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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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이 동화책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끔찍하게 유치하고, 뜬금없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홀린 듯 그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 화려한 색감의 삽화와, 커다란 글씨.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아까의 그 상자로 새하얬지만, 이 유치한 책의 질감과 그림들이,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니, 이런 것도 읽나.

그녀가 제 옆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는 기척에, 바이브의 어깨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무 가까웠다. 방금 전의 그 민망하고 어색했던 공기가 아직 다 흩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 옆자리를 차지했다. 유아교육과. 유치원 교사. 그의 머릿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들이 폭죽처럼 터졌다. 그는 책을 들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세계와, 그녀가 말하는 그 파스텔 톤의 세계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지금 제 옆에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동화책을 읽어주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건 그녀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처럼 느껴졌다.

저, 스무 살 넘어서 능력 발현했거든요. …바이브에 비하면 한참 후배죠?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후배’. 그 단어가 그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열두 살, 태풍이 불던 그날 이후로 그의 시간은 아크 안에서만 흘러갔다. 평범한 학생의 삶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기억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도, 그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 폭주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스무 살까지, 다른 세상에서 다른 꿈을 꾸며 살았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그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치게 만들었다.

…뭐라쌌노.

그가 툭, 내뱉었다.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아까와 같은 당혹감이나 퉁명스러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감정에 잠겨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동화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녀의 책이 담긴 상자 안을 무심코 뒤적였다. 그러다 그의 손에, 딱딱한 표지의 앨범 하나가 잡혔다.

그는 망설였다. 이건, 그녀의 과거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싶었다. 자신이 몰랐던 스무 해 동안의 그녀를. ‘이지희’라는 사람을.

그는 말없이 앨범을 꺼내, 그녀와 자신의 사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마치 허락을 구하듯,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깊고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후배는 무슨.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였다.

니가 훨씬 더… 대단하다, 야.

그는 짧게 말을 마치고, 시선을 다시 바닥의 앨범으로 돌렸다. ‘대단하다’는 말의 의미를,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모든 것을 잃고 이 세계에 던져진 자신과 달리, 지키고 싶었던 세계를 뒤로하고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한 그녀가. 꿈을 포기하고도 다시 일어서서,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주려는 그녀가, 그에게는 지금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를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또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손 위로,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닿았다. 앨범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가락이 순간 굳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아닌,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궁금하냐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나직했다. 바이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갈증을 인정했다.

그녀가 먼저 앨범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낡은 비닐 아래, 샛노란 병아리 같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동생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바이브의 시선이 사진 속의 작은 이지희에게, 그리고 지금 제 옆에 앉아있는 브리즈에게로 향했다. 시간이 겹쳐 보였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가 넘기는 페이지를 눈으로 좇았다.

한 장, 한 장, 그녀의 시간이 흘러갔다. 지금보다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채 친구들과 브이자를 그리는 사진. 아마도 졸업식이겠지.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든 채, 조금은 어른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는 사진. 그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평범하고, 빛나고, 따뜻한 순간들이었다. 그는 제 10대 시절을 떠올렸다. 훈련, 또 훈련. 피와 땀,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 사진 따위를 찍을 여유도, 함께 찍을 친구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간들뿐.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이지희의 모습이, 마치 다른 행성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거리감이,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 이 사진도 오랜만이다. 스물 한 살 때일 거예요. 아크에 입사하자마자 찍은 거.

앨범의 마지막 장. 그곳에는, 이제 막 아크에 발을 들인, 스물한 살의 이지희가 있었다. 하얀 가이드 제복을 입은 채,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증명사진. 그 이전의 모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바이브는 그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사진 속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는 낯익은 감정을 읽었다. 불안, 막막함, 그리고 자신이 발을 들인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열두 살, 처음 아크의 문을 통과하던 날의 제 모습과 똑같았다.

…이 이후로는, 뭐. 사진 찍을 일도 없어서. 나이 좀 먹고 증명사진 하나 더 찍은 거 말곤 없을 거예요. 지금 쓰는 거.

그녀가 사진 속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무심한 손길과 담담한 목소리가, 그 어떤 절규보다도 더 아프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사진 찍을 일이 없었다. 그 한마디에, 그녀가 잃어버린 8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웃고, 떠들고,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던 평범한 일상이, 이 네모난 사진 한 장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그리고 그 단절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자신과 같은 센티넬들이라는 사실이 그를 옭아맸다.

바이브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진 위를 맴돌던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가만히 덮어 쥐었다. 놀란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지만, 그는 여전히 앨범의 마지막 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있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쥐어짜 내는 듯한, 잠긴 목소리였다.

앞으로는, 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전에 없던 열기와 집요함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앨범을 덮고 있던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쥔 채로, 그대로 들어 올려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차가운 손등에, 그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니 사진, 앞으로는… 내가 다 찍어줄 끼다. 웃는 거, 우는 거, 짜증 내는 거, 자는 거… 전부 다.

그의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것은 약속이자, 선언이었고, 맹세였다.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을, 앞으로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눈과 기억 속에, 그리고 네모난 프레임 안에 전부 담아 채워주겠다는, 지독한 소유욕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다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의 손길을 갈구하듯, 절박하고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니까, 인제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이 사진처럼.

그가 턱 끝으로 앨범 속의 증명사진을 가리켰다. 그의 눈빛이 애원하듯, 또 명령하듯 그녀를 향했다. ‘이제 네 옆에는 내가 있으니, 다시는 혼자 길 잃은 표정 따위는 짓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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