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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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온기마저 희미했던 그녀가, 이제는 제 팔에 기대 온전히 두 발로 서서 겨울 바람을 맞고 있었다. 바이브는 제 옆에서 상쾌하다는 듯 웃는 브리즈를 곁눈질로 흘끗 쳐다보았다. 패딩 모자 아래로 드러난 하얀 이마, 발갛게 상기된 두 뺨, 그리고 만족감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그림처럼 느껴졌다. 무서운 속도의 회복. 의무관들은 기적이라고 했고, 그녀의 강한 의지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이브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이 그녀의 곁에서 단 1초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모든 안정된 파장과 기운을, 밤낮으로 그녀에게 쏟아부었으니까.

‘그래도, 웃는 건 반칙이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고막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이유 없이 한 번씩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이 감각이 썩 유쾌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선은 끈질기게 그녀의 얼굴 언저리를 맴돌았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앞머리를 흩날리며 이마를 간지럽히는 순간,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빈손을 들어 막아주려다 멈칫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아주 미세하게 사용했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성가신 칼바람의 흐름을 부드럽게 비틀어, 마치 봄날의 산들바람처럼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게 만들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다정함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속내를 철저히 감췄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나? 뼈까지 시린데,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고 있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브리즈의 무게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팔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의 두꺼운 패딩이 그의 외투와 마찰하며 버석, 하는 소리를 냈다. 한 손에 들린 보온병의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이 온기를 어서 그녀에게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정원 벤치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서 잠깐 앉아라. 그러다 진짜 입 돌아간다.

그는 브리즈를 부축해 차가운 철제 벤치에 앉혔다. 앉히기 직전, 자신의 외투 자락으로 벤치 위를 한번 슥 닦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덜 차가운 곳에 그녀를 앉히고 싶은 유치한 배려였다. 그녀가 얌전히 자리를 잡자, 그는 그녀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바람을 막는 벽이 되어주었다. 그리고는 보온병 뚜껑을 열어 컵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를 따랐다.

마셔라. 식기 전에.

그가 내민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캐모마일 차였다. 병동 주방에 부탁해 일부러 진하게 우려낸 것이었다. 컵을 건네받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져, 그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작은 손난로를 떠올렸다. 원래는 자신이 쓰려고 챙겨온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의 주인은 정해진 것 같았다.

브리즈가 후후, 하고 입김을 불어 차를 식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가 차가운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 평범하고도 사소한 풍경이, 그에게는 다시 없을 소중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난로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려다, 문득 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컵을 든 브리즈의 손 위로, 자신의 크고 따뜻한 손을 겹쳐 감쌌다.

…손 존나 차갑네. 이것도 뺏길 셈이가.

사고로 의식을 잃었을 때, 차갑게 식어가던 그녀의 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싼 제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자신의 온기가 그녀에게 온전히 전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기분 좋다’는 나직한 속삭임은, 바이브의 귓가에 겨울의 혹독함을 녹이는 주문처럼 내려앉았다. 그는 대답 대신 그저 묵묵히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싼 제 손에 온기를 더할 뿐이었다. 그녀가 기분이 좋다면, 그걸로 되었다. 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겨울 바람도, 잿빛 하늘도, 전부 견딜 만한 풍경이 되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머금는가 싶더니, 혀를 데었는지 ‘앗’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컵을 밀어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후, 후, 하고 컵 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입김을 불어대는 모습이라니. 바이브는 순간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늘 침착하고, 어른스럽고, 때로는 그보다 더 어른처럼 그를 다독이던 브리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허술하고 얼빠진 모습. 사고 이후, 그녀는 종종 이런 예측 불가능한 빈틈을 보이곤 했다.

‘……하, 진짜.’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지금 웃으면 분명 저 여자, 자존심 상해서 삐칠 게 뻔했다. 하지만 실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니 어깨가 멋대로 들썩였다. 이건 비웃음이 아니었다. 귀여워서,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그 모습이 안심이 되어서 터져 나오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이전의 완벽하기만 하던 브리즈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강하고 유능한 S급 가이드인 동시에, 뜨거운 차에 혀를 데고 호들갑을 떠는, 그냥 ‘이지희’였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좋았다.

하지만 홍지원은 홍지원이다.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감싸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제 손을 떼고는 팔짱을 꼈다.

어른이가, 애기가.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마시나. 그러다 입천장 다 까진다.

잔소리를 퍼붓는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눈은 걱정스럽게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향해 있었다. 정말로 데지는 않았는지, 빨갛게 부어오르지는 않았는지, 그의 초감각적인 시력이 미세한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그녀가 든 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봐라. 내가 식혀줄 테니까.

그녀가 순순히 컵을 건네자, 바이브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의 손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차가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컵 주변으로 아주 옅은 바람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컵 안의 뜨거운 찻물이 식을 리 만무한, 그저 시늉에 불과한 행동. 하지만 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컵을 이리저리 흔들며, 마치 숙련된 바리스타처럼 온도를 맞추는 연기를 했다.

