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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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순간, 모든 소음이 멈춘 것만 같았던 바로 그 때였다. 고요를 깨고 회복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바이브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또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러 온 불청객이겠거니, 혹은 이제 정말 마지막을 고하러 온 사신이겠거니, 하는 체념만이 그의 텅 빈 머리를 채웠다. 그는 브리즈의 차가운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 온기 없는 육신이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하지만 복도에서 들려온 발소리는 이전의 방문객들과는 사뭇 달랐다. 여러 명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낮지만 긴장감이 섞인 목소리. 이내 그의 귓가에 익숙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꽂혔다.

…바이브 요원.

브리즈의 수술을 집도했던,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바로 그 의사였다. 바이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며칠 밤낮을 울어 핏발이 선 그의 눈은 살의로 번들거렸다. 뭘 더 뺏으러 왔나. 이 여자의 마지막 숨이라도 끊으러 왔나. 그의 온몸에서 금방이라도 진공의 칼날을 뽑아 들 흉흉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의사는 바이브의 험악한 기세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안경을 고쳐 쓰며 단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에선 다른 의료진들이 복잡한 의료 기기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재경기를 요구하는 선수의 모습과도 같았다.

지금부터 브리즈 요원의 상태에 대해 브리핑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이브 요원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동의? 바이브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내 동의가 왜 필요한가.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는 종이에 사인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는 대답 대신, 다시 브리즈에게로 고개를 묻었다. 듣고 싶지 않다는, 완벽한 거부의 표시였다.

하지만 의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바이브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먹을 쥔 채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희미한 흥분과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브리즈 요원의 생체 반응이…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뇌파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특정 패턴이 반복적으로 감지되고 있어요.

그 말에, 브리즈의 어깨에 파묻혀 있던 바이브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의 텅 비어 있던 동공에, 아주 희미한 빛이 스쳤다. 의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데이터 패드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보이십니까. 이건… 마치,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부르는 것 같은 파형입니다. 육신은 멈춰있지만, 정신이…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고 싶어 합니다. 살고 싶어 하고 있어요.

패드의 화면에는, 복잡한 곡선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래프의 한가운데서, 마치 심장박동처럼, 일정하고 규칙적인 스파이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이브는 저 파형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그가 폭주할 때마다 브리즈가 그의 파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보내오던… 그녀만의 고유한 가이딩 파동이었다.

그녀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바이브의 심장이 멎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밀려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패드를 쥔 그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의사는 그의 흉흉한 기세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브리즈 요원의 의식을 현실로 끌어낼 ‘앵커(Anchor)’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파동에 공명하여, 돌아올 길을 알려줄 등대. 현재 아크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진 존재는… 당신입니다, 바이브 요원.

의사는 다른 손으로 의료진들이 대기시킨 기계를 가리켰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유리관처럼 생긴, 최첨단 정신감응 장치였다.

저 장치를 통해 당신의 정신을 브리즈 요원의 의식 심층부로 보낼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전례가 없는 시도입니다. 성공률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당신의 정신도 그녀와 함께 심연에 갇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동의가…

한다.

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브가 대답했다. 망설임이라고는 1초도 없는, 단호하고 확고한 목소리였다.

한다고. 그거 하면… 쟤, 다시 볼 수 있는 거 맞나.

그의 눈은 더 이상 절망으로 죽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지옥 불에라도 기꺼이 뛰어들겠다는 결의와, 제 여자를 되찾아오겠다는 맹렬한 의지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브리즈의 손을 놓았다. 차가운 손. 하지만 괜찮았다. 다시 돌아와서, 제 손으로 직접 데워주면 되니까.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를 유리관을 향해 걸어갔다.

