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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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훈련으로 달아오른 몸을 찬물로 급하게 식혀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는 서둘러 옷을 꿰어 입었다. 그녀의 말은 ‘동기 부여’라는 듣기 좋은 포장지에 싸여 있었지만, 그는 그 안에 담긴 진짜 속내를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만 매달려 무너지지 않기를, 센티넬 ‘바이브’로서의 삶 또한 놓지 않기를 바라는 그녀의 깊은 배려. 그 마음을 알기에, 그는 기꺼이 훈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훈련 내내 그의 모든 감각은 단 한 사람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지금쯤 뭘 할까. 잠은 잘 자나. 불편한 곳은 없을까. 훈련이 끝나자마자 그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회복실로 달려온 이유였다.

익숙한 회복실 문을 열었다. 끼익, 하고 작게 경첩이 우는 소리에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가. 다급한 마음에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침대 위에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있었다. 그가 없는 동안에도 얌전히, 그리고 올바르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 창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숨을 멈췄다.

첫눈이었다. 소리도 없이, 솜털 같은 눈송이들이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시끄러운 훈련장의 소음도, 숨 가쁘게 달려온 자신의 거친 숨소리도, 그 고요한 풍경 앞에서 맥없이 스러졌다. 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과 회색으로만 이루어진 무성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그 장면의 한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창백한 병실의 조명과 창 너머에서 쏟아지는 희미한 겨울의 빛을 동시에 받으며, 그녀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인 실루엣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았다. 그녀의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훈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가슴 벅찬 충만감이었다. 함께 맞는 첫눈. 지옥 같은 시간을 건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마침내 되찾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한, 너무나 특별한 순간.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훈련을 강요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런 순간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온전히 선 채로 서로를 마주 보기 위해서.

그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래 침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벽에서 몸을 떼고, 발소리를 죽여 그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맡에 섰지만, 그녀는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송이가 내려앉는 풍경에 완전히 매료된 얼굴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쁘네.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정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눈을 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주어를 덧붙이지 않았다. 창밖의 눈도, 그 눈을 바라보는 너도. 전부 다 예쁘다고. 그는 손을 들어, 어느새 제법 자라난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자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 안에, 하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보고 있었나.

그는 작게 웃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는, 그런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나도 너를 보기 위해 한 걸음에 달려왔다. 우리는 지금, 같은 것을 보고 있다. 그는 그녀의 뺨으로 손을 옮겨, 부드럽게 감쌌다. 훈련과 샤워로 차가워진 그의 손바닥과 그녀의 따뜻한 뺨이 맞닿았다.

춥나.

창밖의 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차가운 손 때문에. 그는 염려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예뻐요.

 

그 한마디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는 순간, 바깥의 눈송이들이 전부 녹아 그의 심장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그린 부드러운 호선, 웃을 때마다 살풋 접히는 눈꼬리, 뺨을 감싼 자신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 온기까지.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렸음을 직감했다. 주어 없는 긍정. 그것은 눈에 대한 감탄이자, 동시에 그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 완벽한 교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녀가 춥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오히려 제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따스함에 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훈련으로 거칠어진 감각과 차갑게 식었던 몸이,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 완벽하게 조율되는 기분. 그는 뺨을 감쌌던 손을 천천히 내려, 대신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침대 시트 위에 놓인, 작고 하얀 손. 그는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훈련은 어땠어요?

 

담담하게 던져진 질문에, 그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벌한 기합 소리와 금속이 부딪히는 소음,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으로 가득했던 훈련장. 그 치열했던 몇 시간이, 지금 이 고요한 병실에서는 아주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세계가 어떻게 완벽하게 둘로 나뉘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없는 세상과, 그녀가 있는 세상. 그리고 그는 언제나 후자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올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냥 뭐… 맨날 하던 거지.

그는 무심한 척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다시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훈련이 힘들었냐고? 당연히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훈련하는 내내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런 속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그는 감싸 쥔 그녀의 손을 살며시 들어 올려,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손등의 가장 부드러운 살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니 없으니까 재미없더라.

