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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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저런다. 어린애 아니라니까. 속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퉁명스러운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것을 삼켰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는 다정한 손길에, 온몸의 긴장이 눈 녹듯 스르르 풀려버리는 기분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 속의 온기처럼. 그 손길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따뜻해서, 그는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춘 채 그 감각에 잠겨들었다.

이내 그녀가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그는 턱을 괸 채, 그 뒷모습을 말없이 좇았다. 늘어지는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쌌고, 귓가에 꽂힌 연분홍색 리시안셔스가 갈색 머리칼 사이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해변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세상은 저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바라보는 저 작은 뒷모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진 일상. 그녀의 손길 한 번에 모든 감각의 폭풍이 멎어버리는 기적.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빚지고 있었다. 늘 바람처럼 자유롭길 원했지만, 사실은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싶어 방황하던 자신을, 그녀가 기꺼이 붙잡아 주었다. 그녀는 그의 폭풍을 잠재우는 가이드이자, 그의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닻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고작 꽃다발 하나, 서투른 고백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껴안아주었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감추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 여자의 생일이니까. 그 어떤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을 완벽한 날이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그리고 그 과거를 숨기기만 하던 비겁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이 여자에게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보여주고 싶었다. 바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소년이, 어떻게 그 힘을 끌어안고 살아가게 되었는지.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지희.

평소의 퉁명스러움은 온데간데없는, 조금은 잠긴 목소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맞잡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바다… 어릴 때, 진짜 싫어했다.

그는 시선을 멀리, 수평선 너머로 던졌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의 파란 눈동자에는 10년 전의 그날, 모든 것을 앗아간 회색빛 폭풍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바람의 힘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나는 바람한테 잡아먹혔던 적이 있다. 아주 어릴 때. …엄마랑 같이.

그는 애써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의 시선을 피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을, 연약한 속살을 그녀 앞에 처음으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바이브는 그녀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풍경을 바라봐 주는 것에 아주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섣부른 위로나 동정의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오직 필요한 소리만을 골라 들어야 했던 그에게, 이 순간의 고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안이었다. 그는 그녀의 침묵이 ‘나는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당신의 속도에 맞춰 이야기해달라’는 무언의 신호임을 알았다.

그때, 그의 손 위로 조심스럽게 포개어지는 온기가 있었다. 말없이, 하지만 모든 언어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아 부드럽게 얽혀 들어오는 손길. 그 온기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의 모든 감각이 폭풍처럼 날뛰던 과거와 달리, 지금 그의 세상은 오직 이 작은 손이 주는 감촉 하나에 모든 것이 정지한 듯했다. 괜찮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그의 가장 깊은 상처를 헤집는 이 순간에도, 그녀가 곁을 지키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바이브는 주저 없이 그녀의 손을 마주 얽어 잡았다. 생각보다 더 꽉,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시선을 창밖의 수평선에 고정한 채,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혀끝에서 썩어 문드러지던 이야기였다.

그날, 태풍이 왔다. 존나 큰 거. …우리 동네는 언덕배기에 있어서, 바다가 바로 아래로 다 보였는데.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해운대의 노을이 아니었다. 집어삼킬 듯이 밀려오던 검은 파도, 유리창을 미친 듯이 두들기던 비바람, 그리고 온 동네를 뒤흔들던 괴물 같은 바람 소리. 모든 감각이 12살의 그날로 역행했다. 그는 꽉 잡은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만이, 자신이 22살의 현재에 서 있다는 유일한 증표임을 깨달았다.

엄마랑 나랑 둘만 집에 있었다. 형들은 다… 학교 가고, 일 나가고. …아빠도. 대피하라고 방송이 나왔는데, 엄마가 곧 그칠 거라고 했다. 부산에서 태풍은 여름마다 오는 손님 같은 거니까. …근데 그날은 손님이 아니라, 저승사자였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희고 긴 손가락과, 그보다 작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가락이 얽힌 모양새가 낯설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애써 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바람에 집이 통째로 날아갔다. 진짜로. …만화 같은 소리지만, 진짜 그랬다. 눈 떠보니까, 하늘에 떠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바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의 감각이 다시 온몸을 덮쳤다. 살을 찢는 바람, 귀를 멀게 하는 굉음, 그리고… 점점 멀어지던 엄마의 온기. 그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손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그 찰나의 절망감. 그의 능력이 각성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던 바로 그 바람의 힘을 손에 넣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말을 맺었다.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갈 만큼 작아져 있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혼자서. …바람의 힘으로.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10년 전의 폭풍우에 갇힌 채, 길을 잃은 아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어떤 꾸밈도, 시니컬함도 없이, 오직 날것 그대로의 상처와 슬픔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바람으로 엄마를 잃고, 그 바람의 힘으로 살아남은 괴물 같은 나를,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느냐고.