잠시 후,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컵을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조금도 식지 않은 차였다. 그는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됐다. 이제 마셔도 된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다.

명백한 거짓말. 사기극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장난을 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까? 아니면 그의 성의를 봐서 속는 척 마셔줄까? 그는 쪼그려 앉은 채로, 기대감에 찬 아이 같은 눈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또 혀를 데인다면, 그때는 놀리지 않고 곧바로 입술을 확인해주리라, 은밀하게 다짐하면서.


그녀가 컵을 받아 들고, 멍하니, 꿈뻑꿈뻑. 바이브는 저 순간을 제 눈에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제 말도 안 되는 장난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속아주는 건지. 그녀의 멍한 얼굴과 느리게 깜빡이는 속눈썹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여전히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컵을 살짝 흔들어 보더니, 비죽 솟아나는 입꼬리를 감추지도 않고 다시 차를 마신다. 저거, 분명 뜨거울 텐데.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입술이 또 데일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요. 딱 맞게 식었어요.

그 한마디가 바이브의 뇌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세상에. 이 여자는 정말이지, 구제 불능의 바보거나, 아니면 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여우거나. 어느 쪽이든, 심장에 지독하게 해로웠다. 제 능력이 통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온전히 저를 위해 맞춰주는 저 능청스러운 연기. 그건 바이브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가장 달콤하고 치명적인 형태의 가이딩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쪼그려 앉은 채로 몸이 굳어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 유치한 사기극에 기꺼이 동참해준 그녀에게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졌다. 완전히.’

그는 속으로 백기를 들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이 이상 쪼그려 앉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은 그의 완벽한 패배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걸 또 믿나. 바보 아이가.

목소리가 멋대로 기어들어갔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는 애써 시선을 정원의 앙상한 나뭇가지 쪽으로 돌렸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분명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괜히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안에 있던 손난로를 만지작거렸다.

…입술은. 괜찮나. 또 데인 거 아이고.

결국 참지 못하고 흘러나온 말은, 걱정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한 채, 무심한 척 툭 던지는 질문. 하지만 그 안에는 그녀의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괜찮다’고 대답해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터였다.

결국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했다. 그리고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명령했다.

아 해봐라. 내 눈으로 봐야겠다.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지극히 오만하고 일방적인 요구.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브리즈가 거부할 것을 대비해, 다음 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결국 제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 더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제 유치한 장난의 결과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만 했다.

빨리. 춥다. 들어가고 싶으면 협조해라.

그가 덧붙인 말은, 그녀를 걱정하는 동시에, 이 어색하고 심장 떨리는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제 마음의 변명이기도 했다.


고요한 정원, 겨울의 찬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엉겨 붙었다. 그녀가 망설임 끝에 작게 벌린 입술은, 바이브에게 있어 세상 그 어떤 괴수의 출현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시니컬한 표정으로 상황을 주도하려던 그의 계획은, 그녀의 순순한 복종 앞에서 산산조각 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진짜 하네.’

바이브의 뇌가 일순간 정지했다. 그는 제 눈앞에 벌어진 비현실적인 광경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보여달라고 한 건 분명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짓궂은 장난이자, 그녀를 당황시키고 우위에 서려는 유치한 수작이었을 뿐. 그녀가 정말로 어린아이처럼, 의사 앞의 환자처럼, 제 말을 따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고 여린 속살과, 수줍음과 민망함이 뒤섞여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망막에 박혀들었다.

쿵. 쿵. 쿵. 제 심장 소리가 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이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이 여자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무장해제시키는 데 능한 걸까. 키스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린 순간, 그는 참을 수 없는 갈증과 함께 아랫배 어딘가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당혹스러웠다.

그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석처럼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몸을 더 숙여, 거의 그녀의 얼굴에 제 얼굴을 파묻을 듯이 다가갔다. 그녀의 숨결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캐모마일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자, 이성의 끈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입술 말고. 혀. 혓바닥도 내밀어 봐라.

목소리가 제멋대로 잠겨 나왔다. 거의 쉰 소리에 가까웠다. 그는 더듬거리듯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차가운 제 손끝에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닿자, 찌릿하고 감전된 것 같은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집요하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빨갛네.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괜찮아 보였다. 아주 멀쩡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제 손안에 가두고 볼 수 있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마치 최면이라도 걸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약 발라야겠다. 들어가서.

그의 말은 더 이상 질문이나 확인이 아니었다. 명백한 통보이자, 선언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턱을 감싸 쥐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여린 뺨을 감쌌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로 가볍게 가져다 댔다.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인하듯, 도장을 찍듯, 가볍게 꾹 누르고 떨어졌다. 쪽, 하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역시 뜨겁네. 열나는 거 맞다.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열이 나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나라. 병원 가기 싫으면. 당장 들어가서 약 바른다.

그가 말하는 ‘약’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마 그 자신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녀를 데리고 이 정원에서 벗어나, 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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