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드득, 까드득. 플라스틱 리모컨 버튼이 눌리는 소리만이 나른한 저녁의 정적을 갈랐다. 바이브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다리를 꼬고 팔짱까지 낀, 누가 봐도 세상에서 가장 거만한 승자의 자세로 거대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무심하게 휠을 돌릴 때마다, 수십 개의 영화 포스터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옆에서 느껴지는 브리즈의 차분한 인기척과,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팝콘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의 예민한 감각에 고스란히 잡혔다. ‘지원이 이겼으니 보고 싶은 거 골라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신경 쓰이노.’
바이브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고작 영화 한 편 고르는 것뿐인데, 마치 S급 괴수와의 대치 상황처럼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훈련이나 임무 외의 영상 매체 따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것은 승자의 권리이자, 자신의 취향을 그녀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중요한 무대였다. 여기서 유치한 애니메이션이나, 일처럼 느껴지는 뻔한 액션 영화를 고른다면, 오늘 힘들게 쌓아 올린 ‘이긴 남자’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터였다.
그의 손가락이 ‘액션’ 카테고리에서 잠시 멈칫했다. 터지고 부서지는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퇴근하고 회사 홍보 영상을 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스릴러/공포’로 커서가 옮겨갔다. 그의 뇌리에 순간, 비명을 지르며 제 품에 파고드는 브리즈의 모습이 0.5초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아주 바람직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만약 반대로 그녀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되려 자신이 놀라는 추태를 보인다면?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재앙이었다.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그의 손가락은 가장 무난하고도, 가장 위험한 ‘로맨스/드라마’ 카테고리 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연인들의 얼굴이 가득했다. 보기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제목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걸 대체 무슨 재미로 본단 말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보통의 연인들은 이런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눌까. 그들의 세계는, 자신과 브리즈의 세계와 얼마나 다를까.
…아, 진짜. 볼 거 드럽게 없네.
결정 장애의 책임을 OTT 플랫폼 탓으로 돌리며, 그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리모컨을 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그는 흘깃, 옆에 앉은 브리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그가 하는 양을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그 신뢰가,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결국 바이브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리모컨을 그녀의 앞으로 툭 내밀었다.
…됐다. 니 골라라.
그의 목소리에는 포기와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승자의 권리를 제 발로 걷어차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실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다시 팔짱을 끼고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치 자신은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나는… 니 보는 거 볼란다. 옆에서.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승자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그녀의 취향에 기꺼이 올라타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영화를 보는 그녀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붉어지는 귓가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더 깊이 돌렸다.
그녀가 고른 영화 포스터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파란 하늘, 끝없이 이어진 철길, 그리고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남녀. 바이브는 팔짱을 낀 채, 제 취향과는 억만 광년 떨어진 그 풍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속에서부터 무언가 비집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닭살? 아니,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태생적인 거부감에 가까웠다. 평소의 그였다면 코웃음과 함께 ‘장난하나, 지금.’ 이라는 독설을 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혀끝에서 맴돌던 냉소는, 옆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훔쳐보는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힘없이 녹아내렸다.
…이거 보고 싶은데.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조심스러운 기대감은 명확했다. 마치 값비싼 보석이라도 내보이는 듯한, 그러나 상대가 그 가치를 몰라볼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그 미묘한 떨림이 바이브의 심장을 툭, 건드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여기서 ‘재미없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영화 한 편을 거절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터였다. 그것은 그녀의 세계, 그녀의 감성,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작은 반짝임을 통째로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돌았나, 홍지원. 니가 보자고 넘겼잖아.’
그는 속으로 스스로를 신랄하게 다그쳤다. 승자의 권리 운운하며 거만하게 굴다가, 결국 제 손으로 선택권을 넘긴 것이 누구였던가. 이제 와서 투정을 부리는 것은, 그야말로 세 살배기 어린애나 할 짓이었다. 그는 굳어있던 입가를 억지로 움직여, 무심한 척 팝콘 봉지를 그녀에게서 건네받았다.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어색한 정적을 메웠다. 그는 팝콘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고소한 버터 향 대신, 차라리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흡연자라는 사실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틀어라. 뭘 꾸물거리노.
