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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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바이브는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폭주 직전의 감각 과부하가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환청도, 10년 전 그날의 비명과 빗소리가 뒤섞인 악몽도 아니었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모래와, 그 위로 부서지는 투명한 햇살. 공기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그의 감각을 괴롭히던 소음은 어디에도 없었고, 오직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기분 좋게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는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늘 몸에 붙어 있던 갑갑한 검은 제복이 아니었다. 발목까지 오는 새하얀 바지를 입고, 하늘색 셔츠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편안한 차림이었다.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고,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모래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때, 바람을 타고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꺄르르, 하고 터지는 청량한 소리. 고개를 들자, 저만치 앞에서 파도를 등지고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원피스는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맨발로 파도와 장난을 치며 웃고 있는 여자. 이지희. 브리즈였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꿈속의 그녀는 지치거나 아파 보이지 않았다. 불안에 떨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햇살 그 자체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의 모래가 그의 발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마치 이 길이 맞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바이브는 이끌리듯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가느다란 백금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즈를 몰래 재며, 언젠가 끼워주리라 다짐했던 바로 그 디자인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 반지를 내려다보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예쁘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뭐가 예쁘다는 것인지, 반지인지, 그녀인지, 아니면 이 모든 풍경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서방님 눈에는 다 예뻐 보이나 봐요.

그 목소리에, 바이브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품으로 바싹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숨결. 모든 것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의 힘을 각성한 이후 처음으로, 그는 바람 속에서 완벽한 평온을 느꼈다. 더 이상 자신을 찢어발기는 칼날이 아닌, 사랑하는 여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바다를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하늘에는 하나둘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내일도, 내년도, 그리고 그의 남은 평생 동안, 이 여자와 함께 이 바람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스물셋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온전한 형태의 소원이었다.

새벽의 푸른빛이 창문을 희미하게 물들일 무렵. 제 품에 안긴 작은 온기가 꼼지락거리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미세한 움직임과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소리에, 깊은 꿈의 바다를 헤매던 바이브의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제 팔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이지희의 얼굴이었다. 밤새 그가 입혀준 넉넉한 셔츠는 어깨 한쪽이 흘러내려, 붉은 자국이 남은 하얀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방금 전까지 꾸었던 꿈의 잔상이 현실과 포개졌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백사장, 파도처럼 너울거리던 그녀의 하얀 원피스, 그리고 제 품에 안겨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 꿈속의 모든 감각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는 잠시 지금이 꿈의 연속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제 품 안의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규칙하게 떨리는 긴 속눈썹, 앵두처럼 붉게 부어오른 입술, 곤히 잠든 얼굴에 어린 평온함까지. 꿈속의 그녀와 꼭 닮아있었다.

바이브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 온기, 이 향기, 이 숨결. 전부 현실이었다. 꿈보다 더 꿈같은 현실. 그는 그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 흘러내린 셔츠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밤새 엉망으로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방금 전 꿈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그녀의 머리칼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제 심장이 다시금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 니랑. 꿈속에서 막연하게 떠올랐던 소망이, 이제는 선명한 확신이 되어 그의 가슴에 뿌리내렸다. 이 여자를 지키고, 이 여자를 웃게 하고, 이 여자와 함께 늙어가는 것. 그것이 스물세 해를 살아온 홍지원의 남은 생에 주어진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엄마를 잃게 한 바람의 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힘이 있었기에, 결국 이 여자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는 그녀의 이마에 아주 가볍게, 깃털이 닿듯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가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퇴원하고 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하는 말이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내랑 살자. 평생.

그는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둔 작은 반지 상자를 떠올렸다. 퇴원하는 날, 그녀의 손에 끼워주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온전한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녀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약지 손가락을 제 엄지와 검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여기에 자신의 반지가 채워질 날을 상상하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짧게 입을 맞춘 뒤, 다시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는 이 고요하고 충만한 새벽의 시간을, 제 인생의 가장 완벽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그녀의 리듬에 맞춰, 다시 한번 얕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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