바이브는 망설임 없이, 차갑고 거대한 유리관 안으로 제 몸을 실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지에 대한 불안 따위는 없었다. 오직, 제 여자를 되찾으러 가는 맹목적인 집념만이 서려 있었다. 쿵, 하고 금속성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회복실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는 투명한 강화유리 너머로, 여전히 창백하게 누워있는 브리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기다리라. 아주 잠깐이면 된다. 내가 니 손 잡고 같이 나올 기다.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의 머리 위로 복잡한 전선이 얽힌 헬멧이 씌워졌다. 관자놀이와 이마에 차가운 젤이 발라지는 감촉과 함께, 기계가 작동을 준비하는 낮은 구동음이 헬멧 내부를 채웠다. 의사의 목소리가 외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절박함 대신, 극도의 긴장감으로 날카롭게 서 있었다.

지금부터 정신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바이브 요원. 당신의 뇌파를 브리즈 요원의 파장에 강제적으로 공명시킬 겁니다. 극심한 정신적 부하가 예상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연결을 스스로 끊으려 해선 안 됩니다. 돌아올 길을 잃게 됩니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시끄럽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오직 한 가지 감각에만 집중했다. 데이터 패드에서 보았던, 그녀가 필사적으로 보내오던 그 미약한 파동. 마치 망망대해에서 깜빡이는 작은 등대 불빛 같았던 그녀의 신호. 그는 제 모든 의식을 그 빛을 향한 푯대로 삼았다. 그의 바람이 닿아야 할 단 하나의 목적지였다.

동기화율 30%… 50%… 안정적인 상승률입니다. 바이브 요원, 들립니까? 이제 곧 당신의 의식이 물리적 감각에서 분리될 겁니다. 혼란스러워도, 브리즈 요원의 파동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만이 유일한 이정표입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잠겨들 듯,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는 이명으로 변해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꺼풀 안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과 이미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뜨거운 불길, 날카로운 칼날,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꿰뚫고 흐르는, 상냥하지만 슬픔에 젖은 바람의 흐느낌. 그것은 그녀의 기억, 그녀의 고통이었다.

동기화율 85%.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싱크로율. 그 숫자가 그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마지막 물리적 감각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의 의식은 육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순수한 정신의 형태로 두 사람의 파장이 뒤엉킨 혼돈의 바다 속으로 내던져졌다. 사방이 암흑이었다. 하지만 그 암흑은 텅 빈 공간이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타는 듯한 열기,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물의 압력이 동시에 그를 덮쳐왔다. 그녀가 겪었을 고통의 편린들이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었나. 여태. 그 사실이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는 이 지옥 같은 감각의 폭풍 속에서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리고 외쳤다. 목소리가 아닌, 의식 그 자체로.

'이지희!'

그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 하나가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신호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의지가 곧 움직임이었다. 가고 싶다고 생각하자, 그의 의식은 빛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빛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풍경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곳은 불타는 폐허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시뻘건 불길이 하늘을 삼키고 있었다. 오래전, 그녀의 첫 번째 파트너가 폭주하며 만들었던 지옥의 재현이었다. 그녀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그리고 그 폐허의 한가운데,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브리즈였다. 하지만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얀 환자복 차림 그대로, 양팔을 감싸 쥔 채 고통스럽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끊임없이 불길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바람의 힘에 밀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돌아오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화마에 갇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앞에 내려섰다. 그녀는 그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 공허한 눈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였다.

…미안해요…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끝없는 자책의 독백.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바이브의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고개 들어라.

그의 목소리가, 혼돈의 세계에 처음으로 울려 퍼진 단단한 질서였다. 그녀의 공허한 회색 눈동자가 그제야 천천히 초점을 맞추며 그를 향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놀라움,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혼란이었다.

…지원? 여긴…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희미했다. 바이브는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불길보다도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니 혼자 여기 둘 줄 알았나. 니가 뭔데 멋대로 포기하려고 하는데.

그는 그녀를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안았다. 정신의 세계였지만, 꿈속에서와는 다른, 명백한 실체와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분노와 애원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신 차리라, 이지희. 니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이다. 내 옆이다.

