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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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장난기를 머금자, 바이브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손길 아래, 그는 이미 완전히 녹아버린 상태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수밖에 없는, 그런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 듣고 싶은 거 있는데. 누나, 라고 한 번만 불러보면 안 돼요? 저녁 때까지 불러 달라고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누나.

그 한 단어가 바이브의 뇌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방금 전까지 그를 감싸던 평화롭고 나른한 감각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탁, 놓치고 말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도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물에 비친 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절대, 절대 이 얼굴을 보여줄 수 없었다.

야, 니 진짜 돌았나!

그가 빽, 소리치듯 외쳤다. 목소리가 보기 좋게 뒤집어졌다.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안이 화끈거렸다.

지금 장난치나! 내보고, 내보고 그걸…! 미쳤나, 진짜! 죽고 싶나!

말은 험하게 나갔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아닌 극심한 당혹감과 수치심만이 가득했다. 그의 귓가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S급 센티넬, 뱅가드 2팀의 막내지만 10년 차 베테랑, 코드네임 바이브. 그 모든 수식어가 ‘누나’라는 단어 하나 앞에 먼지처럼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얼굴을 감싼 채 웅얼거렸다. 거의 울먹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안 한다. 절대. 죽어도 안 한다. 차라리 저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낫지, 그딴 걸 어떻게…!

바이브는 여전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손바닥과 얼굴 피부 사이에 갇힌 열기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 무색하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젠장, 젠장, 젠장. 머릿속에서 욕설이 메아리쳤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녀의 흉터를 보고 울컥해서, 분위기에 휩쓸려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자신을 수십 번은 더 족치고 있었다. '뭐든 불러준다'니. 홍지원, 이 미친놈아. 그 '뭐든'에 그런 재앙 같은 단어가 포함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치이, 뭐든 불러 준다더니.

옆에서 들려오는 삐죽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들으면 안 됐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결보다 더 교묘하게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제발, 그만해라. 속으로 빌었다. 여기서 더 갔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네에?

'생일 선물'. 그 단어가 그의 마지막 이성의 방어벽에 거대한 균열을 냈다. 그래, 오늘은 브리즈의 생일이었지. 이 모든 건 그녀의 생일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 서프라이즈로 부산에 데려오고, 최고의 오션뷰 스위트룸을 잡고, 맛있는 밥을 사주고… 그리고 지금, 그녀가 원하는 '선물'은 고작 단어 하나였다. 하지만 그 단어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그의 지난 십 년의 세월과, S급 센티넬로서 쌓아 올린 모든 자존심을 합친 것보다도 무거웠다.

그녀가 옆에 바싹 붙어 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체온, 은은한 샌달우드 향, 물에 젖은 레이스 가디건의 서늘한 감촉이 그의 모든 감각을 어지럽혔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 반짝이는 눈과 마주치면, 그대로 끝장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안 돼요?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간절함과 서운함이 절묘하게 섞인,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애처로운 목소리.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쌌던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려, 흘깃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강아지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정말 세상 모든 슬픔을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는 빛은, 그가 평생을 맞서 싸워온 그 어떤 괴수의 파괴 광선보다도 치명적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졌다.'

그는 항복을 선언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여기서 거절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시뻘겋게 익어버린 얼굴을 차마 전부 드러낼 용기는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풀장의 푸른 물결 위에서 하염없이 방황했다.

…씨, 아, 진짜…

입술을 열었지만,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마른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한마디를 뱉는 것이, 여태까지 그가 수행했던 그 어떤 S급 임무보다도 어려웠다. 심호흡을 했다. 폐부로 들어온 공기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딴 표정 좀 치워라, 진짜…

그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이 순간이 지나면, 자신은 더 이상 예전의 홍지원이 아닐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모기만 한 목소리로, 수영장의 모든 소음을 뚫고 간신히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누, 나.

그가 내뱉은 두 음절은 너무나 작아서, 찰랑이는 물소리에 섞여 흩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브리즈의 예민한 감각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천근만근의 무게를 놓치지 않았다. 누나. 바이브는 그 한마디를 뱉어낸 직후, 마치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불타는 귓가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목덜이가 그의 처절한 내적 사투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생명체처럼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때, 그녀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폭탄이 터진 전장 한가운데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 것처럼, 그 소리는 너무나도 맑고 경쾌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웃음소리. 그가 예상했던 반응 중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어이없어하는 편이 나았다. 저 순도 높은 기쁨의 웃음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파편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응, 지원.

이어지는 나긋한 대답에, 바이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아, 진짜… 그는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를 지를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그대로 풀장 가장자리에 이마를 박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고, 그 달콤함이 지금 그에게는 독보다도 썼다. 심장이 멋대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이딩 필요 수치가 경고등 없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수치심만으로 폭주 직전까지 몰릴 수 있다는 걸, 그는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최고의 생일 선물이에요. 살면서 받은 것 중에.

그 결정타에, 바이브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 1초라도 더 저 공간에 머물렀다가는, 정말 수치심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야!

그가 등을 돌린 채, 버럭 소리쳤다. 여전히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

됐다, 됐으니까 그만해라! 선물이고 나발이고, 다신 그딴 소리 입에 담지도 마라! 알았나!

그는 씩씩거리며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자신을 놀려먹을 궁리를 하고 있겠지.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선베드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두꺼운 타월을 집어, 제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마치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박는 것과 같은, 필사적인 현실도피였다. 타월 아래 어둠 속에서, 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웅얼거렸다.

…다 젖었네, 씨… 수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방에 갈란다. 니 혼자 실컷 놀다 온나. 난 먼저 간다.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그는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타월을 뒤집어쓴 채, 그녀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라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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