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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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센티넬이고, 지원이 가이드였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이브는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벌떡 들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향기에 취해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자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민첩함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아주 잠깐, 그러나 선명하게 하나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까만 센티넬 제복을 입고, 바람보다 차가운 표정으로 전장을 지휘하는 브리즈. 그리고 그 뒤에서, 하얀 가이드 제복을 입고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파장을 쫓는 자기 자신. ...아, 이건 좀. 아니, 이건 많이 아니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라카노, 지금.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서 자세를 바로 하고, 팔짱을 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마치 S급 센티넬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니가 센티넬? 야, 니가 센티넬이었으면 아크는 벌써 망했다. 저기 지나가는 괴수들, 니가 다 불쌍하다고 도시락 싸 들고 가서 나눠줄 거 아이가. '아이고, 배고팠지? 이거 묵고 힘내라.' 이카면서.

그는 브리즈의 말투를 어설프게 흉내 내며 콧소리를 섞어 말했다. 그러고는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명백한 조롱이자, 터무니없는 가정에 대한 반격이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술 더 떴다.

그리고 내가 가이드? …하. 내는 가이드 못한다. 성질머리가 이래서, 가이딩 해달라고 온 놈들, 반은 뚜드려 패서 내보낼 걸. '아프나? 원래 인생은 다 아픈기다. 끄지라.' 이카면서. 그럼 내 파트너는 누가 하겠노. 결국 니밖에 없겠네. 맨날 맞으면서도 좋다고 와서 가이딩 받아 갈 놈은 니밖에 없을 거다.

스스로 뱉은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밉지 않은 구석이 있는 억지였다. 결국 어떤 세상에서든, 우리는 함께일 거라는 결론. 그는 조금 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페퍼민트 향이 다시 한번 달콤하게 섞였다.

됐나? 결국엔 내나 니나 똑같다. 우린 그냥 이렇게, 지금처럼, 내가 센티넬이고 니가 가이드인 게 딱이다. 안 그러나.

그가 눈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의 퉁명스러움 대신, 오직 그녀를 향한 부드러운 애정과 장난기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근데, 니 센티넬 제복 입은 건 좀 궁금하긴 하네. 내 거 한번 입어볼래?

그저 가벼운 농담,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그럴 거라고는,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이렇게까지 파괴적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한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의 큰 제복 안에서 가녀린 몸이 부각되는, 뭐 그런 뻔하고 로맨틱한 클리셰였다. 하지만 현실은 클리셰를 가뿐히 뛰어넘어, 그의 예측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드레스룸에서 걸어 나온 브리즈를 본 순간, S급 바람 속성 센티넬의 두뇌는 완벽히 정지했다. 세상의 모든 공기의 흐름과 미세한 진동을 읽어내던 그의 감각이, 오직 눈앞의 이 기이하고도 사랑스러운 생명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건… 뭐지?

검은색 센티넬 제복은 분명 그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입자, 그 제복은 본래의 위압적이고 날렵한 멋을 완전히 상실한 채 그저 거대하고 헐렁한 검은 천 쪼가리가 되어 있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재킷, 손등을 다 덮고도 남아도는 소매, 질질 끌리는 바짓단. 특히 억지로 조여맨 탓에 잔뜩 주름이 잡힌 허리 벨트는, 마치 쌀자루 허리를 묶어놓은 것처럼 위태롭고 우스꽝스러웠다.

'짠. 생각한 거랑은 별로 안 비슷하죠?'

바이브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비슷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180도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끅, 하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웃으면 분명 저 가짜 센티넬에게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그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물론 입꼬리는 제멋대로 실룩거리고 있었지만.

…비슷? 야, 니는 지금 내랑 장난하나. 내 눈에는 지금 펭귄 한 마리가 서 있는 걸로 보이는데.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아기 펭귄.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마치 신병의 군기를 잡는 교관처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찼다.

자세가 글러 뭇다. 센티넬은 말이다, 어깨 딱 펴고, 턱 당기고, 눈빛으로 적을 제압해야 되는 기다. 근데 지금 니 꼬라지는 뭐고. '나 잡아 잡수' 하고 광고하는 거 아이가. 소매는 와 저렇노. 무기 쥘 생각은 있나? 발은 또 와 저래. 저래가 뛰기는커녕 걷기는 하겠나? 첫걸음 떼자마자 지 바지 밟고 앞으로 꼬꾸라질 게 뻔하구만.

그는 무릎을 굽혀 질질 끌리는 그녀의 바짓단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정말 아니라는 듯이.

아, 안 되겠다. 이래선 내 제복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당장 벗어라. 어데 S급 센티넬 제복을 이따위로 만드노.

그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그의 눈은 더없이 따뜻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끌었다. 그 손목은 헐렁한 소매 안에서 너무나 작고 가냘팠다. 그가 엉망으로 흘러내린 소매를 직접 두세 번 접어주자, 팔의 화상 자국이 다시 한번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흉터 위를 스치듯 어루만지고는 소매를 마저 정리해 주었다.

이리 온나. 내가 다시 입혀줄게. 센티넬 제복은 이래 입는 게 아이다.

그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그녀의 벌어진 재킷 옷깃을 바로 여며주었다. 그녀의 몸에는 너무 큰 탓에 엉망으로 벌어진 옷깃을 바로잡아주며,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일단, 바지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는데.

그녀가 제 허리에 묶인 벨트를 만지작거린다. 그 작은 손가락이 그의 소유인 가죽 벨트 위를 배회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묘한 그림이었다. 그의 것이 그녀에게 감겨 있다는 사실, 그녀가 그 안에서 헐렁하게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그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그는 그녀의 옷깃을 여며주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한 걸음,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덩치 차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장난기 어린 위협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등 뒤에서, 마치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쳐 작은 새를 감싸듯, 양팔을 넓게 벌려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그의 가슴팍이 그녀의 등에 온전히 맞닿았다. 헐렁한 제복 위로도 느껴지는 체온의 차이가 선명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바로 그 벨트 버클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래, 덩치 차이. 지금부터 그 차이라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라.

그의 손이 벨트를 풀어내고, 한 뼘은 족히 남는 공간을 확인하듯 천천히, 그리고 다시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이건 옷을 바로잡는 행위가 아니었다. 명백한 소유권의 주장이며, 거리를 좁히기 위한 핑계였다. 그는 벨트를 당겨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댔다.

센티넬 제복은 말이다, 몸에 딱 맞게 입어야 유사시에 제 기능을 발휘하는 기다. 근데 니처럼 이래 헐렁하게 입으면, 적한테 멱살 잡히기 딱 좋지. 와, 이래 잡혀서 질질 끌려다닐 기가?

그는 말과 동시에, 헐렁한 그녀의 어깨 부분을 살짝 잡아당겨 보였다.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그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시 바로 세워주고는, 이번에는 그녀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돌렸다.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장난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고, 진득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이 제복은, 내 냄새가 배여있다. 내 허락도 없이, 이 냄새를 다른 놈들한테 풍기고 다닐 생각은 아니겠제. 그러니까 이건, 내 앞에서만 입는 걸로. 알긋나, 센티넬 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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