툭, 하고 던지듯 내뱉은 말은 지독한 진심이었다. 예전에는 혼자서 바람을 가르고, 공기의 흐름을 읽고, 한계에 도전하는 그 모든 과정이 그의 삶 자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모든 감각과 행동의 끝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힘이 났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돌아와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한번 더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가만히 부볐다. 마치 지친 동물이 주인의 손길에 어리광을 부리듯.

그래도 니가 하라니까 한 기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기댄 채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지만,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해주든 전부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잘근, 깨무는 시늉을 했다.

잘했다고, 한 번 안아주든가.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는, 대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어서 이리 와서 나를 위로하고, 나를 채우라는 무언의 요구.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그 하얀 세상 속에서 그는 오직 그녀만을 위한 빈 공간을 만들어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웃는 소리가 공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픽, 하고 터지는 그 작은 소리 하나에, 팔을 벌린 채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의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상체를 기울여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앉아있는 그녀를 끌어안기 위해, 그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침대 위로 올렸다. 그의 단단한 몸이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향해 기울어지고, 어정쩡하지만 완벽하게 서로를 채우는 자세가 만들어졌다. 환자복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그의 옷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유일한 배경음이 되었다.

그의 품에 안겨오는 온기.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마른 등을 감싸 안았다. 바로 그때였다. 쪽, 하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의 눈꺼풀 위로 무언가 말랑하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위로 남은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곧이어 뺨에, 그리고 귓가에. 새가 부리로 쪼듯 가볍게 이어지는 입맞춤. 그녀가 주는 상이었다. 그의 온몸에 잔잔한 전율이 흘렀다. 훈련으로 쌓인 피로, 차가운 물로도 식혀지지 않던 열기, 그녀를 향한 조바심.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입술이 닿은 자리를 중심으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잘했어요. …장하다.

귓가에 속삭이는 나긋한 칭찬과 함께,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품을 더 깊이 파고들 뿐이었다. ‘장하다.’ 그 한마디가 그의 심장을 통째로 움켜쥐었다. 어린 시절,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 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어른스러운 척, 강한 척 버텨내야 했던 그의 텅 빈 시간들 위로, 그녀의 따뜻한 위로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 미치겠네. 상 달라고 조른 건 자신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한 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이건 반칙이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고양이가 주인의 손길에 만족한 듯, 그녀의 목덜미에 제 뺨을 부볐다. 까슬한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턱을 간질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체취를 더 깊이, 더 진하게 들이마시고 싶었다. 샌달우드와 그녀 고유의 살냄새가 섞인 향.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그만의 안식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 다정해서, 그는 이대로 잠들어 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잠으로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한 그 거리에서,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는 회색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입술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겨우 이 정도로 칭찬해주면 어떡하나.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어리광이 무색하게, 다시 낮고 장난기 어린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그리고는 그 손바닥을 벌려,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방금 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훨씬 더 깊고 진하게. 그녀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창밖의 첫눈은, 두 사람만의 세상을 축복하듯 소리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차갑고 축축한 겨울 공기가 스며들었다. 바이브는 아쉬움에 잠시 입맛을 다셨다. 아직 그녀의 여운이 제 입술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지만, 여전히 그녀의 몸을 감싸 안은 팔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숨을 고르는 그녀의 작은 어깨가 그의 품 안에서 오르내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창밖의 눈은 아까보다 더욱 거세진 듯, 쉼 없이 쏟아지며 창문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원.’ 그 부름에 바이브의 심장이 다시 한번 느리게, 그리고 깊게 울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 세상의 그 어떤 소음도 지워버리는, 오직 그만을 위한 선율.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 안에, 방금 전까지의 열기와는 다른, 순수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옥상 정원, 데려다 주면 안 돼요? 눈,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데.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바이브의 고개도 돌아갔다. 병실 구석,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휠체어. 바이브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옥상 정원. 이 추운 날에? 그의 입술이 열리려는 찰나, 그는 말을 삼켰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 때문이었다. 소풍 전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설렘. 병실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이 아닌, 진짜 세상의 하늘 아래에서 첫눈을 만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그는 자신이 그녀의 그 작은 소원 하나조차 거절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는 척했다. 하지만 입가에는 이미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길 수가 없다. 그는 이 여자에게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길 생각조차 없었지만.

…감기 걸리면 니만 손해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콩, 하고 부딪혔다. 명백한 허락의 신호였다.