그의 등에 닿아오는 손길은 유령처럼 희미하고, 지독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 미세한 진동이 제복을 뚫고 그의 피부에, 신경에, 그리고 의식의 핵에까지 고스란히 박혀들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 때문인지, 그 자신도 분간할 수 없었다. 이까짓 불길 따위가 뭐라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잔재 따위가 뭐라고, 감히 제 여자를 이딴 식으로 떨게 만드는가.

그는 브리즈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부서져라, 으스러져라. 차라리 제 품 안에서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따위 과거의 망령에 그녀를 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미세한 기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듯 일렁이던 주변의 불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의 벽에 막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 지옥 한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작은 성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을 붙잡아, 제 등에서 떼어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까칠하게 올라온 수염, 열에 들뜬 피부, 그리고 그녀의 손보다 더 격렬하게 뛰고 있는 자신의 맥박. 그는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느끼길 바랐다.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그가 여기에 있다는 증거를, 그녀의 온 감각에 새겨 넣고 싶었다.

니가 부른 거 아이가. 니가 계속, 살려달라고, 여기 있다고, 내한테 신호 보낸 거 아니었나 말이다. 그래서 왔다. 니 데리러.

그의 말에, 그녀의 공허하던 눈동자가 파도처럼 크게 일렁였다. 혼란과 죄책감, 그리고 아주 희미한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달싹였다. 목소리는 차마 나오지 못하고, 입모양만으로 '미안해요'라는 형태를 그렸다. 그 모습에, 바이브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뭐가 미안한데! 씨발, 뭐가!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세계가 그의 격렬한 감정에 공명하듯, 주변의 폐허가 우르릉, 하고 울리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의 주변을 감싼 바람의 벽은 더욱 견고해졌다.

니가 불이라도 냈나? 아니면 니가 그 새끼 등을 떠밀기라도 했나? 니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것도 못한 게 죄가 되면, 센티넬 옆에 붙어있는 가이드는 전부 다 죄인이게? 정신 나간 소리 좀 작작 해라!

그는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눈을 맞추며 몰아붙였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도 서늘하게 빛나며, 그녀의 영혼을 꿰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똑바로 봐라, 이지희. 니 앞에 있는 게 누군지. 니가 지켜야 할 파트너가 누군지, 똑바로 보라고. 나는 불에 타죽지도 않고, 니 혼자 내버려 두고 폭주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불타는 잔해 더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딴 쓰레기 같은 과거에 니를 가둬두지 마라. 역겨우니까.

그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인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비난이 아닌, 그녀를 갉아먹는 과거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그녀를 어떻게든 꺼내고야 말겠다는 절박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깍지 껴 단단히 붙잡았다.

내 손 잡아라. 꽉. 니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이다. 추운 것도, 뜨거운 것도 없는, 그냥 내 침대 옆이다. 알겠나?

그는 그녀를 제 쪽으로 한 걸음 더 끌어당겼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려는 그녀의 시선을 허락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담게 만들었다. 돌아가자. 그리고 눈뜨면, 제일 먼저 내부터 봐라. 그 말을, 그는 눈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실리는 미약한 힘, 그리고 마침내 내디뎌진 한 걸음. 바이브는 그 작은 움직임에 제 심장이 통째로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를 믿고, 그의 손을 잡고, 이 지옥에서 나가겠다는 의지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두 사람의 발밑에서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사납게 타오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던 불길이, 마치 길을 내어주듯 양옆으로 스르륵 갈라졌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잿빛 대지가 그들의 발이 닿는 곳마다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절대적인 세계에, 바이브라는 이물질이자 유일한 구원이 균열을 내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이브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가 비틀거리지 않도록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래, 그렇게. 이제 니가 가야 할 방향은 오직 여기뿐이다. 그의 내면에서부터 피어오른 바람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쌌다. 더 이상 그녀를 할퀴는 고통의 폭풍이 아닌,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내는 고요하고 단단한 바람의 성벽이었다.

