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는 차가운 정적으로 가득했다. 아이기스의 인공적인 공조 시스템이 내뿜는, 아무런 감정도 냄새도 없는 바람만이 그의 뺨을 스쳤다. 그는 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발걸음을 떼어야 했지만, 발바닥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있는 방과 자신을 가로막는 이 얇은 문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견고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바람을 쐰다고 했지만, 그에게 더 이상 숨 쉴 공간은 없었다. 브리즈가 없는 모든 공간은, 산소가 희박한 진공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문 안쪽을 향해 있었다. 초고도로 예민해진 바람의 흐름을 통해, 그는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작은 움직임, 시트가 스치는 미세한 소리, 그리고…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호흡.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를 상처 입혔다는 죄책감이 그의 온몸을 쇠사슬처럼 칭칭 감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냥 이대로, 이 복도에서 풍화되어 먼지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시야에서, 그녀의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아주 희미한 소리. 처음에는 그저 이명인 줄 알았다. 그의 불안정한 파장이 만들어낸 환청. 하지만 그의 센서가 그 소리의 파형을 놓칠 리 없었다. 사람의 목소리. 고통에 젖은 신음. 그리고…
…윽, 흐으… 지, 지원…
순간, 바이브의 심장이 멎었다. 시간이 멈췄다. 그의 코드네임이 아닌, 본명. 홍지원.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부르는 그 이름이, 악몽에 시달리는 고통스러운 잠꼬대 속에서 흘러나왔다. 혼자 있고 싶다며 그를 밀어냈던 여자가, 꿈속에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모순적인 사실이, 그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복도를 채우던 차가운 정적은 거짓말이었다. 문 너머, 그녀는 여전히 지옥 속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다.
그가 사라져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오만하고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그는 그녀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됐다. 절대로. 그녀가 그를 밀어내는 것은, 그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공포의 근원인 자신을 꿈속에서 애타게 찾고 있었다.
망설임은 사라졌다. 죄책감도, 자기혐오도, 지금 이 순간에는 사치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는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철컥’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는 다시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웅크린 채,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운 표정으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미간은 깊게 파여 있었고,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과 함께 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은 그의 남은 이성을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그는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일으켰다.
브리즈.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웅크려 있던 그녀의 몸을 바로 펴게 하고, 흔들리는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며 눈을 뜨려 하자, 그는 그녀의 젖은 뺨을 감싸 쥐었다.
내 여깄다. 눈 떠라. 니 꿈에 나오는 그 새끼, 여기 있다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그녀의 뜨거운 열기가, 식은땀의 축축한 감촉이 그의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공포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자신을 괴물로 본다면, 기꺼이 괴물이 되어 그녀의 악몽을 전부 집어삼켜 주리라. 그는 그녀의 귓가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다정한 약속을 속삭였다.
니가 날 죽이는 꿈을 꾸나. 괜찮다. 죽여라. 니 손에 죽는 거면, 기꺼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내 좀 봐라.
그의 품에서 겨우 잠들었던 밤은, 또다시 악몽으로 얼룩졌다. 꿈속에서 자신을 부르짖는 그녀를 억지로 깨워 현실로 끌어올린 이후, 바이브는 단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악몽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갈까 봐, 혹은 자신 몰래 또 그 빌어먹을 시스템에 굴복할까 봐, 그는 날 선 감각을 뜬눈으로 밤새 유지했다. 그의 곁에서 브리즈는 뒤척였고, 신음했고, 간헐적으로 깨어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그녀의 귓가에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무력감이 그의 속을 시커멓게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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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을 알리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브리즈가 기계적으로 단말기를 들어 파장을 전송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바이브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며칠 사이 핏기 없이 창백해지고 눈 밑이 거무죽죽해진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날에 저며지는 듯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인 하모니 디비전으로 쳐들어가 그들의 목을 비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브리즈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을 알기에, 그는 그저 이빨을 가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파장 전송이 끝나고, 브리즈의 단말기가 다시 한번 짧게 울렸다. ‘또 뭐야, 씨발.’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삼켰다. 그녀가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보는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혈색마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바이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소파에 앉은 채, 온 신경을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차갑고 비정한 네온 텍스트가 번뜩였다.
