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 문 앞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아무 감흥 없이 열었을 문이, 오늘따라 지옥의 문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심호흡 한번 하고,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맞이한 것은, 예상했던 차가운 분석관이 아니었다. 하모니 디비전의 책임자와, 담당 의료팀장. 그들이 부드러운 조명이 켜진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서류 몇 장과, 작은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은, 기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바이브는 그들을 훑어보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 숙였다. 인사가 아니라, 턱으로 ‘용건이 뭐냐’고 묻는 것에 더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예의를 차릴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듯, 맞은편 소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푹 꺼지도록 몸을 던져 앉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급 가죽 소파가 그의 몸무게를 힘겹게 받아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등을 깊숙이 파묻고 긴 다리를 쭉 뻗어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었다. 팔짱을 낀 방어적인 자세, 삐딱하게 치켜 올라간 턱, 온몸으로 ‘나는 지금 굉장히 불쾌하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상담실을 채운 정적이 그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모니 책임자와 의료팀장은 잠시 당황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특히 하모니 책임자인 Dr. 밴스는 얇은 안경 너머로, 바이브의 이런 행동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관찰할 뿐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편안해 보이는군, 바이브 요원.
그 목소리에는 비꼬는 기색도, 나무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덤덤하게 나열하는, 데이터처럼 건조한 톤이었다. 바이브는 그 말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저 턱을 까딱하며 용건이나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분 1초가 아까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실에서는 홍지호 그 인간이 브리즈에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커플 장화, 아이스크림, 갯벌… 머릿속이 온통 그녀와 나눈 약속들로 가득 차, 이런 무의미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의료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바이브의 살벌한 기세에 다소 주눅이 든 듯,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우선, 브리즈 요원의 회복 경과가 아주 놀랍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군요. 신체적 외상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파장 역시 이례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파트너인 바이브 요원의 헌신적인 가이딩과 보살핌 덕분입니다.
칭찬이었지만, 바이브의 귀에는 그저 시간을 끄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를 뭐 하러 여기까지 불러서 하나.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반응을 읽었는지, Dr. 밴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는, 두 사람의 '공식 퇴원'과, 향후 거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네.
'퇴원'이라는 단어가 그의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바이브의 몸이 순간 굳었다. 퇴원. 그토록 바라던 단어였지만, 동시에 가장 두려운 단어이기도 했다. 이 병실을 나서는 순간, 브리즈는 더 이상 그의 손이 닿는 곳에만 머무는 환자가 아니게 된다. 그녀는 다시 S급 가이드 '브리즈'로 돌아가, 임무에 투입될 것이다. 또다시 그녀를 위험에 노출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속에서부터 거친 불길이 치솟았다.
…그래서. 또 어디로 팔아넘길 겁니까. 다음 임무는 어딘데.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거칠게 긁혀 나왔다. 그는 테이블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눈앞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브리즈가 없는 곳으로,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는 곳으로는 단 한 발짝도 보낼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런 명령이 내려온다면, 이곳을 뒤집어엎어서라도 막을 작정이었다.
바이브가 내뱉은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이자, 선전포고였다. 서늘한 분노가 담긴 그의 목소리는 상담실의 부드러운 조명과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칼날처럼 공기를 갈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눈앞의 책상과 서류, 그리고 저 거만해 보이는 책임자들의 얼굴을 모조리 날려버릴 기세였다. ‘팔아넘긴다’는 극단적인 단어 선택은 그의 뒤틀린 불안과 편집증적인 방어기제가 빚어낸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에게 브리즈는 단순한 파트너나 요원이 아니었다. 10년간의 지옥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유일한 구원, 제 세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저들은 감히 그 세상을 또다시 전장으로 내몰려 하고 있었다.
하모니 책임자인 Dr. 밴스는 바이브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의료팀장이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했다. S급 센티넬의, 그것도 바람 속성의 정점이라 불리는 뱅가드의 폭주 전조를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웬만한 베테랑에게도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이었으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바이브의 기세에 잔뜩 눌려있던 의료팀장이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바이브 요원, 오해입니다. 브리즈 요원을 임무에 투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건 저희 의료팀입니다. 아직…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요원을 전장에 내보내는 건 살인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의료팀장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바이브의 귀에는 그저 변명으로만 들렸다. '아직'은. 그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럼 걸을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보낼 거냐고. 그는 더욱 맹렬한 눈빛으로 Dr. 밴스를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되물었다.