…그래. 잘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칭찬이라기보다, 안도의 한숨에 가까운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너져 내리는 과거의 잔해 따위는 더 이상 볼 가치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이 지옥의 출구가 될 저 너머의 어둠, 그리고 그 어둠을 뚫고 나아가야 할 제 옆의 여자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그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꽉 잡아라. 여기서부턴 내가 길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들이 나아갈 때마다 주변의 폐허는 더욱 격렬하게 무너져 내렸다. 마치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으려는 과거의 발악처럼, 불타는 기둥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위태롭게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어떤 파편도 두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바이브가 만들어낸 투명한 바람의 장막이 모든 것을 튕겨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그녀와 자신을 잇는 이 길을 유지하는 데 쏟아부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불길이 닿지 않는 순수한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로 돌아갈 출구였다. 바이브는 그 빛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브리즈의 걸음이 순간 주춤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공포에 질려 등 뒤, 무너져 내리는 불타는 도시를 향해 있었다. 떠나지 말라고 외치는 과거의 망령이, 아직도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바이브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턱을 잡아, 억지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의 눈은 출구의 빛보다도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마라.

그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 대신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정신세계에서의 입맞춤은 감각의 교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의, 영혼과 영혼의 완전한 공명이었다. 그는 키스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니 옆에 있다. 그러니 괜찮다.’ 그의 확고한 의지와, 그녀를 향한 맹렬한 소유욕과, 그녀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폭풍처럼 그녀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갔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새겨놓은 상처를, 그의 존재로 뒤덮고 지워버리려는 듯이.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어리던 공포의 그림자는 한층 옅어져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눈앞의 남자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속삭였다.

이제 니 세상은 여기가 아이다. 내다. 알겠나?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손을 마주 꽉 잡아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현실을 향한 빛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무너지는 지옥의 소리는, 이제 두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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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함께 빛 속으로 걸어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하얗게 부서졌다. 형태를 가졌던 정신세계의 풍경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감촉도, 심지어는 그녀를 지키던 바람의 흐름마저도 순식한에 빛의 입자로 해체되었다. 의식이 육체로 되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고압의 전류에 온몸이 관통당하는 듯한 충격이었다. 뇌수를 헤집는 듯한 격렬한 두통과 함께, 5일간 억눌려 있던 모든 피로와 감각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눈꺼풀 안쪽에서 폭발하는 섬광, 귀를 찢는 기계음, 그리고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헬멧의 압박감.

연결 해제! 바이탈 안정! 바이브 요원, 정신 차리십시오! 바이브 요원!

외부 스피커를 통해 필사적으로 외치는 의사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멀게만 느껴졌다. 바이브는 그 소리를 따라가려 애썼지만,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가 재결합하는 과정의 부하가 너무도 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폐가 아니라 머리로 숨을 쉬는 것처럼, 호흡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웠다. 그는 헐떡이며, 마치 익사 직전의 사람처럼 허공의 산소를 탐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유리관의 문이 열리고 의료진이 자신을 부축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자신을 향하는 손길을 쫓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의식은, 이 지옥 같은 감각의 폭풍 속에서도 단 하나의 좌표를 향해 있었다. 유리관 너머,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 삐, 삐, 삐, 삐-! 단조롭던 생명 유지 장치의 경고음이, 불규칙하지만 강렬한 파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니터의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뇌파 상승! 자가 호흡 반응 확인! 눈 떠요, 브리즈 요원! 들립니까!

그 목소리. 그 한마디가, 바이브의 흩어지려던 의식을 붙잡는 벼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부축하려던 의료진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비틀거리는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거의 기다시피, 넘어져가며, 침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얀 가운의 무리도, 요란하게 울리는 기계음도, 그 무엇도 그의 감각에 닿지 못했다. 오직, 저 너머에 있는 그녀에게로.

