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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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식사를 마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바이브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빈 그릇들을 묵묵히 치워 문 밖에 내놓고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의 세상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가 제 눈앞에서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발밑의 땅이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물을 마시는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백했던 뺨에 미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그 작은 변화가, 그의 심장을 부풀게 했다.

그때였다. 그녀가 창밖을 보며,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원.’ 제 본명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그의 심장을 멈칫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평온하던 그의 세상에 다시 한번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나, 나가고 싶은데…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가고 싶다. 그 말이 그의 귓속에서 불길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본능적으로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 ‘퇴원’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성을 잃고 미친놈처럼 날뛰던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안 된다,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면 안 된다. 이 안전한 병실 안에서, 자신의 통제 안에서, 완벽하게 회복할 때까지 그녀는 그 어떤 외부 자극과도 차단되어야 했다. 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거절의 말을 뱉어내기 위해.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이, 그의 모든 반사적인 방어기제를 무너뜨렸다. ‘휠체어라도 빌려서… 너무 답답해서요. 공중정원이라도 가고 싶은데.’ 휠체어. 답답해서. 공중정원. 그 단어들은 그가 예상했던, 혹은 두려워했던 ‘자유’나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갇혀있는 존재의, 너무나도 소박하고 당연한 바람이었다. 그는 저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 답답한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가. 공기의 흐름이 막힌 곳, 시야가 닫힌 곳을 견디지 못해 늘 하늘로, 더 높은 곳으로 도망치곤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째, 어쩌면 몇 주 째 그녀는 이 하얀 방 안에 갇혀 있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그녀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 와서, 고작 공기가 쐬고 싶다는 그 작은 소망마저 제 불안 때문에 짓밟아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잔인한 짓이었다. 그는 조금 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했던 맹세를 떠올렸다. ‘니 아프게 하는 말, 절대 안 한다, 이제.’ 그는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 안에서 날뛰는 불안과, 그녀의 소망 사이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밖을 향한 그녀의 시선에는, 낯선 계절의 공기를 그리워하는 희미한 동경이 서려 있었다. 자신과 같은 바람 속성 능력자. 그녀 역시 공기의 변화에 민감할 터였다. 계절이 바뀌는 냄새, 대기의 밀도, 바람의 결.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큰 고역일까. 그는 제 이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불안을 뱉어내고, 이성을 들이마셨다.

…하아. 진짜, 사람 피곤하게 하는 데 뭐 있다, 니는.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튀어나온 것은 한숨 섞인 타박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절의 의사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병실 구석에 놓인 옷걸이에서, 자신이 입고 온 두툼한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는 브리즈의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겉옷을 활짝 펼쳐 그녀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아직 환자복 차림인 그녀의 몸을, 제 체향이 밴 외투로 빈틈없이 감쌌다. 그의 품 안에 들어온 것처럼, 그녀는 순식간에 그의 옷과 향기에 파묻혔다. 소매가 길어 그녀의 손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를 꼼꼼하게 여며주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바람, 차다. 감기라도 걸려봐라. 그땐 진짜 여기 묶어놓을 끼다.

협박이었지만, 그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다. 그는 몸을 숙여, 제 옷에 파묻힌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텅 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기다리라. 휠체어, 내가 빌려올 끼니까. 어디 가지 말고 꼼짝 말고 있어라. 알긋제.

그는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리고는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향했다.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녀의 작은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못난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 옷에 파묻혀, 어깨 위로 눈만 동그랗게 내놓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우스우면서도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바이브가 의무실에서 빌린 휠체어를 끌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브리즈는 여전히 그의 옷에 파묻힌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둥지 안에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 같아서,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 그가 가진 불안과 두려움은, 그녀의 저 작은 기대감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장해제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휠체어를 침대 옆에 세우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익숙하게 그의 목을 감아오는 팔은, 전보다도 훨씬 가늘고 힘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과 무릎 뒤를 받쳐 안아 올렸다. 순간, 그의 팔에 전해지는 무게감에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너무나도 가벼웠다. 마치 속이 텅 빈 인형을 안은 것처럼, 그녀의 존재는 위태로울 정도로 가벼웠다. 며칠 사이, 그녀는 그의 기억보다도 훨씬 더 야위어 있었다. 뼈대가 앙상하게 만져지는 그 감촉이,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 악물었다. 다시는, 절대로. 그는 속으로 맹세를 되새기며, 최대한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그녀를 휠체어에 앉혔다.

