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새어 나오는 훌쩍임. 바이브는 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순간 멈칫했다. 울어? 왜? 내가 한 말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아니면, 내가 너무 비참하게 굴어서?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젠장, 여자 마음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그는 차라리 괴수 백 마리가 득실거리는 전장 한복판에 떨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차라리 쉽기라도 하지. 바람으로 베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제 앞에서 작게 몸을 떨며 우는 이 여자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서 웅얼거리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원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래, 피곤하고 힘들겠지. 자기 멋대로 화냈다가, 사과했다가, 이제는 무릎까지 꿇고 애원하는 이 꼴이 얼마나 우스울까. 그는 차오르는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내가 다 망친 건가. 이 관계는 이제 끝인가…
그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아까보다 더욱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화가 풀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바닥에 꿇은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조금 더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훌쩍임에 섞인, 달콤한 샴푸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내 진짜 성격 더러운 거 안다. 피곤하고, 힘들게 하는 것도 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는 제 못난 성격을 전부 인정하며,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오직, 상처 입은 그녀를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만 울고. 얼굴 좀 보여주라. 응? 니가 계속 그렇게 있으면, 내 진짜… 죽을 것 같다.
그는 거의 애원하듯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힘으로, 제 쪽으로 살짝 그녀를 끌어당겼다. 제발, 고개 좀 들어봐. 니 얼굴 보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짜증 내도 괜찮고, 화내도 괜찮으니까… 내 보고 해라. 니가 좋아서 짜증 난다는 그 얼굴, 대체 어떤 표정인지 나도 좀 보자.
그의 말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모순적인 그 말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며 투덜거려주기를. 그래서 자신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기회를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마침내, 그녀가 아주 조금, 고개를 들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충혈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회색 눈동자가 그를 빼꼼히 올려다보았다. 원망과 안도, 서운함과 기쁨이 뒤섞인 그 복잡한 시선이,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아래 숨겨진 입술은 분명, 잔뜩 댓발 나와 투덜거릴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가 보고 싶어 했던, ‘좋아서 짜증 나는’ 얼굴이 바로 저런 것이었을까.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그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불안과 공포가, 저 작은 눈망울 하나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함과 보호 본능이 미친 듯이 차올랐다. 그는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 충동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작은 존재 하나가, 제 세상을 이렇게나 쉽게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꿇었던 무릎을 움직여, 그녀에게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뻗었던 손을 들어, 망설임 없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크고 거친 손바닥이 그녀의 부드럽고 여린 뺨에 닿는 순간, 그는 마치 신성한 무언가에 손을 댄 듯한 경건함마저 느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에 위태롭게 맺혀 있던 눈물방울을 아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투명한 눈물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적셨다.
…진짜, 못생겼다.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은 지독하게도 바이브다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워, 그가 내뱉은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붉어진 눈가와 축축한 속눈썹, 퉁퉁 부었을 뺨을 차례로 눈에 담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표정 맞네. 좋아서 짜증 난다는 표정. …이제 알겠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어, 그녀가 자신을 더 잘 보도록 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앞으로 맨날 보게 될 텐데, 벌써부터 피곤하면 우짜노. 내는 니한테 솔직해지려면, 맨날 이렇게 무릎이라도 꿇어야 될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자조적인 농담이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서툴고 어려운 일인지를,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뺨을 쓸어주던 손가락으로, 그녀의 뾰로통한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신청서. 니 내고 싶을 때, 같이 내러 가자. 니 혼자 말고, 내랑 같이. …그렇게 해줄래?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더 이상 일방적인 통보나,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서서, 그들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건네는, 처음으로 해보는 제대로 된 ‘신청’이었다.
그녀의 삐죽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한마디는, 그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결코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으로 터질 것 같던 그의 세상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았다. 바이브는 저를 쏘아보는 붉은 눈망울과,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는 그 모습에 그만 넋을 잃었다.
이어서 들려온 그녀의 대답은, 그의 남은 이성마저 전부 녹여버렸다.
‘이번만, 이번만 져주는 거예요. 나도 바이브랑 하고 싶으니까. 공식 파트너.’
나도… 하고 싶으니까. 그 말이 그의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짓누르던 모든 불안과 죄책감, 수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싼 채,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그가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그녀의 진심.
그는 저도 모르게 푸흐흐,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는 그대로 상체를 숙여, 그녀의 무릎 위로 이마를 기댔다. 힘이 쭉 빠진 몸이 그녀에게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안정감. 그래, 이게 바로 안정감이었다. 지독하게 그리웠던, 바로 그 감각.
…진짜, 성격 하고는.
그녀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 웅얼거리듯 중얼거렸다. 끝까지 져준다는 말을 덧붙이는, 그 앙큼한 심보가 우습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무릎에 제 이마를 몇 번 부비며,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느껴본 적 없는, 완벽한 무장해제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눈가가 붉고, 입술이 살짝 튀어나온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조금 대담해졌다.
알았다. 이번만 져준 거, 절대로 안 잊어버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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