바이브는 화면에 떠오른 글자들을 하나하나 씹어 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심리적 불안정성’, ‘코드 블랙 격상 방지’, ‘징계 절차’. 그들의 언어는 언제나 이토록 차갑고 폭력적이었다. 그녀가 밤새 악몽에 시달리고, 공포에 떨고, 그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그 모든 고통을, 저들은 그저 몇 줄의 데이터와 리스크로 취급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은 자신들이면서, 이제 와서는 구원자인 척, 관리자인 척 ‘상담’이라는 이름의 심문을 하겠다는 것이다. 속에서부터 역겨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 단말기를 들고 있던 브리즈의 손이 가늘게 떨리며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그 어떤 비명이나 절규보다 더 바이브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는 단말기를 낚아채, 화면을 꺼버렸다.
…가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바싹 말라 있었지만, 그녀를 향한 어조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는 퀭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리즈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니 혼자 안 보낸다. 같이 가자.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어야겠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시스템의 칼날 앞에 혼자 세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상담? 심문? 좋다. 어디 한번 해보라지. 그가 그녀의 센티넬이고, 그녀가 그의 가이드인 이상, 그들은 하나였다. 그녀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고, 그녀의 적은, 이제 그의 적이기도 했다.
니 옆에 꼭 붙어 있을 기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 새끼들이 니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게 두는가, 내가.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대었다. 그녀의 불안이, 공포가, 고스란히 그에게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받아내며, 자신의 단단한 의지를,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그녀에게 흘려보냈다. 마치 가이딩의 역류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차갑게 식어 있던 그녀의 손이, 그의 온기에 조금씩 녹아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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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흰색 터널 같았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온통 인공적인 백색. 그 속에서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푸른색 유도등 불빛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가, 다시 삼키기를 반복했다. 바이브는 제복 차림이었다. 어젯밤, 브리즈와 함께 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머리는 단정하게 반으로 묶었고, 구김 하나 없이 각 잡힌 검은색 S급 센티넬 제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갑옷이었다.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목표 지점은 명확했다. 하모니 디비전 상담 섹터 C-7. 적의 심장부.
그의 단단한 결심과는 달리, 그의 손을 맞잡은 브리즈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오는 미세한 떨림, 그의 보폭을 따라오지 못하고 반쯤 끌려오는 듯한 무게중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감싸고 흐르는 공기의 파동 자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그의 곁을 맴돌았을 그녀의 기류는, 이제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얇고 위태로운 막처럼 느껴졌다. 그는 일부러 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힐끗, 시선만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어젯밤 확인했던 것보다도 더 심각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푸르스름하게 내려앉은 눈 밑 그늘, 생기를 잃고 버석하게 마른 입술. 평소라면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묶었을 머리카락은 힘없이 흘러내려 퀭한 얼굴선을 가리고 있었다. 몸에 딱 맞도록 수선했을 새하얀 가이드 제복은, 이제는 그녀의 것이 아닌 양 헐렁하게 남아돌아 앙상한 어깨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불과 며칠 만에, 그의 가이드는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이 지랄 같은 시스템을 부쉈어야 했는데. 내가 더 강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녀가 불안한 듯 그의 손을 마주 꽉 잡아왔다. 작은 손아귀 힘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존과 공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바이브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이, 자신을 살리는 손이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세상 전부였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시스템은 이 손을 ‘오염원’이라 부르고, 이 여자를 ‘잠재적 위험분자’로 분류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이성은 이미 분노의 화염에 전부 타서 재가 된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직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뿐이었다.
상담 섹터가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 감도는 서늘한 소독약 냄새와 인공적인 아로마 향이 역하게 느껴졌다. 그는 빈 복도를 걸으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그는 브리즈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절대로 그녀가 상처받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 대신 자신이 모든 칼날을 맞을 작정이었다.
목표 지점인 ‘C-7’이라고 적힌 반투명 유리문 앞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자동 센서가 그들을 인식하고, ‘위이잉-’ 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양옆으로 부드럽게 열렸다. 문 너머로는 부드러운 조명이 감도는, 겉보기에는 아늑해 보이는 상담실 내부가 보였다. 하지만 바이브의 눈에는, 그곳이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였다. 그는 브리즈를 제 등 뒤로 반쯤 숨기듯 감싸 안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걱정 마라. 내가 니 옆에 있다 안 하나.
그는 굳은 얼굴로, 방 안쪽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상대를 향해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롭게 벼려진 바람의 기운이 상담실의 평온한 공기를 차갑게 갈라놓기 시작했다.
