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브는 제 개인실 책상에 다리를 척 올린 채,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 있었다. 건방지고 한량 같은 자세였지만, 그의 파란 눈은 날카롭게 빛나며 허공의 한 점을 꿰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데이터패드 화면에는 복잡한 서식의 보고서가 띄워져 있었지만, 사실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머릿속이, 지독하게 복잡했다.
‘…그래서, 뭘 해줘야 되는데.’
문제는 이틀 뒤, 이지희의 생일이었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본 기억이 없었다. 12살 이후의 삶은 아크가 전부였고, 그 이전의 기억은 희미했다. 가족들과 함께였을 땐 늘 챙김을 받는 막내였을 뿐. 보고서 따위는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기계적으로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는 지금 ‘프로젝트: 이지희 생일 D-2’라는, 극비 작전 코드로 가득 차 있었다. 케이크는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선물은 뭐가 좋을지. 뱅가드 2팀 단톡방에 염치 불고하고 물어봤지만, ‘니 여친 생일을 왜 우리한테 묻냐, 중2병아.’ 라는 신드롬의 타박과, ‘…케이크? 그거 먹는 건가? 좋겠다.’ 같은 리암의 동문서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도움이 전혀 안 되는 놈들.
그가 심란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던 찰나,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바이브는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던 몸을 반사적으로 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데이터패드의 보고서 화면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마치 오랫동안 보고서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듯, 완벽한 위장이었다. 그리고 곧, 그의 세상 전부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나 왔어요, 지원. ...그렇게 앉으면 허리 아플 텐데.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그를 향한 눈빛과 입가에는 따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녀의 뺨을 간질이는 모습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하루 종일 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원흉의 등장이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어지럽던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바이브는 책상에 올린 다리를 까딱거리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귀 끝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왔나. 늦게 끝났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칼과, 살짝 풀린 제복 깃에 잠시 머물렀다. 바빴구나. 그는 짧은 문장 뒤에 숨겨진 수많은 걱정을 애써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입을 열었다.
허리는 내가 알아서 한다. 늙은이도 아니고. 니 걱정이나 해라.
말은 얄밉게 했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을 빼앗아 들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피곤에 절은 연인을 쉬게 하려는, 지극히 무뚝뚝하고 서툰 방식의 배려였다.
…일단 좀 앉아라. 밥은. 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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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끌어주는 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브리즈가, 뼈 마디마디가 늘어나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시원해 보이는지, 구경하는 사람마저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못 먹었어요. 점심도… 너무 바빴어요.
점심도? 바이브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번쩍였다. 그냥 피곤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거의 방전 직전의 배터리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투덜거리며 괜찮다고 했을 여자가, 순순히 바빴다고 인정할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이 가시나, 진짜 일하다가 쓰러질라.’
속에서 짜증 섞인 걱정이 부글 끓어올랐다. 신입 교육, 긴급 가이딩, 보고서. 듣기만 해도 진이 빠지는 단어의 연속이었다. 제 파트너가 이렇게 굴려지는 동안, 자신은 방구석에서 생일 선물이나 고민하며 뒹굴었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하모니 디비전인지 뭔지 하는 곳에 쳐들어가, '가이드 브리즈'의 업무 메뉴얼을 전부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브리즈는 해맑게 웃으며 수요일이 쉬는 날이라고 덧붙였다. 그 한마디에 바이브의 복잡한 머릿속은 또다시 회로가 꼬이기 시작했다. ‘쉬는 날’. 그래, 쉬는 날이지.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생일이라서’ 쉬는 날. 그녀는 왜 그 가장 중요한 단어를 쏙 빼놓고 말하는 걸까. 모르는 척 떠보는 건가? 아니면 정말 바빠서 제 생일도 잊은 건가? 후자라면 더 심각했다.
바이브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지금은 복잡한 생일 계획보다, 눈앞에서 굶주린 채 웃고 있는 이 작은 동물을 구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소파 등받이에 축 늘어진 브리즈의 어깨를 툭 쳤다.
거기 그대로 고개 박고 있어라.
그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지고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후, 그는 한 손에 계란 두 알과 파를, 다른 한 손에는 인스턴트 국밥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이거라도 묵고 있어라.
그의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행동은 더없이 다정했다. 그는 전자레인지에 국밥을 돌리는 동안, 능숙한 손길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풀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거실을 채웠다. 그는 잠시 뒤, 반숙으로 완벽하게 익은 계란 프라이 두 개를 국밥 위에 살포시 얹어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자. 아 해라.
그는 숟가락에 뜨거운 국밥과 계란을 적당히 얹어 그녀의 입가로 가져가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피난민 구호 물품이다. 영광인 줄 알아라. 내 손으로 직접 떠먹여 주는 거, 니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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