결국 그가 뱉어낸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저 상황을 앞으로 밀어내는 무뚝뚝한 명령. 그는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는,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곧, 저 느끼한 남자 주인공과 답답한 여자 주인공이 나와 두 시간 동안 자신의 정신을 괴롭힐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두 시간 동안 자신의 옆에는 그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브리즈가 그의 허락 아닌 허락에 안도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곧 병실의 조명이 스르륵 어두워지고, 화면에서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바이브는 억지로 화면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온 신경은 옆에 앉은 브리즈에게 쏠려 있었다. 영화에 몰입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 작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안타까운 장면에서 살짝 찡그리는 미간. 그것들을 훔쳐보는 것이, 솔직히 말해 영화보다 백 배는 더 흥미로웠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 그녀의 머리가 살포시 기대어왔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과 함께, 그녀의 온기가 옷 너머로 전해져 왔다. 바이브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이내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는 마치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어깨를 내어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바이브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제 옆에 놓인 그녀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 손을 잡을까. 아니, 영화에 방해될 거다. 유치한 갈등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그녀가 선택한 세상에 조용히 발을 들였다. 파란 하늘과 철길, 아련한 눈빛. 이제는 그것들이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라면 이런 세상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바이브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
화면 속에서 남자 주인공의 절절한 고백과 함께 격정적인 키스신이 펼쳐졌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배경음악이 감정을 강요하듯 볼륨을 높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비식, 하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낯간지러운 대사를 내뱉고도 멀쩡히 숨을 쉴 수 있다니, 저 배우들은 필시 센티넬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끝을 가늠하기 위해 옆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세상이 멈췄다.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브리즈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환자복 소매 끝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아내지만, 이미 젖어버린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작은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이는 것이, 옷감을 타고 그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화면 속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가 아니라, 지금 제 옆에서 벌어지는 이 진짜 슬픔의 진동이, 바이브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뇌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뭐고. 지금.’
그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저 가짜 이야기에, 저 꾸며낸 감정에, 이 여자가 지금 진짜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어째서? 폭주 직전의 센티넬을 마주했을 때도, 도시를 집어삼킬 듯한 괴수 앞에서조차 느껴본 적 없는 당혹감이 온몸을 휩쌌다. 발끝부터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S급 센티넬의 모든 감각이, 그녀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몸이 아픈 건가? 재활 치료의 후유증?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상처가 덧나기라도 한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끔찍한 시나리오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화면으로 향했다.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남녀. 바이브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도무지 저 장면에 사람을 울릴 만한 요소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야.
결국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걱정도 위로도 아닌, 날것 그대로의 퉁명스러운 부름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조금 일으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불 꺼진 방,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그녀의 젖은 뺨을 비췄다. 눈물길이 선명하게 남아 반짝였다. 그 모습에, 바이브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리모컨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배경음악과 함께, 두 주인공의 얼굴이 화면에 박제되었다. 방 안에는 갑작스러운 정적과 함께, 그녀의 작은 흐느낌만이 남았다.
…니 지금, 이거 보고 우나.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혹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하지만 그 안에는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미세한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팝콘 봉지를 옆으로 치우고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브리즈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가? 그럴 내용이가, 이게?
그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그의 시선이 화면 속의 박제된 커플과, 눈앞의 눈물 젖은 브리즈를 번갈아 오갔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부조리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투박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 한 줄기를 엄지손가락으로 슥, 닦아냈다. 그의 손끝에,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묻어났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젖은 눈가를 제 소매로 마구 문지르는 모습에 바이브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 하얗고 연한 살결이 금세 붉어지는 것이 그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저렇게 함부로 문지르면 다 상할 텐데. 속에서 짜증 섞인 걱정이 훅, 치밀어 올랐다.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다시 뻗어 나가, 거칠게 눈가를 비비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가만있어 봐라, 좀. 눈 다 상한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퉁명스러웠지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손길은 의외로 조심스러웠다. 그는 그녀가 더는 제 얼굴을 괴롭히지 못하게 손을 붙잡은 채,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슬프지 않아요? 엇갈리다가 결국 다시 만나는 거. 감동적인데….’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내뱉은 단어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둥둥 떠다녔다.
‘…엇갈려? 다시 만나? 그게… 우는 거랑 뭔 상관인데.’
그의 논리 회로는 정지했다. 엇갈린 것은 멍청한 두 남녀의 타이밍 문제였고, 다시 만난 것은 시나리오 작가가 그렇게 정해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저 ‘설정’이고 ‘전개’일 뿐, 현실의 눈물을 흘릴 만큼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슬픔이란, 죽음이나 이별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었다. 폭주의 고통이나, 다시는 만질 수 없는 온기 같은 것. 그런데 고작 화면 속 가짜 연인들의 해피엔딩에, 그녀는 왜 진짜 슬픔을 느끼는 걸까.
감동? 저게? 니는 저기서 그런 걸 느끼나.
