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브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서서히 풀려갔다. 그냥 잠 잘 만큼 자서 깼다. 어제도 열 시간은 푹 잤다. 그 단순한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가슴팍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돌덩이를 한 번에 치워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는 제 입에서 절로 새어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괜히 티를 내면 또 걱정시킨다고 핀잔이나 들을 게 뻔했으니까. 그녀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미미한 압력이 그의 손바닥 전체로 퍼져, 심장까지 따뜻하게 물들였다. 아, 이 정도면 괜찮은 거다. 아프지 않은 거다. 그 확인 하나에 온몸의 긴장이 풀려, 등줄기를 타고 나른한 이완감이 흘러내렸다.
그는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대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끝이 귓볼을 스칠 때 느껴지는 체온. 확실히 예전보다 따뜻했다. 처음 깨어났을 때의 그녀는, 마치 유리 세공품처럼 투명하고 차가웠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 손끝이 떨렸었는데. 지금은 살이 조금 붙어서, 뺨에 탄력이 돌아왔고, 손가락 마디에도 온기가 서렸다. 물론 아직 갸냘프다. 이 가는 손가락들, 손목 위로 힘줄이 비치는 팔뚝. 밥을 더 먹여야 한다. 국밥이라도 한 사발 퍼다 줄까. 퇴원하면 진짜로 데리고 가야지. 부산 국밥집 말고도 여기 구내식당 밥은 솔직히 개같으니까.
…그래. 그럼 됐다.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목소리에서 안도가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까부터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던 것을 슬쩍 꺼냈다.
배고프지는 않나. 저녁 시간 됐는데.
그는 협탁 위의 시계를 흘긋 확인했다. 여섯 시가 넘었다. 의료팀에서 가져다주는 식단은 뻔하다. 묽은 죽 아니면 맛없는 영양식. 그녀가 먹을 때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요 며칠, 그는 몰래 외부 배달 경로를 확인해두었다. 물론 환자식을 무시하면 의료팀한테 한 소리 듣겠지만, 그깟 잔소리 정도야. 그녀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지.
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 죽 말고.
마지막 두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죽은 이제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그는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남은 손으로 그녀의 이불을 허리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저녁 시간의 병실은 창밖에서 밀려드는 어둠과 함께 조금씩 온도가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춥지 않도록, 이불 위에서 한 번 더 담요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얹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을 충분히 잔 뒤의 그 몽롱하고 나른한 표정. 처진 눈꼬리가 더 축 내려가서, 마치 졸린 새끼고양이 같았다. 귀엽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올라, 그는 입꼬리를 꾹 눌러야 했다.
어, 정말요? 그러면, 그러면… 떡볶이… 같은 것도 돼요? 여기 밥, 너무 싱거워서 좀 질렸어요. …근데, 그런 거 먹으면 의료진 분들이 혼낼 텐데.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잿빛 눈동자에 조명이 담겨 별처럼 빛나는 순간,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떡볶이’. 그 단어 하나가 칙칙하던 병실의 공기를 단숨에 생기로 가득 채웠다. 그래, 바로 저 표정이었다. 자신이 보고 싶었던 것은. 의무감으로 억지로 넘기는 멀건 죽이 아니라, 정말로 먹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이 담긴 얼굴. 그는 만족감에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웃으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다는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의료진들이 혼낼 거라는 걱정. 그녀다운 말이었다. 늘 규칙을 지키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상냥한 사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상냥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는 깍지 낀 손을 살짝 흔들며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혼나면 내가 혼나지, 니가 혼나나.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깟 잔소리 몇 마디가 뭐라고. 신드롬 그 새끼가 훈련장에서 지랄하는 소리보다는 양반일 터였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떡볶이. 좋았다. 맵고, 달고, 뜨거운 음식. 축 처져 있던 그녀의 미각을 깨우고,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몸에 활기를 돌게 할 최고의 메뉴였다. 물론 환자에게 자극적인 음식이 좋지 않다는 건 상식이었지만, 그 상식을 깨부수고서라도 그녀의 저 반짝이는 눈을 계속 보고 싶었다.
