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재활치료실은 소독약 냄새와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기계음, 그리고 브리즈의 희미한 숨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바이브는 복도 끝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 모든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은 평행봉을 붙잡고, 의료진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는 브리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휘청거릴 때마다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은 그의 심장이었다. 저 작은 몸으로 제 무게를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모습은 그의 인내심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그냥 확 안아다 옮기고 싶네.’
그는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곱씹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들고, 안전하고 푹신한 침대에 눕혀놓고 싶은 충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는 의지를, 제 멋대로 꺾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그저 제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의 막을 그녀의 주위에 둘러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다리, 땀으로 젖어가는 이마, 그리고 입술을 꾹 깨문 그 완고한 표정까지. 그는 그 모든 것을 제 눈과 감각에 새겨 넣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눈앞의 아슬아슬한 광경만이 아니었다. 오전 내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경하고 낯선 단어가 있었다. ‘반지.’ 아침에 잠든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왜 하필 반지였을까. 그는 그런 시시하고 상징적인 것에 얽매이는 부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브리즈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자신의 표식을,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족쇄를 채워두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이 그의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온 세상에 ‘이 여자는 내 것’이라고 광고하는 것. 생각만 해도 웃기는 발상이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매력적이었다.
‘…미친놈, 무슨 중세시대 기사도 아이고.’
그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품에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마치 급한 연락이라도 확인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익숙한 임무 보고 창이 아닌, 새하얀 검색창을 향하고 있었다. ‘반지’. 그는 딱 두 글자를 쳐넣었다. 화면 가득 쏟아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반짝이는 것들의 향연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많고 복잡한 건데. 그는 혀를 차며, 좀 더 구체적인 검색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여자 반지 사이즈. 모르게 재는 법. 들키면? 프로포즈 반지? 결혼반지? 차이가 뭐꼬. S급 가이드한테 어울리는 반지. 그의 검색 기록은 점차 한심하고 절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S급 센티넬로서 수많은 괴수와 적들을 상대해왔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그 어떤 S급 괴수보다도 더 난해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까르띠에, 티파니 따위의 알 수 없는 외국어들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고리 하나에, 집 한 채 값이 매겨져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저,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는, 그녀를 가장 빛나게 해 줄 무언가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아, 진짜 모르겠다.
결국 그는 포기한 듯 작게 중얼거리며 단말기 화면을 껐다. 역시 이런 건 제 적성이 아니었다. 그냥 제일 비싸고 제일 큰 걸로 사서 안겨주면 되는 걸까. 아니, 그랬다간 브리즈에게 등짝을 맞고, 일주일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힘겹게 걷고 있는 브리즈를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은 저것에만 집중하자. 반지고 뭐고, 일단 저 여자가 제 다리로 온전히 서서, 다시 제 품에 안기는 것이 먼저였다.
…지원 씨. 뭐 해요?
바이브는 브리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현실로 끌려 나왔다. 방금 전까지 까르띠에와 티파니의 미묘한 차이점을 분석하려 애쓰던 S급 센티넬의 날카로운 감각이, 제 파트너의 인기척 하나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단말기 화면을 껐다. 맹렬한 기세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프로포즈 성공법’ 따위의 민망한 검색 기록이 암전 되자, 그제야 그의 심장이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씨, 걸릴 뻔했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에 단말기를 쑤셔 넣으며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제야, 온전히 제 힘으로, 비록 느리지만 비틀거림 없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브리즈의 모습이 시야에 똑똑히 박혔다. 의료진도, 평행봉도 없이. 오직 그녀 혼자서. 그 당연한 사실이 불러일으킨 충격은, 그 어떤 S급 괴수의 기습보다도 강렬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와의 거리는 고작 몇 미터. 하지만 그 몇 걸음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결심과 노력을 요구하는지, 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그녀가 어렵게 쌓아 올린 의지를 무너뜨리는 돌멩이가 될까 봐. 그는 그저, 굳어진 얼굴로 그녀가 자신에게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가 다가올수록, 바이브의 시야는 점점 흐려졌다. 오직 그녀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땀으로 젖은 이마, 힘겹게 내쉬는 숨, 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향한 그 곧은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바이브는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힘으로 그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자신의 두 다리로.
