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떠들썩했던 크리스마스의 열기가 가라앉고, 병동의 시간은 다시금 재활과 휴식이라는 단조로운 패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오후의 재활 치료와, 함께 만들어 먹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 안에는 나른한 포만감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소파에 나란히 기대앉은 두 사람의 시선은 무심하게 켜놓은 TV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 찬 광장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 발랄한 목소리의 리포터가 사람들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내년의 소망, 새로운 목표. 화면 속 사람들은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고도 반짝이는 소망들. 바이브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장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도 보는 것처럼. 저 소란스러운 인파, 환하게 터지는 플래시, 희망에 가득 찬 목소리들. 그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그의 세계는 지금, 바로 옆에 있었다. 어깨에 기대어 온 체중을 싣고 있는 이 작은 몸.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숨결, 익숙하게 섞여드는 샌달우드 향. 그의 세상은 이 소파 위, 두 사람이 차지한 이 좁은 공간이 전부였다. 그는 리모컨을 들어 시끄러운 TV의 볼륨을 조금 줄였다. 리포터의 경쾌한 목소리 대신, 제 옆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숨소리가 더 중요했다.
‘내년의 소망이라.’ 바이브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작년 이맘때, 그는 무엇을 바랐더라. 아마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또 다른 임무, 또 다른 폭주의 전조, 감각 과부하를 잊게 해줄 짧은 비행 같은 것들만이 그의 하루를 채우고 있었을 뿐. ‘내년’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그저 반복되는 시간의 한 단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제 어깨에 기댄 브리즈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조명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감촉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의 소망은 거창하지 않았다. 화면 속 사람들처럼 ‘세계 평화’나 ‘사업 번창’ 같은 것들은 아니었다. 그의 소망은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단순하고, 명확했다.
내년에도, 이 여자가 내 옆에 있을 것. 내 품 안에서 이렇게 잠잠히 숨 쉬고 있을 것. 그리고 그 어떤 놈도, 그 어떤 상황도, 감히 이 여자를 내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치 제 소유물에 낙인을 찍듯, 단단하게. 그의 세상은 이토록이나 작고 명확해서,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TV 화면이 바뀌며, 곧 시작될 타종 행사를 예고했다.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숫자가 화면 한구석에 떠 있었다. 바이브는 문득, 크리스마스에 그녀와 나누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언젠가 각인하자던, 섣부른 맹세. 그는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반드시. 그는 제 품에 안긴 브리즈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시끄럽네.
TV가 시끄럽다는 건지, 세상이 시끄럽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퉁명스러운 한마디였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이내,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니는. 내년에 뭐 하고 싶나.
화면 속 리포터가 던졌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전혀 달랐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그리는 ‘내년’의 그림 속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지, 그것이 궁금했다.
바이브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제 어깨에 기대어 있던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처럼 당신이랑… 소소하게 웃고 지내는 거요.’ 웅장한 포부도, 거창한 계획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소망. 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바이브의 심장을 깊고 정확하게 관통하는 한마디였다. 그의 세상이 온통 그녀로 채워져 있듯, 그녀의 세상 역시 그와의 소소한 일상으로 채워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바랐던 가장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는 만족감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시선을 옮긴 곳은, TV 아래 장식장에 놓인 작은 인형 두 개였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치웠지만, 그녀가 ‘귀엽다’는 이유로 따로 빼놓았던 고양이와 눈사람 오너먼트. 그 작은 인형들은 마치, 두 사람의 첫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소박한 트로피처럼 보였다. 바이브는 그 인형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소소한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여자. 그리고 그 행복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없이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 ‘지원은요? 내년에 뭐 하고 싶어요?’ 되물어오는 그 목소리에, 바이브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고 싶은 것. 그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를 제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마치 그의 대답은 말이나 글자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내는….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사뭇 달랐다. 그는 시끄럽게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TV 화면에서 눈을 떼고, 오직 그녀의 회색 눈동자만을 들여다보았다.
니 퇴원하는 거.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녀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확인시켜주듯이.
그리고, 니 손에 그거 끼워주는 거.