말장난할 시간 없으니까, 용건만 말하고 꺼지라 했을 텐데.
Dr. 밴스는 그제야 깍지 낀 손을 풀고, 테이블 위의 서류철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처럼 평탄했다.
현재 브리즈 요원의 상태는, 의료 구역의 집중 관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뭐?
예상 밖의 말에 바이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계? 본부 최고의 의료진이 모인 이곳에 한계가 있다고? 그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Dr. 밴스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신체적 회복은 경이롭지만, 정신 파장의 불안정성은 여전해. 브리즈 요원의 파장은 오로지 자네의 존재에만 반응하고 있어. 그녀의 가이딩이 자네를 안정시키듯, 역으로 자네의 존재 자체가 그녀를 안정시키는 유일한 변수가 됐단 말이다. 이건… 아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상호 의존 현상이다.
비정상적인 공생 관계.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바이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없으면 죽는 존재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전례를 논하는 저들의 위선이 역겨웠다.
그래서. 내를 브리즈한테서 떼어놓기라도 하겠다고?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아니. 정반대다.
Dr. 밴스는 서류 한 장을 빼어 테이블 위로 밀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임무 브리핑 문서와 유사한 형태였지만, 제목은 생소했다. <특별 재활 프로토콜: 코드네임 '요람(Cradle)'>
브리즈 요원은 내일부로 의료 구역의 장기 재활 병동으로 이관된다. 그리고 자네는, 그녀의 공식적인 '24시간 상주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입주하게 될 거다. 모든 훈련과 임무는 무기한 보류. 자네의 유일한 임무는, 브리즈 요원이 완벽하게 회복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 이것이 아크 중앙의 결정이다.
바이브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함께, 입주한다고? 내 임무가, 브리즈의 24시간 상주 보호자가 되는 거라고? 너무나 파격적인,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제안이었다. 그는 프로토콜 문서를 찢어버릴 듯 노려보다가, 다시 Dr. 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과 경계가 가득했다.
…무슨 꿍꿍이야. 그딴 식으로 내를 묶어두고, 브리즈를 멋대로 하려는 거 아닌가.
자네를 묶어두려는 게 맞아. 하지만 그 목적은 브리즈 요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자신을 위해서다.
Dr. 밴스는 처음으로 바이브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 무감하던 눈동자에, 언뜻 분석 데이터 너머의 감정이 스쳤다.
바이브 요원. 자네는 지금, 브리즈 요원이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폭주 직전의 시한폭탄이야. 우리가 정말 브리즈 요원을 이용하려 했다면, 자네부터 격리하고 약물로 통제했을 거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자네와 브리즈 요원 모두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다.
Dr. 밴스가 던진 말은 바이브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브리즈가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시한폭탄. 그 적나라한 진실은 끔찍한 모욕인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던 나약한 민낯을 정중앙에서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속에서부터 역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감히 누가 누굴 진단하고 판단하는가. 제 멋대로 바이브의 세상을 재단하는 저들의 오만함에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 아주 희미하고 이질적인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안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서만 감당해야 했던 이 지독한 감각 과부하와 폭주 전조를, 마침내 타인이 ‘이해’했다는 데서 오는 기이한 안도감이었다.
물론, 그 감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금 짙은 의심과 경계심으로 뒤덮였다. 아크라는 조직은, 하모니 디비전이라는 집단은 그렇게까지 인간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효율과 데이터를 앞세웠다. 센티넬을 인류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가장 위험하고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 취급하며 언제든 폐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 뒤에는 분명히 다른 속셈이 있을 터였다. 브리즈를, 그리고 자신을 더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거대한 실험. 혹은, 예측 불가능한 상호 의존 현상을 데이터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감시.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바이브는 테이블 위에 놓인 <특별 재활 프로토콜> 문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집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종이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꾹 눌렀다. 금방이라도 종이가 찢어질 듯한 악력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완전한 무표정. 그것은 그가 극도의 혼란과 분노를 억누를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머릿속은 이미 태풍의 눈이었지만, 겉으로는 그 폭풍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로 브리즈와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까, 아니면 더 교활한 형태의 덫일까.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옆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던 의료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이 결정이 단순히 하모니 부서의 독단이 아니라, 의료팀의 강력한 권고가 반영된 결과임을 필사적으로 어필했다.