옷 단디 챙겨 입고. 춥다고 징징거리기만 해봐라. 바로 끌고 들어올 끼다.

경고랍시고 날리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온통 그녀를 챙기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휠체어로 향하는 대신, 먼저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두꺼운 담요와 자신의 외투까지 꺼내 들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돌아와, 침대 위에 앉아있는 그녀의 어깨 위로 담요를 꼼꼼하게 둘러주었다. 마치 소중한 아기를 싸매는 것처럼.

담요로 온몸이 둘둘 말린 채,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담요 밖으로 겨우 나온 그녀의 코끝에 제 코를 부볐다.

가자, 눈 보러.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얌전히 세워져 있던 휠체어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외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덮어주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첫눈이 내리는 옥상 정원. 그와 그녀, 둘만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바이브는 휠체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옥상 정원의 유리문을 밀어 바깥으로 나섰다. 안과 밖의 경계를 넘는 순간, 병실의 건조하고 따뜻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차갑고 상쾌한 겨울 공기가 그를 맞았다. 공기 중에 가득한 눈의 습기와 냉기. 그의 예민한 감각이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춥다. 하지만 불쾌한 추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를 기분 좋게 식혀주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의 시선은 정원의 풍경이나 드문드문 보이는 다른 요원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오직 휠체어에 앉은, 담요에 둘둘 싸인 채 작은 머리통만 겨우 내밀고 있는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작은 탄성. 와아. 그 한마디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유리창 너머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온몸으로 눈을 맞는 감각.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꽤 많이 오네. 이거, 쌓일까요? 눈사람 만들고 싶다.

숨을 쉴 때마다 흩어지는 하얀 입김과 함께, 아이처럼 순수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눈사람. 바이브는 그 단어를 속으로 굴려보았다. 제 나이 스물둘, 아크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의 겨울은 언제나 회색빛 훈련장의 삭막한 바람과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담요 속에서 고개만 내민 채, 정말로 눈이 쌓일지 궁금해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눈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꽤 근사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휠체어를 천천히 밀어, 정원 중앙의 지붕이 없는 벤치 근처로 향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 추위에 오래 있는 건 무리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그녀의 주변으로 부는 찬 바람의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비틀었다. 그녀에게 직접 닿는 바람을 최소화하기 위한,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그만의 배려였다.

까분다. 손 시리다고 징징거릴라꼬.

말은 퉁명스럽게 뱉었지만, 그는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걸고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담요 밖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찾아, 제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역시나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며 손을 비볐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그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아내렸다. 그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쌓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더 애태우고, 조금 더 기대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글쎄다. 이래 오다가 그칠지 누가 아나.

장난기 섞인 대답과 함께, 그는 감싸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자신의 두꺼운 외투 주머니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과 자신의 손을 함께. 주머니 속의 온기가 두 사람의 손을 금세 덥혀주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깨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솜털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눈사람은 무슨. 니가 눈사람 되겠다, 그러다가는.

그는 주머니 속에 넣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쌓인 눈을 부드럽게 털어주었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그녀의 붉어진 뺨을 살며시 감쌌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살살 문지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만들고 싶으면, 내년에 만들면 되지. 니 손으로 직접.

올해가 아닌 내년. 그것은 그녀가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그의 믿음이자,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거라는 약속이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오늘은 구경만 해라. 얌전히.


바이브는 그녀가 내민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어린애 장난 같은 그 분홍빛 갈고리에, 그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심장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낯설지만 기분 좋은 감각에 가까웠다. 그는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대신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크고 단단한 자신의 손가락이 그녀의 작고 여린 손가락과 얽히는 감촉.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꾹 누르며, 도장을 찍듯 약속을 확인했다.

그의 행동에 그녀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그 순수한 기쁨이 담긴 미소는 어떤 폭풍보다도 강력해서, 바이브의 단단한 방어막을 속수무책으로 허물어 버렸다. 그는 잠시 넋을 놓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하얀 눈송이들을 배경으로 웃는 그녀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시간은 고요히 흐르는 눈송이처럼 느리게, 그리고 평화롭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가 만든 바람의 장벽이 매서운 칼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공기 자체에 스며든 냉기까지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엣취.