마침내, 그녀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휘청, 하고 마지막 걸음에 몸이 기우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왈칵, 하고 익숙한 체향과 함께, 방금 전까지 그녀가 쏟아냈을 노력의 증거인 뜨거운 열기가 그의 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부서지기라도 할 듯 소중하게, 하지만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뭐 하긴.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쁘게 몰아쉬는 숨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니 똑바로 걷나 감시하고 있었다, 왜.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재활 과정을 감시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애태우며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넘어질까 봐, 아플까 봐, 그래서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그녀의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의 끝에서, 이제는 그녀의 손가락에 채울 반지를 고민하는 한심한 짓이나 하고 있었다. 그는 귓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다 왔으면 말을 할 것이지, 사람 놀래키고 있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안도와 기쁨,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그 자신조차 놀랄 만큼 다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잘했다. 이지희.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그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이렇게, 제 품에 그녀가 온전히 안겨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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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는 인공적인 백색 조명 아래, 소독약 냄새와 먼지 한 톨 없는 정적인 공기로 가득했다. ARCH의 최첨단 재활 병동은 병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무균실에 가까웠다. 그 고요함 속에서, 두 사람의 느릿한 발소리와 브리즈의 옅은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처럼 울렸다. 바이브는 브리즈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두르게 하고, 남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온 체중을 제게 기대게 했다. 그녀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로운 외줄타기처럼 느껴졌기에, 그는 차라리 자신이 그녀의 두 다리가 되어줄 기세로 바짝 붙어 걸었다.
‘…이래가 될 일이가.’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의 몸은 생각보다 더 가벼웠고,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은 불안할 정도로 뜨거웠다. 방금 전, 제 힘으로 몇 걸음을 걸어온 것만으로도 온 기력을 소진한 것이 분명했다. 그깟 몇 걸음에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숨을 몰아쉬는 연인을 부축하며 걷는 이 길이, 그는 지독하게 길게 느껴졌다. 차라리 공주님 안기라도 해서 단숨에 방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다시 ‘스스로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릴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는 그 고집마저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거의 그녀를 안다시피 하여 복도를 걷던 중, 그의 머릿속에 다시금 아까의 그 단어가 불쑥 떠올랐다. 반지. 아까 재활치료실에서 본 그녀의 용감한 걸음과, 그 끝에 제 품으로 와락 안기던 순간이 겹쳐지면서, 막연했던 욕망은 어느새 구체적인 계획의 형태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처럼,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 관계를 영원히 묶어두고 싶었다.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완전한 세계. 그 세계의 증표로, 반지보다 더 완벽한 것이 또 있을까.
문득,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퇴원하는 날. 이 답답한 병동을 벗어나, 다시 둘의 보금자리인 아이기스 본부로 돌아가는 그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 경계의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이 작은 고리를 끼워주는 거다. ‘평생 내 옆에서, 내 감시나 받으면서 살아라.’ 퉁명스러운 척, 그렇게 말하며. 어쩌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건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럼 좋아할라나.’
그는 제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브리즈의 정수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녀라면, 아마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바보처럼 펑펑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이런 건 좀 더 로맨틱하게 해야죠!’ 라며 타박을 놓을지도.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가려는 것을, 그는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다. 너무 앞서나가는 생각이라는 건 알았지만, 한번 피어오른 상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더 이상 S급 센티넬 ‘바이브’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의 미래를 상상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스물두 살의 어린애 같은 남자, ‘홍지원’일 뿐이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막는 것보다, 그녀에게 줄 반지의 디자인을 고르는 것이 백 배는 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그는 문득, 이 행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손가방 안의 공기처럼 쉬이 흩어져 버릴까 두려워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직 머나. 거의 다 왔는데.
그의 목소리에, 브리즈가 으응, 하고 잠긴 목소리로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스민 그녀의 눈빛과 마주치자,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라.
병실의 문이 코앞이었다. 그는 브리즈를 조금 더 단단히 부축하며, 마지막 몇 걸음을 함께 내디뎠다. 퇴원하는 날. 그날, 그는 그녀에게 세상을 다 준대도 바꾸지 않을, 그의 모든 것을 약속할 참이었다. 길들지 않은 바람의, 유일한 주인이 되어달라고. 그렇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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