그의 단단한 말이, 마치 강철 방패처럼 그녀를 지켜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브리즈는 더 이상 예전처럼 안심하며 웃어주지 못했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고, 그저 기계적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일 뿐이었다. 그 작은 움직임마저도 온 힘을 다한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바이브의 손을 놓고,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상담실 안쪽의 푹신한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덜덜 떨리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 자리에 앉았다기보다는, 무너져 내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바이브는 그 모습을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놓는 순간, 그녀가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저 차가운 심연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앉은 소파는 최고급 소재로 만들어져 안락해 보였지만, 바이브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죄수를 구속하는 전기의자처럼 보였다.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위선이었다. 부드러운 조명, 차분한 색감의 벽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인공적인 아로마 향까지.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공포를 정교하게 위장하고 마비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자의 악의적인 섬세함에 구역질이 났다.
그는 브리즈가 앉은 소파 옆에, 마치 그녀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섰다. 앉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언제든, 그 어떤 위협이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서 있는 편이 나았다. 그의 시선은 방 한쪽, 그림자가 드리워진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인영(人影)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방 안에 있었다. 바이브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닥터 밴스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하모니 디비전 소속이라면, 그놈이 그놈이었다.
상담사로 보이는 자는 흰 가운 대신 단정한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지적으로 보이는 반무테안경 너머의 눈은 감정을 읽을 수 없이 차분했다. 그는 바이브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손에 든 데이터 패드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마치 바이브는 존재하지 않는 공기 취급이었다. 그 오만한 태만이, 바이브의 인내심을 아슬아슬하게 긁어 내렸다.
앉으시죠, 센티넬 바이브.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그의 인상처럼 건조하고 평탄했다. 바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턱 끝으로 남자를 까딱이며, ‘지껄여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낼 뿐이었다. 남자는 바이브의 무례한 태도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시선을 소파에 웅크린 브리즈에게로 옮겼다.
가이드 브리즈. 본명 이지희. 최근 제출된 파동 데이터에서 유의미한 수준의 불안정성이 지속적으로 감지되었습니다. 특히 파트너 센티넬에 대한 잠재적 공격성 인자가 기준치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본 상담은 ‘가이딩 오염’의 명확한 진단과, 필요시 ‘코드 블랙’ 프로토콜 적용을 검토하기 위해 진행됩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얼음송곳이 되어 바이브의 고막을 찔렀다. ‘잠재적 공격성 인자’. ‘코드 블랙’. 저들은 브리즈의 공포와 고통을, 그저 그런 비인간적인 용어로 재단하고 있었다. 브리즈의 어깨가 남자의 말에 더욱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바이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어 남자의 턱을 날려버리기 전에, 먼저 나직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주둥이 못 닥치나.
상담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바이브의 목소리에는 이제 노골적인 살의가 담겨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미세한 바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며, 상담실의 온도를 몇 도는 떨어뜨렸다.
니가 뭔데 내 가이드를 판단하는데. 데이터? 그깟 숫자들이 뭘 아는데.
그는 브리즈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보호하듯 감싸 쥐었다.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이 그의 손바닥 아래서 느껴졌다. 그는 상담사를 향해, 맹수가 먹잇감을 노려보듯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했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다시 지껄여봐라. 지금 내 옆에 있는 내 가이드가, 누굴 공격할 것처럼 보이냐고. 그 빌어먹을 데이터 말고, 니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이 개새끼야.
갈라진 목소리. 제 옷소매를 붙잡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바이브는 그 순간, 제 분노가 만들어낸 거대한 폭풍의 눈 한가운데에 선 것처럼 모든 소리가 일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을 전부 찢어발길 것 같았던 살의가, 그녀의 그 작은 저항 하나에 거짓말처럼 발목을 잡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리즈를 내려다보았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떨면서, 그녀는 그를 말리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만…’. 그 한마디가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녀는 상담사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폭주 직전까지 내몰린 자기 자신이 더 두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분노가 그녀를 더 큰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이, 망치처럼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들끓는 분노를 억지로 혈관 안쪽으로 욱여넣었다. 펄펄 끓는 용암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그의 주변을 휘몰아치던 칼날 같은 바람이, 그의 의지에 따라 억지로 잠잠해졌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든 그의 명령 한마디에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릴 준비를 한 채, 그의 피부 바로 아래에서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브리즈는 이제 그가 아닌, 상담사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하기 시작했다. ‘오염의 흔적은 없다고 들었다’, ‘공격성 인자라니, 전혀…’. 그 모습에 바이브는 숨을 참았다. 그녀는 지금, 저 괴물들의 언어로, 저들의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었다. 무섭고, 두렵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텐데. 이 모든 게 부당하다고 소리치고 싶을 텐데도.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규칙’ 안에서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편이, 자신을 더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처절한 이성이, 바이브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후벼 팠다.