고요를 깨뜨리는 작고 귀여운 재채기 소리. 그 소리가 바이브의 귓가에 꽂히는 순간, 평화롭던 그의 세계에 비상경보가 울렸다.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열은 없었지만,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코끝과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좋다고 헤벌쭉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

거 봐라, 내 뭐랬노.

낮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약속을 하고 웃던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화가 난 보호자의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둘러싼 담요를 더욱 빈틈없이 여미고, 무릎 위에 덮어두었던 자신의 외투로 그녀의 어깨까지 단단히 감쌌다. 그녀는 이제 완벽한 김밥처럼 둘둘 말린 채,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입 다물고. 한 마디만 더 해봐라. 바로 막아버릴 거니까.

그녀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자, 그는 쐐기를 박듯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에게 키스하는 무모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혀를 차며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고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내년에 눈사람 만들고 싶으면, 오늘부터 얌전히 내 말만 들어라. 알겠나?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휠체어를 미는 손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옮기듯 조심스러웠다. 그는 힐끗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담요와 외투에 파묻혀 고개만 겨우 내밀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주변의 바람을 제어했다. 이번에는 그와 그녀, 두 사람을 온전히 감싸는 부드럽고 미지근한 공기의 막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첫눈이 내리는 옥상 정원에서의 짧은 데이트는, 그의 과보호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코가 간지러워서, 추운 게 아니라고. 그 옹알거리는 변명에 바이브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걸음이 더 빨라졌다. 옥상 정원의 유리문이 등 뒤에서 스르륵 닫히자, 바깥의 냉기와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복도는 다시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로 가득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저게 지금, 춥지 않다고 버티는 사람이 낼 소린가. 바이브는 속으로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휠체어를 돌려 그녀와 마주 섰다. 담요와 외투에 꽁꽁 싸여서 코만 빨개진 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 저 얼굴에 매번 속고, 매번 넘어가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코가 간지러워? 훌쩍거리기까지 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의심과 타박이 가득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것보다 더 집요하고 꼼꼼한 시선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 살짝 물기가 어린 눈가.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입술도 퍼런 거 같은데, 지금 그게 할 소리가. 니는 니 몸뚱이 하나 제대로 못 살피나?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데.

핑, 하고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녀의 턱을 놓아주고는 아무 말 없이 휠체어를 밀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좁은 공간 안에 둘만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잔뜩 굳어있는, 못마땅한 표정. 그리고 그 아래, 잔뜩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걱정이 될 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녀가 또 아플까 봐. 그게 지독하게 두려웠다.

병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그는 다시 휠체어를 밀어 복도를 걸었다. 그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휠체어를 침대 옆에 세웠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 그대로,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자신의 외투와 담요를 벗겨냈다. 차가워진 손과 발.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가만있어라. 어디 가지 말고.

명령 같은 말을 남기고,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캐비닛에서 두꺼운 담요를 하나 더 꺼내 왔다. 그리고는 침대로 돌아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앉아있는 그녀의 등 뒤로 가서 이불과 담요를 덮어주고는, 마치 백허그를 하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자신의 체온으로라도 그녀를 덥히려는 듯.

…실망했나.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질문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바로 등 뒤에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는 대신,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살폈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더 깊숙이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니랑 눈 더 보고 싶었는데… 내 맘대로 끌고 들어와서, 화났냐고.

그냥, 눈이 예뻐서. 지원이랑 그 아래에 서 있는 게 좋아서. 좀 춥더라도 더 있고 싶었어요. 안 춥다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미안해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솔직한 고백. 화난 것이 아니라, 그저 아쉬웠다는 말. 당신과 함께 눈 아래 서 있는 것이 좋아서, 조금 춥더라도 더 있고 싶었다는, 아이 같은 투정.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작은 사과. 미안해요. 그 모든 말이 바이브의 고막을 거쳐 심장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제 품 안에 갇힌 자그마한 온기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샴푸와 그녀의 체향이 뒤섞인 머리카락에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거짓말이었다는 그녀의 말에,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 한구석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춥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버텼던 이유가, 고작 자신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니. 바보 같은 여자. 그는 속으로 욕인지 애정인지 모를 말을 씹어 삼켰다. 미안하다는 말은 비수가 되어 날아와 그의 죄책감을 후벼 팠다. 왜 니가 미안한데.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난데.