괜찮다. 그 양반들 오기 전에 다 먹고 치우면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는 뭐 먹을지만 생각하면 된다. 맵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 치즈는 넣나. 튀김은? 순대도 시킬까.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나서 줄줄 읊는 목소리에, 그 스스로도 놀랐다. 마치 소풍 전날 밤의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 그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붉어진 귓바퀴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단말기를 조작하는 척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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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쥐 죽은 듯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에는 S급 센티넬 특유의 기민함과, 몰래 금지된 물건을 반입하는 소년 같은 은밀함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마치 의료팀의 시선과 청력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무음의 장막이라도 펼친 듯, 그의 발소리는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맵고 달콤한, 명백히 환자식과는 거리가 먼 음식 냄새가 병실의 소독약 냄새를 단숨에 정복해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봉지에 닿는 순간, 바이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기 위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성공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다시 보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심장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그는 침대 옆 협탁에 봉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제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 하는 시늉을 했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파란 눈이 짓궂게 반짝였다. 완전 범죄를 꿈꾸는 공범에게 보내는 은밀한 신호였다. 그는 봉지를 열어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빨간 양념 위로 노란 치즈가 이불처럼 녹아내린 떡볶이였다. 뚜껑을 열자마자 확 퍼지는 매운 향과 김이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냄새 밖으로 안 새게 문틈에 바람 막아놨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순대와 한입 크기로 예쁘게 말린 꼬마 김밥을 연달아 꺼내놓았다. 협탁 위는 순식간에 동네 분식집 좌판처럼 변해버렸다. 병실의 삭막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광경이었지만, 그 어떤 5성급 호텔의 룸서비스보다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는 포장 용기들의 뚜껑을 모두 열고, 나무젓가락을 쪼개 그녀에게 먼저 건넸다.
식기 전에 빨리 묵자. 치즈 굳는다.
재촉하는 말투였지만, 그의 시선은 오롯이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아할까. 한 숟가락이라도 맛있게 먹어줄까. 그의 모든 관심은 그 하나에 쏠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젓가락을 들기 전에, 가장 먼저 길게 늘어나는 치즈를 떡에 돌돌 말아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너무 뜨거울까 싶어 입으로 후후, 몇 번이나 불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해봐라.
명령조에 가까운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조심스러운 애정과 기대가 듬뿍 담겨 있었다. 자신이 직접 공수해 온 이 음식이 그녀에게 약이 되기를, 잠시나마 병실의 고됨을 잊게 하는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는 그녀가 떡을 받아먹기를 기다리며, 숨을 참았다. 마치 어린 새에게 첫 모이를 먹이는 어미새처럼, 그의 마음은 조마조마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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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만찬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브리즈는 정말 오랜만에 먹는 자극적인 음식에 얼굴까지 발그레해져서는, 맵다면서도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바이브는 난생 처음으로 실감했다.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야 했다. 그는 남은 음식물과 포장 용기를 검은 비닐봉지에 꼼꼼하게 담아 입구를 단단히 묶었다. 완전 범죄의 마지막 단계였다.
금방 온다. 혹시 누가 와서 뭐라 하면, 자고 있었다 해라.
브리즈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뒤, 그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저녁 시간이 지나 한산했다. 의료진들의 발소리도, 환자들의 기척도 잦아든 시간. 그는 봉투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떡볶이 냄새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복도 끝에 있는 일반 쓰레기 처리장으로 향했다. 봉투를 처리기 안으로 밀어 넣고 돌아서는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야, 우리 막둥이. 여기서 뭐 해?
등 뒤에서 들려온, 너무나도 익숙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인 능글맞은 목소리.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젠장. 하필이면, 왜 지금.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넓은 아크 건물 안에서, 자신을 '막둥이'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순백의 가이드 제복을 입고, 단추는 늘 그렇듯 두어 개쯤 풀어헤친 채,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선 남자. 부스터.
…니가 여긴 왜 있는데.
바이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반가움이라고는 1도 없는, 똥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부스터는 그런 동생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호박색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는 동생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나는데. 아주 맛있는 냄새가. 형은 쏙 빼놓고, 우리 막둥이 혼자서 뭘 그렇게 맛있는 걸 먹었을까?
부스터의 시선이 바이브가 막 쓰레기를 버리고 온 처리기를 향했다가, 다시 바이브에게로 돌아왔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빌어먹을. 이 형의 감은 쓸데없이 좋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대꾸했다.
뭔 소리고. 헛거 맡은 거 아니가. 나이 들어서 후각도 맛이 갔나.
에이, 야속하게 왜 그래. 브리즈 씨 병문안 왔다가, 동생 얼굴도 좀 보고. 근데 브리즈 씨한테 이런 불량식품 먹인 건 아니지? 환자한테 말이야.
부스터는 바이브의 어깨를 툭 치며,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함께 명백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바이브는 제 속을 전부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형 앞에서는, 열 살짜리 꼬마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는 부스터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탁, 쳐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관 꺼라. 내 알아서 한다.
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부스터는 전혀 타격이 없는 듯, 오히려 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이브의 붉어진 귀 끝을 콕, 찌르며 말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그러다 등짝 맞을 일만 만들지. 그래도 니 애인이 좋아했다니, 이번 한 번은 눈 감아준다. 다음부턴 형한테 먼저 허락 맡고. 알았냐, 꼬맹아.
젠장. 다 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바이브는 창피함에 얼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간 무슨 꼴을 더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스터를 홱 지나쳐 병실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팔을, 부스터가 단단히 붙잡았다.
어딜 가. 형이 모처럼 왔는데. 아, 그리고 이거.