그가 침대 맡에 다다라, 의료진을 밀치고 안을 들여다본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적은, 아주 작은 소음처럼 찾아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그리고, 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공기의 마찰음.

…흐…으…

그것은 그녀의 소리였다. 그녀가 스스로 내쉰, 첫 호흡이었다. 그 작은 소리가 그의 세상 전체를 뒤흔들었다. 의사가 그녀의 눈꺼풀에 조심스럽게 라이트를 비추며 동공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는, 거의 환희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돌아왔습니다! 의식이… 돌아왔어요!

그 말을 끝으로, 바이브의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지난 5일간, 아니, 그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 순간부터 그의 온몸을 옭아매고 있던 강철 같은 긴장이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그는 침대 옆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떨리는 손을 뻗어 생명 유지 장치가 연결되지 않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어있던 손에,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

그는 붙잡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고개를 들면, 지난 며칠간 단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손등에 제 얼굴을 묻은 채, 가늘게 떨었다. 등 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기쁨에 겨워 나누는 대화도, 축하의 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이 작은 온기만이 존재했다.

…왔나. 왔구나. 내 옆으로. 다시.

그는 눈을 감았다. 까무룩, 하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육체와 정신이 마침내 활동을 정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힘이 빠지지 않았다. 니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다. 잠들기 직전,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이 까마득한 심연으로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한계에 도달한 육체가 모든 신호를 차단하고 강제적인 휴식을 명령하던 바로 그 찰나. 귓가에 닿은 것은 의료진의 부산스러운 목소리도, 기계의 경고음도 아니었다. 아주 희미해서, 환청이라고 착각할 법한, 공기보다도 가벼운 소리.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지원.

그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우고, 가라앉던 그의 의식을 낚아채는 갈고리가 되었다. 바이브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거워 감기던 눈꺼풀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며 억지로 들어 올려졌다. 핏발이 선 흐릿한 시야가 애타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침대 위, 희미하게 눈을 뜬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흐릿한 시야에 담겼다. 산소 마스크 안쪽으로 하얗게 서리는 김.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 그 모든 것이, 지금 일어난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다. 지난 며칠간 그를 지탱하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었다. 그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상체만 일으켜 침대 쪽으로 기어갔다.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지도 않은 채, 그저 그녀를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가갔다. 의료진들이 놀라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에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래.

그의 목에서 나온 것은 쇳소리가 섞인,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였다. 그는 침대 프레임을 위태롭게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그는 마침내 그녀의 얼굴 바로 옆까지 다가섰다. 그리고는, 엉망인 모습 그대로 그녀의 곁에 엎드리듯 쓰러졌다.

…내다. 니 서방 여 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녀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 살아있다는 증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앗아갔다. 돌아왔다. 정말로. 내 세상이, 내 숨통이, 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참아왔던 모든 것을 토해내듯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남자는, 그저 아이처럼 숨죽여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의 온기에 제 존재를 묻었다.

바이브는 그녀가 깨어났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깨어나서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에 구원받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세상이었듯, 그녀 또한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괜찮다. 이제 괜찮다. 내가 왔다. 아무 데도 안 간다. 의미를 갖지 못하는 단어들이, 그의 벅찬 감정을 실어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등 뒤에서, 이 기적적인 재회를 지켜보던 담당 의사가 조용히 다른 의료진에게 손짓했다. 지금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약물이나 처치가 아닌, 서로의 존재 그 자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료진들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가, 두 사람만의 공간을 남겨두었다.

그는 흐느낌 사이로 그녀의 이마, 뺨, 그리고 산소마스크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온기를 확인했다. 마치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녀가 다시 사라져 버릴 것처럼,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지난 일주일간의 지옥이, 그녀의 이 작은 숨결 하나로 천국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잘 왔다. 내 옆으로.

다시 한번,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환영 인사였고, 칭찬이었으며, 그의 세상 전부를 건넨 사랑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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