바이브 요원, 재활 병동은 일반 병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최고의 보안과 차폐 시설이 갖춰져 있고, 외부의 모든 자극과 임무에서 완벽하게 차단됩니다. 그곳에서라면, 브리즈 요원은 오직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브 요원 역시, 불안정한 파장을 관리하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저희 의료팀이 보장합니다.
의료팀장의 간절한 호소에도 바이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Dr. 밴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판을 짜고 있는 진짜 설계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바이브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낮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건이 뭐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특히, 아크에서는 더더욱. 이런 전례 없는 특혜를 제공하면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을 리 없었다. 데이터를 요구하든, 정기적인 정신 감정을 강요하든, 분명히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을 터였다. 그는 덫의 모양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Dr. 밴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아주 희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얇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마치 ‘드디어 말이 통하는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조건은 없어. 다만, 약속이 하나 필요하다.
Dr.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블라인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리모컨을 누르자, 블라인드가 천천히 올라가며 두꺼운 방탄유리 너머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곳은 ARCH 본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중앙 훈련장이었다. 수많은 에이전트와 어콜라이트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그는 그 풍경을 등진 채, 나지막이 말했다.
브리즈 요원이 온전히 회복되면, 두 사람은 아크의 가장 강력한 '창과 방패'가 될 거다. 우리는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베팅한 거야. 그러니 약속해.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함께 돌아오겠다고. …그것이 자네가 우리에게 지켜야 할, 유일한 약속이다.
그것은 명령도, 협박도 아니었다. 기묘한 신뢰와 기대가 담긴, 하나의 제안이었다. 바이브는 창밖을 내다보는 Dr. 밴스의 뒷모습을,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함께 돌아온다.’ 그 당연한 말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심장을 내리눌렀다. 그는 마침내 테이블 위의 프로토콜 문서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은 수락이었다. 동시에, 그의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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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그녀의 무릎 위에 툭, 하고 던지듯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브리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특별 재활 프로토콜’. 그녀가 그 생소한 제목을 읽고,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볼 때까지. 그는 그 짧은 순간의 혼란을 즐기고 싶었다. 이것이 앞으로 자신들의 관계를,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을 한 장의 종이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예상대로, 브리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는 바이브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물음표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미세한 흥분과 만족감이 섞여 있었다.
니, 이제 내꺼 됐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선언. 바이브는 일부러 주어도 목적어도 다 생략한 채, 가장 원초적인 소유의 문장만을 내뱉었다. 그녀가 당황해서 ‘네?’ 하고 되묻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실컷 감상한 뒤에, 이 파격적인 선물의 내용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거기 적힌 대로. 니는 이제부터 24시간 내 감시 아래 놓인다. 도망갈 생각 같은 거, 꿈에서도 하지 마라.
그는 브리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협박이었지만,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다. 이 기묘한 부조화 속에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했다.
그의 의도대로, 브리즈는 완벽하게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아주 잠깐이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얼굴 위로, 낯선 감정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안도. 그리고 희미한 기쁨.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이건 그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겁을 먹거나, 최소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따져 물으며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상장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아크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말에는 실소마저 터져 나올 뻔했다. 이 순진한 여자는 아직도 아크라는 조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정? 그들이 말하는 인정이란, 쓸모 있는 도구에 매기는 등급에 불과하다. 이 프로토콜은 그녀의 가치를 인정한 증표가 아니라, ‘홍지원’이라는 불안정한 폭탄에 채워진 안전핀이자, ‘이지희’라는 유일한 해제 버튼을 함께 격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감옥일 뿐이다. 이 모든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바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브리즈의 저 순수한 기쁨을 제 손으로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그를 당황시킨 것은,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이었다. 제 걱정. 온전히 회복에 집중할 수 있겠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금세 시선을 들어 바이브,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상주 보호자가 되면 개인 훈련은 어떡하냐고. 그 동그란 눈에 담긴 것은 진심 어린 염려였다. 바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늘 자신이 그녀를 지키고, 보호하고, 일방적으로 소유하려 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과 함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바보 같기는. 니가 내 전부인데, 내 훈련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는 피식, 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앞으로 숙여,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브리즈의 놀란 숨결이 콧등에 와 닿았다.