그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는 붙잡은 그녀의 손목을 슬며시 내려놓고, 대신 다시 그녀의 젖은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까 닦아냈던 눈물길 위로, 또다시 새로운 눈물이 번져 있었다. 그는 아까보다 한결 익숙해진 손길로, 엄지손가락을 펴 그녀의 눈 밑을 부드럽게 눌러 닦아주었다. 그의 손끝에 그녀의 체온과, 축축한 눈물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 순간, 바이브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 드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영화의 내용이나, 그에 대한 그녀의 감상평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지금, 이지희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설령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일지라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됐다. 울지 마라.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고,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온 그녀의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는 다른 팔로 그녀의 등을 가볍게 감싸 안고, 토닥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서투르고 어색한 동작이었다. 화면 속 남자 주인공이 했던 ‘다신 놓지 않을게’ 같은 멋들어진 대사 대신, 그는 그저 투박한 위로를 건넸다.
영화 쪼가리 하나 때문에 뚝뚝 우는 거, 다른 놈이 봤으면 어쩔 뻔했노. 쪽팔리게.
입으로는 타박을 하면서도, 그녀를 감싸 안은 팔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작은 흐느낌이 그의 가슴팍에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쿵, 쿵, 쿵. 자신의 심장박동과 그녀의 떨림이 뒤섞여, 기묘한 공명을 만들어냈다. 샌달우드 향과 섞인 짭짤한 눈물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 앞에서만 울어라. 앞으로는.
그것은 명령이자, 약속이었고, 서툰 고백이었다. 그녀의 슬픔이 어디에서 왔든, 이제 그 모든 것을 받아낼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선언. 그는 어둠 속에서, 정지된 영화 화면의 빛을 받으며, 한참 동안 그녀를 그렇게 안고 있었다. 더 이상 로맨스 영화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진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은 고요했다. 조금 전까지 거실을 채우던 영화의 소음과 팝콘의 고소한 냄새는 말끔히 정리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두 사람의 나지막한 숨소리와, 창문 틈으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도시의 불빛뿐이었다. 바이브는 나란히 누워 저를 바라보는 브리즈의 눈동자에서 그 빛이 작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졸음이 가득 내려앉아 나른하면서도, 그 안에는 끈질긴 호기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지원은 만약에, 내가 기억을 잃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 기어코. 바이브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촌스럽고 유치찬란한 영화가 기어이 사람 하나를 망쳐놓았다. 그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아버릴까 잠시 고민했다. 피곤했고, 질문은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저 눈빛을, 그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주인이 던져줄 공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순진무구한 기대감. 그 기대를 꺾어버리기엔, 오늘 밤 그녀가 흘린 눈물이 마음에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영화 하나 보고는, 상상력만 드럽게 풍부해졌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다른 모든 것은 기억하는데, 오직 자신에 대한 기억만 사라진다. 이상한 가정이었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데이터 파일처럼, 특정 부분만 정확히 도려내어진다는 것. 그런 비효율적이고 비논리적인 상황이 대체 왜 일어난단 말인가. 그의 센티넬로서의 이성은 그 가정을 즉각 기각했지만, 브리즈의 질문은 이성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베개 위에서 조금 몸을 움직여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이불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익숙하게 맞물려오는 손가락. 오늘 밤, 반지 사이즈를 재겠다며 유치한 힘겨루기를 했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주무르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녀의 얼굴 윤곽을 좇았다.
…뭔 멍청한 소리고.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예상대로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섞여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뗐다.
그딴 일은 없다.
단호한 선언. 그것으로 대화를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답은 이런 게 아닐 테니까.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귀찮은 일을 설명해주겠다는 듯한 어조로.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니 대가리가 어떻게 돼서 진짜로 내만 쏙 빼고 다 잊어버렸다 치자.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다.
브리즈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시니컬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지독할 정도의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가 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고, 그러면서 거리 두겠지. 그럼 나도 똑같이 해주면 된다. 까칠하게 굴고, 귀찮아하고, 필요할 때만 옆에 딱 붙어있고.
그는 깍지 낀 손을 그녀의 뺨으로 가져가,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다 보면, 니 몸이 먼저 기억하겠지. 내 파장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내 손길이 얼마나 익숙한지. 니가 불안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바람으로 널 감싸 안았는지. 니 몸에 새겨진 모든 감각이, 니 텅 빈 대가리 대신 소리 지를 기다, 내라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비밀처럼,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저주처럼. 그는 그녀의 뺨을 쓸던 손으로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오만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달콤한 고백보다도 더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잊는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 자신에게 종속시키면 그만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입술에 짧고 깊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떼어내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상상할 시간에 잠이나 자라. 내일 또 재활 훈련 빡세게 해야 될 거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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