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기대듯 누운 그녀가, 그의 베개를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제 머리가 닿았던, 제 체취가 희미하게 남았을 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 그 모습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하던 설거지를 멈췄다. 쏴아아, 하고 흐르던 물소리가 멈추자, 방 안에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
처음에는 헛웃음이 났다. 저게 뭐꼬. 유치하게.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시리게 변했다. 원래 저 베개가 아니라, 제 품에 안겨 있어야 할 사람인데.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고작 베개 따위를 제 대용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감정이 더 컸다. 안쓰러움.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 제 것을 기어코 찾아 품에 안고서야 안심하는 어린 짐승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위태롭고, 또 너무나 귀여워서, 그는 심장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른 손으로 싱크대 위를 한번 짚었다가, 천천히 소파로 다가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마저 억누른 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일주일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혈색이 돌아온 뺨. 더 이상 퀭하지 않은 눈가.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보니, 그 지옥 같던 일주일이 아주 조금은,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시선이 베개를 쥔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하얗고 작은 손이, 제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베갯잇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고, 그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고 싶다는 충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허공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리고는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가 덮고 있던 얇은 담요의 끝을 끌어올려, 어깨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손가락 끝에 아주 잠깐 스친 담요의 온기가, 마치 그녀의 체온처럼 느껴져 심장이 덜컥거렸다.
…감기 든다, 가스나야.
잠꼬대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녀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결에 따라 작게 오르내리는 어깨, 베개에 눌려 붉어진 뺨, 살짝 벌어진 입술. 그 모든 것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조명을 가장 어둡게 낮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곁, 소파 아래 카펫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그녀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이 평화가 한순간이라도 더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는 그녀의 파수꾼을 자처했다. 만질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이 섞인 공기의 미세한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것이 지금 그가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이딩이었다.
지원…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제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쪼그려 앉은 채 그녀를 지켜보던 그의 세상이, 그 한마디에 정지했다. 악몽 속에서 절박하게 터져 나오던 그 이름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나른한 잠결에 녹아든, 지극히 평온하고 사적인 부름이었다. 심장이 발치까지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그녀에게로 더 기울였다.
그녀의 미간은 편안하게 풀려 있었고, 오히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그 평온한 얼굴이, 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꿈. 그래, 꿈속에서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꿈속의 ‘지원’은, 이 빌어먹을 감시 센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마음껏 안아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실의 자신이 바로 여기,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숨 막히는 고문을 견디고 있는데도. 그는 꿈속의 자신에게 지독한 질투를 느꼈다. 그 자식은 지금, 그녀의 꿈속에서 어떤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을까.
그녀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애틋한 색이 섞여 있었다. 베개에 뺨을 부비는 움직임은, 마치 그의 품을 파고드는 고양이의 응석처럼 보였다. 바이브는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미치겠다. 정말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사소한 잠꼬대 하나, 작은 몸짓 하나가 그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선을 넘으라고. 이까짓 약속 따위는 던져버리고, 당장 그녀를 품에 안으라고. 뇌 속에서 경고등이 미친 듯이 울려댔지만, 그의 몸은 이성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그녀의 뺨도, 머리카락도 아니었다. 그녀가 껴안고 있는 자신의 베개, 그 모서리였다.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간신히 베갯잇의 차가운 천을 붙잡았다. 그녀의 체온이 닿지 않은, 가장 먼 곳. 그것이 지금 그가 자신에게 허락할 수 있는 전부였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얇은 천의 감촉 너머로,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착각에 어지러웠다.
…그래. 나 여깄다.
그가 속삭인 대답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녀의 꿈에 닿을 리 없는,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위로였다. 그는 베갯잇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그것이 그녀와 이어진 유일한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역시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꿈속에서라면,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부산의 밤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광안대교의 꼭대기에 앉아,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닿고, 만지고, 서로의 온기를 남김없이 느끼며, 이 지긋지긋한 불안과 갈증을 전부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소파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크게 뒤척였다. 바이브는 화들짝 놀라 붙잡고 있던 베갯잇을 놓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잠에서 깨려는 걸까. 그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잠결에 자세를 바꾸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는 소파 안쪽으로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채 다시 웅크렸다. 여전히 그의 베개는 꼭 껴안은 채였다.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그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고 말하는 벽처럼 느껴졌다.
그는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뭘 기대한 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게 굳은 무릎을 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듯,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침대로 향하는 대신, 그는 제 책상 의자를 끌어다가 소파 옆, 그녀가 잠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에 놓았다. 삐걱,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그녀가 다시 한번 작게 뒤척였지만, 깨지는 않았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어둠 속에서 고요히 잠든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래,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속의 자신이 아무리 그녀와 행복하다 한들, 결국 그녀의 아침을 맞이하고,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은 현실의 자신이었다. 그는 잠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난 일주일처럼, 남은 일주일도 그렇게 그녀의 밤을 지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