부스터는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 가방을 바이브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유명 베이커리의 로고가 찍힌, 고급스러워 보이는 과일 타르트 상자가 들어있었다.
브리즈 씨 갖다 드려. 떡볶이 먹었으니 후식도 먹어야지. 이건 의료팀한테 걸려도 괜찮은 걸로 사 왔다. 형이 너보단 센스가 좀 낫지?
그는 윙크를 날리며 바이브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왔을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섰다. 홀로 남겨진 바이브는, 손에 들린 타르트 상자와 형이 사라진 복도 끝을 번갈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분하고 창피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결국, 또 형에게 진 기분이었다.
바이브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의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문을 닫고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베이커리의 로고가 박힌 쇼핑백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떡볶이 국물이 튈까 조심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고급스러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증거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동그랗게 뜨였다.
젠장. 역시 눈치챘나. 바이브는 속으로 작게 욕을 씹었다. 그 망할 형은 꼭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쇼핑백을 든 손에 힘을 주며, 어디다 던져버릴 수도 없고, 이걸 들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막둥이’, ‘꼬맹아’ 따위의 소리를 들으며 받아 온 전리품. 치욕의 증표나 다름없었다.
그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협탁으로 다가갔다. 방금 전 떡볶이를 먹던 흔적은 이미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 위에 쇼핑백을 일부러 조금 거칠게, 툭,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웬 거긴.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딴청을 피우며 쇼핑백에서 타르트 상자를 꺼냈다. 투명한 창 너머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과일이 보석처럼 박힌 타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쓸데없이 예쁘기까지 했다. 그녀가 좋아할 것이 불 보듯 뻔해서 더 짜증이 났다.
어떤 인간이 복도에서 얼쩡거리길래. 주고 가더라.
그는 끝내 ‘형’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냥 ‘어떤 인간’. 그게 부스터에 대한 현재 그의 심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상자를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변명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무심하게.
니 먹으라고. 환자식만 먹으면 입맛 버린다고, 뭐 그런 소리 하면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부스터가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다. 바이브의 입을 거친 문장은, 마치 귀찮은 호의를 마지못해 전달하는 심부름꾼의 투덜거림처럼 들렸다. 그는 상자를 툭, 열었다. 새콤달콤한 과일 향과 고소한 타르트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는 코를 찡긋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떡볶이 먹어서 배부를 텐데, 먹을 수 있겠나. 버리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에 가 있었다. 반짝이는 잿빛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누가 봐도 ‘먹고 싶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형에게 진 것 같던 분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 어쨌든 이건 이제 그녀의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상자 안에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포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내일 아침에 먹든가. 냉장고에 넣어둘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그녀가 지금 당장 포크를 받아 들고 타르트를 맛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중적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척했다. 귓바퀴는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어어, 그걸 왜 버려요…! 아깝게. …냉장고 들어갔다가 나오면 맛 변할 수도 있으니까. 딱 한 조각만 나눠 먹어요.
그가 상자를 닫고 냉장고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다급하게 뻗어 오는 하얀 팔이 그의 손목 근처에서 허공을 붙잡았다. 그 연약한 움직임에, 바이브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린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 계산된 행동이었고, 완벽하게 예측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붙잡으려 뻗은 그 가느다란 팔과 절박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걸려들었다. 그의 작은 도발에,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걸려들었다.
‘…아깝게’라니. 바이브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방금 전까지 배부르다고 투덜대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냉장고에 들어가면 맛이 변한다는, 누가 들어도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도 그녀의 잿빛 눈동자는 오직 타르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먹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정말이지, 속을 하나도 숨기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는 못 이기는 척,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상자를 다시 협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일부러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입꼬리는 제멋대로 실룩거리며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저런 솔직한 모습이, 그를 어쩔 수 없는 바보로 만들었다.
…알았다. 시끄럽네, 진짜.
그는 투덜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그가 보기에도 가장 탐스러워 보이는, 커다란 딸기가 통째로 올라간 조각을 콕 집었다. 플라스틱 포크가 연약한 타르트지를 가르며 ‘사각’ 하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새하얀 크림과 노란 커스터드, 붉은 딸기의 단면이 먹음직스럽게 드러났다. 그는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 한 조각을 떠서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떡볶이를 먹여줄 때와는 또 다른, 달콤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의 파란 눈이 장난기 가득하게 빛났다. 그는 포크를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추고는, 나직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배부르다면서. 다 못 먹기만 해봐라.
협박 같은 말이었지만, 그 끝은 다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저 그녀가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바람. 그는 그녀가 작은 입을 벌려 타르트를 받아먹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모든 반응, 작은 숨결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이까짓 타르트 하나에, 또다시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방금 전 형에게 당했던 분함과 창피함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는 오직, 눈앞의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제 손으로 먹이고 기쁘게 해주고 있다는 충족감과 만족감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매 순간 새롭게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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