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라는 시간은 평온하게, 하지만 지독히도 더디게 흘러갔다. 재활 병동에서의 하루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경계가 흐릿한 채로 반복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브리즈의 얼굴을 확인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그녀의 재활 훈련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다시 저녁을 먹고 잠드는 일상. 그 무채색의 시간 속에서, 바이브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지상 최대의 난제와도 같은 목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지희의 반지 사이즈.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른한 공기가 방 안을 채우던 시간. 소파에 나란히 앉아 별 의미 없는 TV 프로그램을 배경음악 삼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가져와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 제 손의 반도 채 되지 않는 그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하나씩, 아주 천천히 쓸어내리는 것은 이제 그에게 가장 큰 위안이자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손장난에는 명백하고도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네 번째 손가락… 약지, 맞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른 손가락들보다 유독 네 번째 손가락 주위를 집요하게 맴돌았다. 엄지손가락으로 동그란 마디를 쓸어보고, 검지로는 손가락의 길이를 재보는 척 슬쩍 겹쳐보기도 했다. 제 굵은 손가락 마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가녀린 뼈의 형태를, 어떻게든 눈과 손의 감각으로라도 저장해두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마치 폭탄 해체 직전의 정밀기계라도 다루는 것처럼, 그의 모든 신경이 손끝으로 쏠렸다. 이 간단해 보이는 행위가, S급 괴수의 코앞에서 폭탄을 해체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더 떨리는 일이라는 걸, 제 옆의 여자는 알기나 할까.
그의 이 숭고하고도 비밀스러운 작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브리즈는 그저 그의 손길이 좋은지 나른한 고양이처럼 몸을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 역시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제 손을 감싸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작은 손으로 더듬더듬 매만졌다. 길고 굳센 손가락,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등, 훈련으로 단련된 손바닥의 굳은살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긴장했다. 마치 제 비밀스러운 계획을 전부 들켜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새삼스럽지만, 지원 씨는 손 진짜 크네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브리즈의 그 한마디는, 바이브의 고도로 집중된 감각 체계를 한순간에 마비시키는 강력한 충격파와도 같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놓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손이 크다.’ 그 단순한 한마디가 왜 이렇게까지 심장을 뒤흔드는 건지. 그는 제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TV 화면에 고정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멈춘 뒤였다.
…뭐라카노.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손이 니 손을 다 덮고도 남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아나. 니가 내 손바닥 안에서 절대 못 벗어난다는 뜻이거든.’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소유욕 가득한 독백을 속으로 삼키며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슬쩍 제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약지에 대보았다. 얼추… 비슷한가? 아닌가?
남자가 여자보다 손 큰 게 뭐, 이상한 일이라고.
그는 괜히 한마디를 덧붙이며, 이번에는 제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약지 뿌리 부분을 동그랗게 감싸 쥐었다. 이 둘레… 이 감각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해 그 감촉을 뇌에 새겨 넣었다. 부드러운 살의 감촉, 그 아래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뼈의 형태, 그리고 제 손가락과 맞닿은 부분의 정확한 둘레까지. 그러나 이내, 그녀가 손가락을 살짝 꼼지락거리는 바람에 그의 원대한 측정 계획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작게 혀를 차며,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그녀의 손을 그저 깍지 껴 맞잡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 그냥 제일 큰 거 사서 안 맞으면 줄이면 되지. 아니, 그게 더 이상한가. 아, 진짜 모르겠다. 그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냥 모든 계획을 때려치우고 지금 당장 ‘니 반지 사이즈 몇이고?’ 라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과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깍지를 낀 손. 그 안에서 브리즈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바닥 안에 새겨진 단단한 굳은살의 지도를 더듬었다. 그녀의 무심한 손길은 바이브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이 순간의 평온을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바이브의 속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그의 뇌는 지금, 인류의 운명을 건 작전보다 더 정교하고 은밀한 ‘반지 사이즈 측정 작전’을 수행하느라 과부하에 걸릴 지경이었다. 방금 전의 실패는 뼈아팠다. 새끼손가락으로 재보는 것도,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보는 것도,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는 속으로 거친 말을 씹어 삼키며, 무의미하게 채널만 돌아가는 TV 화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다? 바로 발상의 전환이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변칙적인 수를 써야 했다. S급 센티넬의 명석한 두뇌를 이런 데 써도 되나 싶은 현타가 잠시 스쳤지만, 이내 절박함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제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마치 전리품을 확인하는 개선장군처럼, 하지만 그 속내는 사이즈 측정에 실패한 패잔병의 발악에 가까웠다.