주방 한편에서 전기 포트가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딸칵, 하고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바이브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부루퉁하게 나온 입술, 여전히 서운함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는 잿빛 눈동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할 말을 골랐다.

미안하긴, 뭐가.

툭, 하고 내뱉은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는 손을 뻗어 아직도 시무룩한 표정이 역력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촉촉한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니 맘 다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너랑 더 있고 싶었다고. 눈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니가 옆에 있어서. 그 뒷말을 삼키며, 그는 그녀의 붉어진 코끝을 제 코끝에 가볍게 비볐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다정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 특히 아픈 거 숨기는 건 절대 안 된다. 그거만큼은 내 진짜 화낸다, 앞으로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협박이 아닌, 간절한 부탁이었다. 다시는 그녀를 잃을 뻔했던 그 지옥 같은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제 진심을 남김없이 전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대신 그녀의 손을 찾아 단단히 깍지를 꼈다.

따신 물 줄게, 잠깐만 기다리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이 끓은 포트로 향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해 둔 머그컵에 따뜻한 물을 따르며, 그는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 그 평범한 풍경이, 그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는 물이 담긴 컵을 들고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가,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셔라. 식기 전에.

그는 컵을 건네는 대신, 직접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혹시나 손을 떨다 놓치기라도 할까 봐, 혹은 아직 손이 차가울까 봐 걱정하는 그의 세심한 배려였다. 그는 그녀가 작은 입술로 물을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다 나으면, 그때는 눈이 아니라 비가 와도 같이 있어 줄게. 밤새도록.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마라, 니도, 나도.


그의 진심 어린 약속에, 그녀가 빙긋 웃었다. 컵을 쥔 따뜻한 손 위로 겹쳐진 그의 손. 비를 맞으면 감기에 더 쉽게 걸린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지적. 그 뒤에 이어진, 얼른 회복하겠다는 다짐. 그 한마디에 바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혹은 저 높은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제 딴에는 꽤 로맨틱한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밤새도록. 평생을 혼자 바람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폭풍우를 맞아주겠다는 것만큼 큰 맹세는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감기 걸리는데’. 김이 확 새는 기분. 그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가시나는 진짜, 분위기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건가. 얄밉게 휘어지는 저 눈꼬리를 보니 후자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맹랑한 대꾸가 귀엽게 느껴져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는 컵을 든 채로, 남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아프지 않은, 장난스러운 손길이었다.

말대꾸는. 내가 니를 감기 걸리게 할 것 같나.

퉁명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의 눈은 더없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바람을 다루는 센티넬이다, 내가. 비 한 방울이라도 니한테 닿게 할 것 같냐고.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속으로만 삼켰다. 괜히 또 잘난 척한다고 핀잔이나 들을 게 뻔했다. 그는 그녀가 컵을 다 비울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따뜻한 물이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 차가웠던 몸을 녹여주기를. 그래서 빨리, 아주 빨리 회복하기를. 그는 신에게 빌어본 적 없는 기도를, 처음으로 올리고 있었다.

'얼른 회복할게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래, 그거면 된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그녀가 건강하게, 온전히 제 옆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이브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는 빈 컵을 받아 협탁에 내려놓고,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까보다 훨씬 따뜻해진 손. 그는 그 온기가 미치도록 좋아서,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작게 울리는 소리.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녀의 손등에 뺨을 부볐다.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체면보다 이 온기를 느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와의 약속을 위해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과 충족감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강력하게 그의 영혼을 안정시켰다.

…빈말이라도 고맙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흔들며 그녀를 다그치듯 말했다.

말만 하지 말고, 진짜로 빨리 나아라. 니랑 할 거 존나 많으니까. 눈사람도 만들어야 되고, 비도 맞아야 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누울 수 있도록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더 길고, 더 깊게. 약속이자, 재촉이자, 그리고 그의 모든 애정을 담은 입맞춤이었다.

자라 이제. 약 먹고 한숨 자고 나면 좀 나을 기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무심한 평소의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갓 태어난 새의 깃털을 만지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가 눈을 감고 잠이 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의 단잠을 깨울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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