여전히 창가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흔들린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야 조금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족 이야기를 꺼내거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물을 때. 버럭 화를 내고 자리를 피하던 그의 모습. 그녀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본 채 단지 그의 손을 맞잡는다. …속도 모르고. 그런 얘기를 꺼내는 내가 밉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당신은… 겉으로는 평온한 척 그의 옆을 지켰지만,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단어가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말이라도 꺼냈다가, 혹 그가 동정이나 기만으로 받아들인다면. 너무나도 두려웠다.

……고마워요. 이야기해 줘서.

바이브는 그녀의 짧은 대답을 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위로도, 동정도, 괜찮다는 거짓말도 없었다. 그저 그 한 마디. 바이브는 그 순간, 자신의 폐를 짓누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돌덩이가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면, 분명 동정의 눈빛이 쏟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불쌍하다'는 표정, '어쩌다 그런 일을' 하는 한숨, 그런 것들이 자신을 더 나약하게 만들 거라고. 그래서 10년을 혼자 삼키고 있었다. 부스터 형한테도, 팀원들한테도,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고맙다'고 했다.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건, 자신이 보여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 아닌가. 바이브는 얽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이 작았다. 자신의 손보다 훨씬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 작은 손이 자신의 폭풍을 잠재운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울 것 같았다. 아니,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2살 먹은 S급 센티넬이, 여자친구 앞에서 우는 꼴이라니. 존나 꼴불견이다. 그래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10년 동안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속살을 꺼내놓고, 그것을 부정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몸 전체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코끝을 훌쩍이며, 자유로운 한 손으로 눈가를 거칠게 훔쳤다. 울지 마라, 홍지원. 존나 꼴사나우니까.

…니가, 가끔 가족 이야기 물을 때. 짜증 냈던 거. 미안했다.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흩어진 청록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의 감촉조차, 10년 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지금 이 바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의 곁에 있으니까.

니가 밉지 않았다. 한 번도. 그냥… 무서웠다. 말하면 니가 나를 다르게 볼까 봐. 괴물 같다고 생각할까 봐.

그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파란 눈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눈물은 끝끝내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힘겹게 올라갔다. 웃으려는 건지, 울음을 참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이마에 가만히 갖다 댔다. 그녀의 손등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10년 전부터 멈추지 않던 이명을 조용히 잠재우고 있었다.

…근데 니가 고맙다고 하니까. 좀, 살 것 같다. …이상하제. 이런 이야기 하고 나서 살 것 같다니.

……나야말로, 속없이 그런 거나 캐물었네요. 파트너 실격이네.

바이브는 그녀가 건넨 가벼운 농담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파트너 실격이라니. 그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만약 자신의 이 끔찍한 과거를 듣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기쁘다고 말하며 안아주는 사람이 실격이라면, 이 세상에 합격인 가이드는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실격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10년 동안 이 비밀을 혼자 짊어지고 끙끙 앓으며,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는 벽을 치고 상처를 주려 했던, 미성숙하고 겁 많던 홍지원. 그 자신이 실격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특별한 위로의 말도, 힘을 실은 다독임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몸무게를 온전히 그에게 기대며, 온기를 나누는 담백한 포옹. 하지만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강력한 파동이, 바이브의 심장 중심부를 향해 고요히 스며들었다. 10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쩡, 하고 금이 가며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익숙하고 편안한 샌달우드 향이 훅 끼쳐왔다. 그 향기는 그의 비어있던 폐부를 가득 채우고, 10년 전의 비릿한 바다 냄새와 피 냄새를 깨끗하게 밀어냈다.

결국, 둑이 터졌다. 12살의 소년이 되지 않기 위해, S급 센티넬 ‘바이브’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감정의 댐이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눈시울을 적시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더 깊이 묻은 채 작게 흐느꼈다. 어깨가 잘게 떨리고, 억지로 참아 낸 숨이 밭은기침처럼 터져 나왔다. 꼴사나웠다. 존나 쪽팔렸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체온이, 심장 소리가, 부드러운 향기가, ‘괜찮다, 울어도 괜찮다’고 그의 모든 감각에 속삭이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그녀에게 기대어 어린아이처럼 울던 그는, 가까스로 흐느낌을 멈추고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실격은 무슨.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엉망으로 젖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 눈물로 얼룩진 뺨. 평소의 시니컬하고 날카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무방비하고 연약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니가 실격이면… 나는 진작에 폭주해서 재가 됐을 거다.

그는 서툰 손길로 그녀의 뺨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주려다, 제 손이 더 엉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게 손을 내렸다. 대신 그는 그녀를 다시 한번 깊게, 아주 깊게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녀의 귓가에,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 말 안 해줘도 된다. …그냥, 지금처럼 옆에만 있어 주면 된다. …고맙다. …진짜로.

그의 모든 진심이 담긴, 떨리는 고백이었다. 바람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소년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바람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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