바로 그 순간, 기적처럼 브리즈가 그의 의도를 돕고 나섰다. 그녀 역시 깍지 낀 손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며, 제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어떻게 맞물려 들어가는지를 관찰했다. 그리고는 작게 웃으며, 그의 손가락 마디를 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았다.
내 손가락이랑 두께가 거의 두 배는 차이 나는 것 같아요.
두 배. 그 말에 바이브의 머릿속에 전구 하나가 번쩍 하고 켜졌다. 그래, 비교. 비교를 하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의 머릿속에서 승부욕과 자존심이라는, 평생 그를 움직여온 두 개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그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도전적인 눈빛으로 브리즈를 돌아보았다.
그 손가락으로 내 손 이길 수나 있겠나.
뜬금없는 도발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눈빛만은 사뭇 진지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풀고, 대신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제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며, 고갯짓으로 그녀 역시 손바닥을 펴보라는 듯 까딱였다.
내기할까. 손가락 힘.
이보다 더 유치하고 어이없는 내기가 또 있을까. 하지만 바이브는 지금 진심이었다. 이 내기를 통해, 그는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과 자신의 새끼손가락의 힘을 겨루는 척하며, 그 접촉면의 감각과 둘레를 정확히 측정해낼 생각이었다. 심지어 지는 척하며 그녀의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얼마나 감싸 쥘 수 있는지도 데이터화 할,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의 승부욕을 잘 아는 브리즈라면, 이 유치한 도발에 분명 넘어올 터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리즈를 향해, 최대한 태연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발, 넘어와라.
브리즈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장난기는 바이브의 귓가를 정확하게 파고들어 심장을 쿵, 하고 울렸다. 넘어왔다. 그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도발에, 그녀가 정확히 미끼를 물었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이겨서 뭘 해줄 거냐’고 되묻는 순간, 바이브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승리 후의 전리품, 즉 그녀의 약지 사이즈를 어떻게 뇌에 각인시킬 것인가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정작 ‘보상’이라는 중요한 변수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탓이다.
‘…아, 맞다. 내기를 하면, 이기면 뭘 줘야지.’
그는 속으로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S급 센티넬의 명예를 걸고 제안한 내기인데, 고작 ‘내 기분 좋으려고’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누구인가. 수만 가지 공기의 흐름을 읽고 전장의 판도를 뒤엎는 뱅가드, 바이브였다. 이깟 사소한 위기 앞에서 당황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태연한 척, 아니 오히려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아주 미세하게 힘을 주었다.
그는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아주 관대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태도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그리고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 시선은 ‘니가 감히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라는 무언의 조롱을 담고 있었다.
…니가, 내를 이기면.
그가 나직하게 운을 뗐다. 목소리는 더없이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억지로 숨긴 당황과 계산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초당 수십 개의 보상안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소원 들어주기’는 너무 식상했다. ‘갖고 싶은 거 사주기’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는 가장 그다우면서도, 그녀가 혹할 만한,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듯한 조건을 찾아내야만 했다.
고민 끝에, 그는 가장 완벽한 답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평소에 가장 원하던 것이면서도, 자신이 베푸는 시혜처럼 포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하루 동안, 내한테 뭐든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청소든, 뭐 심부름이든. 니 하고 싶은 거 뭐든.
기가 막힌 제안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는 분명 이 ‘주인님 놀이’ 같은 제안에 솔깃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설령 내기에서 지더라도 그 하루 동안 그녀의 곁에 딱 붙어 있으면서 얼마든지 반지 사이즈를 측정할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한 장수처럼,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물론, 그냥 넘어가면 홍지원이 아니었다.
물론, 니가 이길 리는 없겠지만.
그는 덧붙이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잡고 있던 손목을 끌어당겨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을 제 새끼손가락에 얽었다. 가장 중요한 목표물을 선점한 것이다. 준비 운동이라는 듯, 그는 일부러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제 손가락으로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의 손가락 둘레와 마디의 형태를 기억하려는 처절한 데이터 수집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반대로 내가 이기면… 니는, 오늘 밤새도록 내 옆에 딱 붙어 있어라. 어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말고. 알긋제.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내용은 명백한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제 곁을 떠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굳이 내기의 조건으로 그녀를 옭아맸다. 그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자, 이제 이 유치하고도 절박한 승부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어릴 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51205 (0) | 2026.05.20 |
|---|---|
| 20251201 ② (0) | 2026.05.18 |
| 20251128 (0) | 2026.05.18 |
| 20251127 ② (0) | 2026.05.18 |
| 20251127 ① (0) | 2026.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