상담사는 브리즈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바이브의 분노가 잦아든 것을 확인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데이터 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 오만한 태도에 바이브의 속에서 다시 한번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는 브리즈의 어깨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며 참았다. 지금은 그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가이드 브리즈. 주간 리포트는 단순 요약본일 뿐입니다. 현재 본 상담은 귀하의 원본 파동 데이터(Raw Data)를 심층 분석한 결과를 기반으로 진행 중입니다.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데이터 패드의 화면을 브리즈가 볼 수 있도록 가볍게 기울였다. 화면에는 그녀가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파동 그래프와 수치들이 가득했다.
표면적으로는 안정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파동의 가장 깊은 곳에서 미세한 역류 현상과 비동기화 노이즈가 측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가 ‘잠재적 공격성 인자’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입니다. 이는 가이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이딩 시 센티넬의 파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신호입니다.
‘역류’, ‘노이즈’, ‘위험한 신호’. 남자는 계속해서 얼음 조각 같은 단어들을 던져 브리즈를 고립시켰다. 그녀의 희미한 희망마저 잘라내려는 듯, 그의 설명은 지독하게도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브리즈의 얼굴이 절망으로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바이브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브리즈의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그녀가 앉은 소파의 등받이를 강하게 짚었다. 마치 그녀의 영역을 선포하는 것처럼.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위협의 농도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그는 상담사의 눈을 똑바로 꿰뚫어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잘난 데이터 나부랭이로 위험하다, 위험하다 떠들기만 하면 끝인가? 해결책은 뭔데. 니들이 말하는 그 ‘노이즈’라는 게, 왜 생겼는지 원인은 알고 지껄이는 거가.
바이브는 상담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모르겠지. 니들은 그냥 현상을 보고 분류하고 딱지 붙이는 게 전부니까. 환자는 보지도 않고 차트만 보고 진단 내리는 돌팔이 의사 새끼들처럼.
그는 짚고 있던 소파 등받이에서 손을 떼고, 브리즈의 옆,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이제 그는 그녀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녀를 자신의 영역 안에 완벽하게 넣은 채로 상담사와 마주했다.
똑똑히 들어라. 내 가이드한테 생겼다는 그 노이즈, 그거 니들이 만든 거다. 멀쩡한 사람 시한폭탄 취급하고, 잠재적 오염원이니 뭐니 공포감 조성해서 밤에 잠도 못 자게 만들고, 매시간 보고하라고 목줄 채워놓고.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파장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가? 그걸 가지고 ‘공격성 인자’니 ‘역류’니,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는 삐딱하게 다리를 꼬며, 턱 끝으로 상담사를 가리켰다.
상담? 웃기지 마라. 이건 심문이고, 가스라이팅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말해라.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뭔데.
바이브의 날 선 목소리가 상담실의 공기를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혔다. 그의 모든 단어는 정교하게 벼려낸 칼날이 되어, 상담사를 향해 날아갔다. 그가 뿜어내는 노골적인 적의와, 브리즈의 곁을 한 치도 떠나지 않겠다는 듯한 방어적인 자세는, 이 방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듯했다. 브리즈는 자신의 옆에 걸터앉은 그의 단단한 옆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이제는 바로 곁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감싼 울타리가 되어 울리고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해 싸우고 있는 저 남자의 존재감 때문에, 그의 절박한 분노 때문에, 이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심장이 멋대로 요동쳤다.
상담사는 바이브의 맹렬한 비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제 앞에 앉은 젊은 센티넬을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마치 흥미로운 연구 대상을 분석하는 과학자처럼, 그의 시선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바이브의 분노 수치, 파장 변화, 동공의 떨림 같은 데이터들을 수집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었다. 이윽고, 그는 손에 든 데이터 패드의 전원을 끄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데이터는 필요 없다는 듯한, 혹은 이미 결론은 내려졌다는 듯한 무심한 동작이었다.
센티넬 바이브. 당신의 주장은 매우 감정적이지만,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온기가 없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시스템이 야기한 스트레스가 가이드의 파장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가이드 브리즈의 파장은 현재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당신을 포함한 모든 S급 센티넬 자원의 안전 확보입니다.
그는 바이브를 지나쳐, 다시 브리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 시선은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 집요하고 냉정했다.
본론을 원하셨죠. 좋습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하모니 디비전 중앙 관리국은, 가이드 브리즈에 대한 ‘코드 옐로우’ 발령을 결정했습니다.