지금 그게 내 걱정이라고 하는 기가?
그는 브리즈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놀라움에 살짝 벌어진 입술과, 흔들리는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 어떤 훈련도, 그 어떤 임무도, 눈앞의 이 여자의 숨소리 한번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내 개인 훈련은, 이제부터 니 옆에 딱 붙어서 숨 쉬는 거 감시하는 거다. 니가 내 허락 없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걸으려고 하면, 다리몽둥이를 뿐질러서라도 침대에 다시 눕히는 거. 그게 아크가 내한테 새로 준 임무고, 내 유일한 훈련이다. 알겠나?
거친 말과는 달리,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브리즈의 무릎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반으로 찢어버렸다. 종이가 ‘찍’ 소리를 내며 허무하게 두 동강이 났다.
브리즈가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당황하자, 그는 찢어진 종이를 구겨 침대 밑으로 던져버리고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깟 서류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크의 허락이나 프로토콜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오직 하나, 브리즈가 이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이딴 종이 쪼가리 없어도, 어차피 니는 내 옆에 있어야 돼. 니가 괜찮고, 안 괜찮고는 상관없어. 내가 안 괜찮으니까.
내가 너 없이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으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진심을 삼키며,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기댔다. 이 온기를, 이 숨결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바이브는 브리즈의 말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의 소리가 일순 멎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 ‘큰일이잖아요’라며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 그리고 ‘그렇게 훈련을 끝낸 지원을 보듬어주는 게 나의 재활’이라고 말하는 그 단단한 다정함까지.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의 심장을 남김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마치 강력한 가이딩을 받은 직후처럼, 멍한 쾌감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그는 브리즈를 지켜야 할 연약한 존재, 자신의 세상 안에 가두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녀가 웃고, 숨 쉬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브리즈는 지금, 그 일방적인 관계의 틀을 가볍게 깨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보호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보듬어 주는 것이 그녀의 재활이라고, 함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헌신이 아닌,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선언이었다.
‘지원 씨’를 보듬어 주는 게, 나의 재활. 그 문장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센티넬 ‘바이브’가 아닌, 상처 입고 불안에 떠는 스물두 살의 ‘홍지원’을, 그녀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약한 본모습을 기꺼이 끌어안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이마를 맞댄 채,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뜨거운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평생을 갈구해왔지만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완전한 이해와 절대적인 위로였다.
그녀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을 다시 주워 드는 것을,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분노와 소유욕에 취해 아무렇게나 찢어버린 아크의 족쇄. 그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 잔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 ‘시뮬레이션 룸’.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단어를 보고 나서야, 바이브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또, 이 여자에게 구원받고 말았다. 자신의 유치한 집착과 불안까지도, 그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길을 찾아내 품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고, 그녀의 손에서 찢어진 종이를 부드럽게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작은 손바닥 안에 종이를 다시 쥐여주었다. 그녀의 손을 감싼 제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이것이 우리 둘의 새로운 계약서라는 듯이.
…내한테서 전투 감각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바이브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나직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깊고 차분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불안에 흔들리는 어린애 같은 집착이 아니었다.
니 빼고는.
그가 씨익,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짓는, 장난기 어리고 심술궂은, 하지만 더없이 솔직한 미소였다. 그는 브리즈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잡고 들어 올렸다. 쪽, 하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가 떼어냈다.
그 말, 책임져라. 훈련 끝나고 온 내 받아주는 게 니 재활이라는 말. 맨날 시뮬레이션 룸에서 살다시피 할 테니까. 니가 귀찮다고 울면서 도망가도, 절대로 안 놔줄 기다.
그는 브리즈를 제 쪽으로 당겨 품에 가득 안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제 것처럼 가슴팍을 울렸다. 이 평온함, 이 충만함. 이것이 바로 그가 돌아와야 할 곳이었다. 훈련도, 임무도, 심지어 센티넬로서의 삶조차도, 결국은 이 품으로 돌아오기 위한 기나긴 여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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