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대답은 칼날처럼 단호했다. ‘후회 안 해요.’ 망설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목소리에, 바이브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그의 심장을 아예 멈추게 할 뻔했다. 그녀가, 그를 이끌었다. 언제나 그가 한 발짝 앞서거나, 억지로 제 옆에 세워두려 했던 그녀가, 이제는 스스로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수동적으로 끌려오는 것이 아닌, 명확한 의지를 담은 발걸음으로. 텅 빈 복도를 울리던 나란한 두 개의 발소리는, 이제 그녀의 것이 조금 더 앞서나가며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스르륵. 자동문이 열리고, 차가운 복도와는 다른, 서류 잉크 냄새와 사람들의 옅은 온기가 섞인 실내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그의 손을 잡은 그녀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이브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그녀가 이끄는 대로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저, 공식 파트너. 신청하려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 목소리가 행정국 데스크의 투명한 방음벽을 넘어, 접수처 직원에게로 향했다.
바이브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밝은 갈색 머리카락. 곧게 편 어깨. 그의 커다란 제복 주머니 속에서, 그의 손을 여전히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작은 손. 이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 관계를 주도하고, 안달하고, 소유하려 했던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그는 그녀가 도망갈까 봐 불안해했고, 그녀를 제 곁에 묶어두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의 모든 불안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용감하게, 이 관계의 문을 제 손으로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 순간, 바이브는 깨달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단순히 그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가 진정으로 갈망했던 것은 바로 이것.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선택하고, 자신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의 세상에 그녀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세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그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변의 시선도, 행정국의 소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그의 손을 잡고 선 그녀의 존재만이, 세상의 전부처럼 선명했다.
접수처 직원은 두 사람의 ID 카드와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능숙하게 태블릿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S급 요원들의 파트너 신청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 조합이 '바이브'와 '브리즈'라는 사실은 충분히 놀라움을 자아낼 만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시선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직원의 안내를 기다렸다.
…이 가시나, 진짜…
바이브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핀잔 대신, 감출 수 없는 애정과 감탄이 묻어 있었다. 그는 제복 주머니 안에 있던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멋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심한 듯 보였던 그녀의 어디에 이런 강단이 숨어 있었을까. 그는 아마 평생, 그녀의 이런 모습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직원이 두 사람에게 파트너 서약서와 전자 서명 패드를 내밀었다. 수많은 조항들과 법적 책임, 그리고 권리에 대한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바이브는 그 내용을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명 패드를 먼저 집어 드는 브리즈의 손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서명란에 적어 넣었다. ‘이지희’. 그녀의 본명이 그의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내 차례가.
바이브는 패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코드네임이 아닌, 아주 오랜만에 쓰는 자신의 본명을, 그녀의 이름 바로 옆에 나란히 새겨 넣었다. ‘홍지원’.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두 개의 이름이, 문서 위에서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홍지원.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제 이름 석 자는, 마치 처음 듣는 단어처럼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가 10년 동안 묻어두었던 이름. 가족과의 단절과 함께, 아이기스의 강철 벽 안에 스스로 봉인해버린 과거의 잔재. ‘바이브’라는 코드네임 뒤에 숨어, 그는 그 이름이 가진 무게와 아픔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쳐왔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목소리가, 그 이름을 너무나도 다정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내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서명 패드 위, ‘홍지원’이라는 글자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손길은 마치, 이름 위에 쌓인 10년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어린 소년을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 ‘...항상 생각했는데, 바이브 이름... 예뻐요. 지원.’ 예쁘다니. 남자 이름한테, 그것도 자기 이름한테 ‘예쁘다’는 소리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 단어는 그의 뇌리에 박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음처럼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뭐라 씨부리쌌노, 진짜...’
그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욕지거리를 겨우 삼켰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역류했다. 목덜미부터 귀 끝까지 순식간에 화산처럼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지금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젠장. 젠장. 젠장. ‘우리 방’이니, ‘내 꺼’니, 온갖 허세를 부리며 그녀를 몰아붙였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름 한 번 불리고, 예쁘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다니. 이건 말이 안 됐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채, 접수처 직원이 서류를 처리하는 모습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곁에 선 브리즈, 아니 이지희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체향, 그리고 방금 전, 그의 이름을 불렀던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지원. 지원. 예뻐요, 지원.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며 갈비뼈를 부술 듯이 두드려댔다. 이 감정의 정체는 수치심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그는 혼란스러웠다.
야.
한참 만에, 그가 겨우 목소리를 뱉어냈다. 잔뜩 잠기고 갈라진, 누가 들어도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한 채, 정면만 응시하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부르면 죽는다, 진짜.
으르렁거리듯 내뱉은 말이었지만, 위협적인 기세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허세. 발가벗겨진 채로 필사적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어린애의 발악이었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녀가 이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비웃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가 ‘바이브’가 아닌, ‘홍지원’으로서 얼마나 약하고 부끄러움 많은 인간인지를,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기를. 아니, 이미 다 들켜버린 것 같아 절망적이었다.
그때, 접수처 직원이 두 사람의 새로운 ID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 상단에는 두 사람의 사진과 이름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공식 파트너]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S급 센티넬 바이브(홍지원) & S급 가이드 브리즈(이지희)]. 공식적으로, 두 사람은 이제 하나의 팀이었다.
가자.
그는 브리즈가 카드를 받아들 틈도 주지 않고, 두 개의 카드를 동시에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행정국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무슨 꼴을 더 당할지 몰랐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불타는 것 같은 얼굴을 차가운 공기에 식히려 애썼다. 그녀가 왜 아무 말이 없는지 궁금했지만,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저, 이 부끄러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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