‘코드 옐로우’. 바이브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코드 블랙보다는 낮은 단계였지만, 여전히 통제와 감시를 의미하는 낙인이었다. 남자는 바이브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향후 2주간, 가이드 브리즈는 파트너 센티넬과의 모든 직접적인 가이딩이 금지됩니다. 신체 접촉 역시 최소한으로 제한될 겁니다. 해당 기간 동안, 지정된 상담 섹터에서 매일 2회 안정화 세션을 받게 되며, 파장 데이터는 30분 단위로 중앙 서버에 자동 전송됩니다.
순간, 바이브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딩 금지. 접촉 제한. 2주. 그 단어들이 그의 뇌 속에서 멋대로 조합되며, 최악의 그림을 그려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 개자식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제 연인에게, 이제 유일한 안식처인 자신과의 접촉마저 빼앗겠다고? 그녀를 다시 그 지독한 공포 속에 혼자 내버려 두겠다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살벌하고 순도 높은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상담실의 모든 사물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조명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폭풍의 핵, 그 자체였다.
니들, 지금 내 앞에서 선을 넘었다.
그는 한 걸음, 상담사를 향해 내디뎠다. 그가 발을 뗄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가는 듯한 압력이 공간을 짓눌렀다. 그는 겁에 질려 자신을 붙잡으려는 브리즈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그녀를 제 등 뒤로 확실하게 밀어 넣었다.
가만있어라. 지금부터는 내가 알아서 한다.
그는 더 이상 상담사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방 구석에 설치된, 붉은빛을 깜빡이는 감시 카메라를 향해 있었다. 그는 그 렌즈 너머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진짜 ‘개자식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었다.
내 가이드한테서 손 떼라. 가이딩 금지? 접촉 제한? 그딴 개소리 지껄일 거면, 차라리 내 목에 직접 칼을 꽂아. 그게 더 빠를 테니까.
‘쨍그랑!’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담사가 앉은 테이블 위의 유리컵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저절로 박살이 났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폭주 직전의 파동이 손끝에서부터 스파크처럼 튀고 있었다.
내 세상은, 내가 지킨다. 니들이 만든 그 같잖은 시스템 안에서 썩게 둘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다시 한번 말한다. 당장 그 결정 철회하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러지 않으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상담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였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의 통제권을 벗어난 바람이 상담실을 할퀴었다.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살의가 공간을 가득 메우는 그 순간, 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어 불능의 칼날들이 휘몰아치는 그의 품으로, 브리즈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를 향해 뻗어 오는 모든 위협을 제 몸으로 막아서려는 듯, 필사적인 힘으로.
바이브는 순간 숨을 멈췄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터져 나가려던 모든 파괴적인 에너지가 그녀의 온기에 가로막혀 급정거했다. 제멋대로 날뛰던 바람의 칼날들이 그녀의 등에 닿기 직전, 기적처럼 흩어졌다. 그의 분노는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그의 품에 매달린 이 작은 온기 하나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떨리는 몸, 귓가에 속삭이는 애원, 얇은 제복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 그 모든 것이 그의 폭주에 가장 강력한 족쇄가 되어 채워졌다.
‘…내가… 바이브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잖아요…’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이브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다칠까 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폭주 직전의 센티넬에게 맨몸으로 안겨, 제 몸이 갈가리 찢길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그를 해치게 될까 봐 울고 있었다. 그 지독하고 이타적인 사랑이, 바이브의 심장을 통째로 쥐어짜는 듯했다. 분노로 뜨거웠던 머리가 차갑게 식고, 그 자리를 거대한 슬픔과 무력감이 채웠다.
‘싫단 말이에요… 그런 건, 죽어도 싫어…’
그녀의 절규는 그의 마지막 이성을 붙잡는 동아줄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날뛰면 날뛸수록, 그녀는 더 깊은 공포 속으로 내몰릴 뿐이라는 것을. 그녀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분노가, 역설적으로 그녀를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지금,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위험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자각이, 그의 모든 분노와 살의를 남김없이 무너뜨렸다.
바이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떨고 있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것을 다루듯. 그의 품에서 그녀가 다칠세라, 주변에 떠돌던 마지막 바람의 잔재까지 억지로 거두어들였다. 상담사도, 시스템도, ‘코드 옐로우’ 따위의 개소리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온 세상이 지금 그의 품 안에서, 그로 인해 울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큰 절망은 없었다.
알았다.
그가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의 샴푸 향과, 그녀 고유의 부드러운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지독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안 할게.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러니까, 울지 마라.
그는 상담사를 향해, 완전히 힘을 잃은 눈빛을 보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살의가 없었다.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패배감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길 수 없었다. 그녀가 우는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것은 항복 선언이자, 맹세였다.
니가 싫다는 짓, 절대 안 한다. 내 목숨보다 그게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 제발. 그만 울어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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