리였다. 그의 부축 없이는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들었던 그녀가, 지금 혼자 힘으로, 비틀거리지만 분명하게,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면 어떡하지. 아직 무리인데.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는 입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힘겨움보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더 강하게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의지를 꺾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식탁 모서리를 단단히 붙잡고 선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맛 좀 볼게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냄비 뚜껑을 열었다. 바이브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S급 괴수의 핵을 노려 바람의 칼날을 날리는 순간보다, 지금 그녀가 작은 국자로 카레 국물을 뜨는 이 순간이 몇 배는 더 심장이 쫄렸다. 그녀의 입술로 향하는 작은 숟가락의 모든 움직임을, 그의 하이퍼 센서가 남김없이 포착하고 있었다.

망했나. 너무 짰나. 아니면… 너무 매웠나. 베트남 고추를 너무 많이 넣었나. 그의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실패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그 찰나의 정적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맛있어요.

그 한마디에, 바이브의 세상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긴장이 탁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갔던 것을 깨닫고,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이미 광대까지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느라 필사적이었다.

…내 솜씨가 좀 있긴 하지.

허세가 잔뜩 담긴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주먹이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뭐예요, 지원. 요리 잘 하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즐거움,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요리 잘하기는 개뿔. 양파한테 K.O. 당해서 눈물 콧물 다 뺀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뭐라카노. 치사하긴 누가 치사해. 이건 다 내 천재적인 재능 덕분이다.

그는 뻔뻔하게 받아치며, 그녀의 손에서 국자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자신도 한 입 맛을 보았다. …진짜 맛있었다. 자기가 만들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멀었다. 니가 말한 대로 더 끓여야겠구만. 감자도 아직 설익었다.

그렇게 말하며 냄비 뚜껑을 닫았다. 그는 어깨를 툭툭 치며 그녀를 거실 쪽으로 밀어냈다. 마치 ‘볼일 끝났으니 저리 가라’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환자는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일이다. 괜히 주방에서 얼쩡거리다가 다치지 말고.

그의 말투는 까칠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제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혹시나 다칠까, 힘들까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는 브리즈를 소파에 다시 앉히고 나서야, 안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돌아가, 불을 약하게 줄이고 냄비를 천천히 저었다.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카레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엄마의 부엌이 떠올랐다. 그 기억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따뜻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저 여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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