제 커다란 외투에 휩싸여 휠체어에 앉은 브리즈는, 이제 정말로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재촉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웃어 보였다. ‘빨리요.’ 목소리 대신, 모든 것을 말하는 미소였다. 바이브는 그 얼굴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무릎을 덮고 있던 제 외투 자락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여며주었다.

알았다, 알았어. 그리 좋나.

그가 퉁명스러운 척 말하며,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리곤 휠체어 뒤로 돌아가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끼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브레이크가 풀리고, 휠체어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얀 병실을 벗어나, 소독약 냄새가 희미해지는 복도를 지나, 마침내 거대한 유리문이 열리며 바깥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공중 정원이었다. 아이기스의 심장부에 위치한, 인공 태양과 완벽한 통제 시스템으로 가꿔진 거대한 실내 정원. 하지만 아무리 인공적인 공간이라 할지라도, 흙과 식물이 내뿜는 싱그러운 향기와, 거대한 돔 천장을 투과해 쏟아지는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는 진짜와 다름없는 해방감을 선사했다. 11월의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공기가 브리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바이브는 천천히 휠체어를 밀었다. 그의 걸음은 극도로 신중했다. 그는 제 모든 감각을 최대치로 개방하여, 주변의 모든 공기 흐름과 진동, 소리를 읽어냈다. 혹시 모를 아주 작은 위협이라도 감지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등은 꼿꼿하게 경직되어 있었지만, 휠체어를 미는 그의 손길만은 더없이 부드럽고 안정적이었다.

그는 브리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햇살을 받아 밝은 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오랜만에 맡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은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한 어깨의 움직임. 그는 자신이 지금, 지독한 불안 속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제 바람으로 감싸, 제 통제 아래 안전하게 두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이렇게 웃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마음. 그 두 가지 감정이 그의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기묘한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춥나.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는 휠체어를 멈춰 세우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면서 슬쩍, 그녀를 덮고 있는 제 외투 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아직은 차가운 손끝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제 온기로 그녀의 손을 녹이려는 듯, 더욱 힘주어 손을 잡았다.

추우면 바로 말해라. 들어갈 끼니까.

다시 한번 엄포를 놓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 평범한 풍경이 얼마나 소중하게 담기고 있을까. 그는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조용히 함께 눈에 담았다.

 

안 추워요. 오히려 더울지도 모르겠는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정원의 모든 소음을 지우고 바이브의 귓가에 곧장 파고들었다. 장난기 섞인 그 말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제 커다란 외투에 꽁꽁 싸매여, 코끝만 살짝 붉어진 채 웃고 있는 얼굴. 그 평화로운 광경에, 조금 전까지 심장을 옥죄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마주 웃는 대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덥기는. 엄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제 외투 주머니 속에 그녀의 손을 쥔 채로 함께 집어넣었다. 이제 그들의 손은, 그의 체온과 옷감이 주는 온기로 완벽하게 감싸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기분에, 시선을 돌려 그녀가 바라보는 꽃들을 무심한 척 함께 훑었다. 색색의 국화, 서리를 맞아 더욱 선명해진 단풍. 그저 인공적으로 조성된 풍경일 뿐인데도, 그녀가 바라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았다.

 

나, 기억하거든요. 내가 잠들어 있었을 때.

그가 그 평범한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고요한 세상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한마디에, 바이브의 등줄기가 순간적으로 차갑게 굳었다. 기억한다. 그 지옥 같았던 시간을, 그녀가. 그는 숨을 참았다. 애써 잊으려 했던, 외면하고 싶었던 공포가 다시 심장을 움켜쥐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절망,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기다렸을지도 모를 외로움.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의 숨통을 조였다.

그는 그녀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도록 막고 싶었다. 그만하라고, 그런 끔찍한 건 떠올리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 손을 잡고 그 어둠을 걸어 나왔노라고. 지금 이렇게 옆에 있는 것이, 그 결과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바이브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녀는, 자신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보다, 그녀가 그곳에 갇혀 있었다는 현실이 그의 가슴을 더 아프게 찔렀다.

