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공기의 흐름처럼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차가운 바람이 복도를 감도는 11월의 중순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기적처럼 아주 조금씩 자신의 세상을 되찾고 있었다. 앙상했던 뺨에는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바이브는 그녀가 챙겨 먹는 식사의 양이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늘어나는 것을 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그녀가 제 두 발로 다시 땅을 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보조 보행 기구에 의지한, 위태롭고 서툰 걸음마. 하지만 바이브에게는 그 어떤 화려한 비행보다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매일 오후,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 나서는 복도에서의 걷기 연습은 둘만의 새로운 의식이 되었다. 처음에는 ‘지원에게 걷는 법을 배우다니, 어쩐지 진 기분이에요.’라며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였다. 그 말에 그는 ‘그럼 엎드려 기어 다닐 거가?’라며 핀잔을 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었다. 그녀다운, 지고는 못 사는 그 성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기뻤기에.
하지만 요즘, 그녀는 말이 없어졌다. 그저 제 옆에 나란히 선 그의 팔을 가볍게 붙잡고, 그의 보폭에 제 걸음을 맞추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느릿하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복도에 울리는 것은 보행 기구가 바닥을 짚는 단조로운 소리와 두 사람의 나지막한 숨소리뿐이었다. 바이브는 제 옆에서, 숨을 고르며 땀 흘리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 정확히는 그의 발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의 걸음걸이를 그대로 복사하려는 학생처럼, 진지하고 또 고요했다.
그 모습이, 바이브의 심장을 낯선 감각으로 가득 채웠다. 경쟁하듯 투닥거리던 이전과는 다른, 깊고 조용한 신뢰. 제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고, 그의 리드에 기꺼이 몸을 싣는 완전한 의탁. 그는 그녀가 더 이상 ‘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발을 맞추어 걷는 이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승리이자 기쁨이라는 것을. 그 깨달음은 묵직한 감동이 되어 그의 가슴을 쿵, 하고 울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속도에 맞춰 아주 천천히 복도 끝을 향해 걸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그녀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공기의 미세한 진동을 통해 그녀의 가빠오는 호흡을 읽고, 그녀의 근육이 어느 정도의 긴장을 버티고 있는지 파악했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미세한 떨림으로, 그녀가 느끼는 피로의 정도를 가늠했다.
……힘들면 말해라.
한참 만에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다정하게 풀려 있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제 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거의 다 왔다. 저기 창문까지만 갔다 올까.
그가 복도 끝, 커다란 창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다시 병실의 침대에 눕기 전에, 저 따스한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그녀의 의사를 묻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만 더. 할 수 있겠나.
그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함께, 그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너는 할 수 있다’는 무언의 응원이, 그의 모든 것을 통해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가 다시 일어서서, 저 햇살 속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갈 그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후아.
그녀의 가쁜 숨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채웠다. 단 한 음절의 짧은 탄식이었지만, 그 안에는 지난 몇 걸음의 고통과,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다는 안도, 그리고 제 한계를 밀어붙인 자의 희미한 성취감이 모두 담겨 있었다. 바이브는 제 손을 붙잡은 채 의자에 주저앉는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체중을 지탱해주며, 그녀가 의자에 완전히 몸을 기댈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걸리적거리는 보조 보행 기구를 소리 나지 않게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이제 그의 시선은 의자에 앉은 그녀의 눈높이와 정확히 맞춰졌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늦가을의 햇살이 그녀의 지친 얼굴과, 그 모습을 경건하게 올려다보는 그의 머리 위로 고요히 부서져 내렸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성역.
그는 아직 놓지 않은 그녀의 손을 제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힘겨운 노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이 안쓰러우면서도,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온기가 미치도록 소중했다. 그는 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며, 그녀의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옅게 홍조가 어린 얼굴은, 그가 아는 그 어떤 풍경보다도 아름다웠다.
잘했다. 잘했다, 내 가시나. 수십 번도 더 속으로 되뇌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다. 지금 칭찬을 해버리면,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제 발로 이곳까지 걸어왔다. 그 당연했던 사실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처럼 느껴졌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키며, 대신 장난기 섞인 핀잔을 가장한 칭찬을 건넸다.
꼴랑 이까지 걷고 이래 퍼지면, 나중에 내 손 잡고 예식장은 어찌 들어갈래.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그녀의 떨림이 제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이 농담에 또 발끈해서 ‘그땐 날아갈 건데요!’ 하고 받아치길 바랐다. 그녀의 그런 생기 넘치는 모습이, 그는 보고 싶었다.
수고했다. 오늘은.
그가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제게 기대게 했다. 그녀의 정수리에서 나는 익숙한 샌달우드 향과 샴푸 냄새가 섞여,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크의 정원 너머로, 멀리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저 하늘을 다시 함께 날아다닐 날이 올 것이다.
봐라. 니가 보고 싶어 하던 바깥이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바깥 풍경이 아닌, 제 어깨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그녀의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속눈썹, 옅게 벌어진 입술, 평온을 되찾아가는 표정. 그 모든 것이 그의 세상을 이루는 조각들이었다.
조금만 쉬다가 들어가자. 니, 오늘 국밥 한 그릇 다 묵을 만큼 운동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다시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이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다음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그는 기꺼이 그녀만의 보호자가, 그리고 영원한 동행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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