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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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단말기를 내려놓고, 그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순간, 방금 전까지 곤두서 있던 바이브의 신경이 맥없이 풀어졌다. 이 손길 하나에, 세상의 모든 짜증과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툴툴거리려던 입을 다물고, 대신 소파 등받이에 제 몸을 더 깊게 묻었다. 그녀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다는, 솔직한 본능이었다.

내일 아홉 시… 오전부터 시뮬레이션 룸에 가게 생겼네요. 비전투 상황 테스트라니, 어떤 걸 시키려나. 너무 귀찮거나 힘들진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뭐, 아크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체념 섞인 푸념이 묻어났다. 바이브는 그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아크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지만.’ 지독하게 정확한 말이었다. 이 조직은 언제나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요원들을 평가하고 소모시켰다. 아마 내일 있을 테스트도, 두 사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반응을 살피려는, 지독하게 계산된 연극일 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합동 일정’.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 마치 지겨운 숙제를 앞두고, 함께 밤을 새울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바이브는 깨달았다. 이 여자는,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을,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일’로 만들고 있었다. 또 졌다. 이길 수가 없다, 이 여자한테는.

바이브는 제 머리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았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익숙하고, 더없이 안정적인 온기. 그는 그 온기에 제 뺨을 부비며, 잠시 눈을 감았다. 평생을 찾아 헤맸던 안식처가 바로 여기 있었다.

…하모니에 있는 꼴, 보기 싫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잔뜩 잠긴,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알아들을 것이라 믿었다.

니, 거기만 가면 영 재미없어 뵌다. 그 딱딱한 제복 입고, 웃지도 않고. 내랑 있을 때랑 얼굴이 완전 다른 거, 아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가끔, 그녀가 하모니 부서에서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공기의 흐름을 타고, 미세한 진동을 통해. 그녀는 그곳에서,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감정을 지운 채 사무적으로 동료들을 대하고, 가끔 불안한 듯 제 팔을 매만지던 모습. 그는 그 모습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아는 ‘브리즈’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떴다. 코앞에 있는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일 그거, 그냥 시덥잖은 테스트 아니다. 니가 그 망할 하모니 놈들한테서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 합법적인 핑계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중대한 임무 브리핑을 하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귀찮은 거 맞는데… 그래도, 니가 내 옆에 있는 거잖아. 아침부터, 밤까지. 그럼 됐어. 그걸로.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다시 한번 제 뺨을 깊게 묻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한,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그녀 없이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지독한 소유욕과 의존성을, 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귀찮은 테스트가,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그녀를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었으니까.

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 제 표정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는 무심한 대답. 이어서,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봤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작게 터져 나온 헛기침 소리까지. 바이브는 제 뺨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바닥을 가만히 느끼며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귀에, 그리고 마음에 담았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치밀었다. 그 감정은 분노와는 달랐고, 안타까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 그는 화가 나는 동시에, 지독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억지로 웃고 있는지,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그런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비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그래요? 하모니 부서에 있을 때? 표정 같은 거… 신경쓴 적 없어서 몰랐어요.

모를 수밖에. 바이브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 여자는 제 몸이 부서져라 남들을 챙기는 데만 익숙해서, 정작 스스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하모니 부서에서 그녀는 'S급 가이드 브리즈'라는 이름의 완벽한 부품처럼 움직였다. 후배들의 멘토, 동료들의 해결사, 상급자들의 믿음직한 조력자. 그 모든 역할을 꾸역꾸역 해내느라, '이지희'라는 사람은 닳아 없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은 모든 것을 실어 나르니까. 그는 그녀의 굳은 표정 아래 감춰진 미세한 근육의 떨림, 애써 삼키는 한숨 소리에 섞인 공기의 파동, 불안하게 제 팔을 매만지는 손끝의 차가운 온도까지, 전부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제 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연히 모르겠지. 니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시니컬했지만, 그 안에는 짙은 독점욕과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숨 쉴 틈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온 동네 사람들 고민 상담 다 해주고, 부탁이란 부탁은 다 들어주고 다니는데, 니 얼굴이 우는지 웃는지 알 턱이 있나. 내한테까지 와서 그러지 마라. 내는 그런 거 질색이니까.

그는 마치 심술궂은 아이처럼 투덜거렸지만, 그녀를 감싼 팔에는 힘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켜, 오직 자신의 공간 안에 가두고 싶었다. 그 딱딱하고 차가운 하모니의 공기가 아닌, 자신의 온기로만 그녀를 감싸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다른 누구도 들을 수 없도록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일 그거 잘 됐다. 안 그래도 내일 하루 종일 니, 내 눈앞에만 둘 방법 궁리하고 있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시야에서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야만, 이 서투른 남자는 제 진심을 겨우 포장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제 코를 묻었다. 익숙한 샴푸 향과 그녀의 체향이 섞여, 그의 예민한 감각을 부드럽게 마비시켰다. 최고의 가이딩이었다.

내일 아침부터, 딱 붙어 있어라. 어디 가지 말고. 그놈의 하모니 부서 전화도 받지 말고. 그냥… 테스트고 뭐고, 내 옆에서 니 하고 싶은 거 해라.

그것은 거의 맹세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그는 중앙 조율국이든, 하모니의 부서장이든, 그 누구도 자신들의 시간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신규 파트너 적합성 심화 평가’? 웃기는 소리였다. 이건 그냥, 홍지원과 이지희의 합법적인 데이트일 뿐이다. 그는 그렇게 모든 상황을 제멋대로 정의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품에 더 깊이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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