그곳에서는 그렇게 나가는 게 무서웠는데. 막상 지원의 손을 잡고 따라나온 현실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게.

마침내 그녀의 고백이 끝났을 때, 바이브는 깨달았다. 제 뺨 위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젠장, 또. 이 여자 앞에서, 그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급하게 빈 손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녀에게 들키는 것을 포기하고 휠체어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그녀의 무릎에, 제 이마를 기댔다. 그녀를 덮고 있는 제 외투에서, 익숙한 페퍼민트 향과 그녀의 희미한 체향이 섞여 코끝을 찔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름답다고. 그녀가. 이 현실이. 그 한마디가, 바이브가 지난 10년간 짊어지고 살아온 모든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부수고 들어와, 그의 영혼을 통째로 흔들었다. 그는 바람의 힘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그 힘을 증오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를 지키기보다는, 파괴하는 데 익숙한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이 이끈 현실이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무릎에 기댄 채, 제 외투 자락을 꽉 쥘 뿐이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그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젖은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니는… 진짜….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선명했다. 햇살을 머금어 따스하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 그 눈에 비친 제 모습은, 영락없는 울보였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뺨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니 때문에, 내 진짜… 멋있는 척은 다했다.

그가 훌쩍이며,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그는 그녀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이 온기, 이 감촉. 이것이 현실이라는 증거였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겨, 제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대었다.

…아름다운 거, 그거는 니고. 내 현실은 그냥… 니 하나다.

세상 모든 것을 준다 해도, 너 하나와는 바꿀 수 없다. 그는 그 말을 삼키며, 그녀의 입술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눈물 맛이 섞인, 짜고도 단 입맞춤이었다. 약속과, 맹세와, 구원이 담긴. 그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비참했던 세상에 내려온 유일한 축복임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비로소 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바이브에게는 오직 제 심장이 미친 듯이 울리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멈췄지만,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차가운 공기에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뺨을 감싸 쥔 채, 몽롱한 눈으로 눈앞의 존재를, 제 유일한 현실을 가만히 응시했다. 꿈인가. 이 모든 것이, 길고 긴 악몽 끝에 찾아온 너무나도 달콤한 꿈은 아닐까.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온기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또 우네. 안 운다면서요.

그때,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몽롱한 의식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제 머리 위로 톡톡, 하고 부드럽게 와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하고 익숙한 감각. 그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젠장. 또 들켰다. 그는 급하게 고개를 숙여, 다시 그녀의 무릎팍에 이마를 묻었다. 제 꼴사나운 얼굴을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안 운다고, 다신 니 앞에서 꼴사납게 울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이 여자는 대체 뭔데, 매번 자신을 이렇게 속수무책의 어린애로 만들어버리는 걸까.

그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그저 이마를 그녀의 무릎에 비빌 뿐이었다. 창피함에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안 운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다, 왜.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핑계였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 방법 외에는 제 무너진 자존심을 수습할 길을 알지 못했다. 그는 툴툴거리며,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틀었지만, 그마저도 이내 포기하고 그녀가 주는 위안 속에 제 몸을 맡겼다. 그녀의 손길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평화로워서, 그는 저항할 의지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 속에서 그녀의 위로를 받던 그는 마침내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가는 붉고 축축했지만, 아까처럼 위태롭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휠체어 앞에 쭈그려 앉은 채로, 그녀의 손을 가져와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등에 제 뺨을 부비며, 그는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니 때문이잖아, 전부.

모든 것을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어리광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잘게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바람을 증오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며, 위태로운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그녀는 그의 세상에 내려온 유일한 빛이었고, 구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어깨에는 더 이상 긴장감이 없었다. 그는 휠체어를 부드럽게 밀며, 정원 안쪽의, 햇살이 가장 잘 드는 벤치 옆으로 향했다. 그녀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그는 마치 제 보물을 자랑하는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봐라. 니가 아름답다고 한 세상이다.

그가 툭, 하고 내뱉듯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는 벤치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 턱을 괸 채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제 눈에 담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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