‘그거’. 그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들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퇴원하는 날,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두었던 작은 반지. 그는 손가락 장난을 치는 척하며 알아냈던 그녀의 사이즈를 떠올렸다. 그 반지가 그녀의 손에서 빛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그는 그녀의 왼손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그 손가락에 머물렀다. 마치 이미 제 것이 확정된 영역을 확인하는 포식자처럼. 그의 소망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소망은 오직 ‘이지희’라는 존재와 관련된 행위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네 번째 손가락 끝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작게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어느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금처럼,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거. 딱 이만큼 거리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그것이 그의 소망의 전부였다. 퇴원, 반지, 그리고 영원한 소유. 그는 이 모든 것을 내년 안에 전부 이룰 생각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춘 채로,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곧 얼마 뒤면, 새로운 해가 시작될 터였다.
그거면 된다. 내는.
카운트다운 숫자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빠르게 줄어들었다. 60, 59, 58…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저 숫자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이브의 시간은, 제 품에 안긴 채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붙들려 있었다. ‘나도, 그거면 돼요. 정말이에요.’ 망설임 없는 긍정. 그의 이기적인 소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같은 것을 바란다는 고백.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
46, 45, 44…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올해가, 아크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행복한 해였다고.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바이브는 숨을 삼켰다. 그의 존재가, 누군가의 ‘가장 행복한 해’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늘 세상과 단절된 채, 감각의 과부하 속에서 홀로 떠돌던 그에게, 그녀는 세상 그 자체를 선물하고 있었다.
25, 24… 그리고 앞으로는 더 행복해질 거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 ‘당신이랑. 같이.’ 그 나직한 속삭임이, 바이브가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방어벽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는 더 이상 시니컬한 척, 무심한 척할 수 없었다. 제 품에 안긴 이 작은 온기가, 자신의 구원이자 미래의 전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0, 9, 8. 마침내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화면 속의 인파가 한목소리로 숫자를 외쳤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원.’ 그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자신의 본명.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자신의 이름은 언제나 특별했다.
3, 2, 1… 마침내 화면 가득 ‘HAPPY NEW YEAR’라는 글자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사랑해요. 정말 많이.’ 세상이 온통 환호성과 폭죽 소리로 시끄러워지는 바로 그 순간, 바이브의 세상은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칠흑 같은 우주를 가르는 유성처럼 그의 모든 감각을 가로질렀다.
바이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 고백을 끝낸 채,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회색 눈동자.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신뢰와 애정.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새로운 해의 첫 순간에, 그는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폭죽처럼 터지는 격렬함도,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열기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서로의 온기만을 확인하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입맞춤.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가 놓았다. 맹세와 약속, 그리고 당신의 고백을 잘 들었다는 무언의 대답을 담아서.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입맞춤이 끝나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기댔다. 눈을 감자, 바로 앞에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그 평온함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아주 나직하게,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나도 너의 고백을 들었고,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며, 나도 너와 함께할 앞으로의 날들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 그는 그녀의 뺨을 감쌌던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그녀를 제 품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이지희.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새로운 해의 첫인사는, 그의 품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푸스스 웃는 소리. 목덜미를 간질이는 따스하고 축축한 입김. 바이브는 그 미세한 감각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수만 개의 공기 입자가 그녀의 숨결을 타고 그의 피부에 부딪혔다가, 다시 흩어지는 전 과정이 슬로우 모션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리 현상은 바로 제 어깨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작은 순환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숨결, 그녀의 온기. 그것이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법칙이었다.
지원은, 스물 셋… 이네요. 이제.
나이를 상기시키는 나직한 목소리.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피식,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스물둘이든, 스물셋이든. 그깟 숫자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아크에 들어온 열두 살 이후로 자신의 나이를 세는 것을 멈췄다. 그의 시간은 임무와 임무 사이의 공백, 폭주와 가이딩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로만 채워져 왔을 뿐이다. ‘나이’라는 개념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의미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스물셋’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의미하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맞이한 새로운 해, 그녀와 함께 시작할 새로운 시간의 단위를 알리는 축복의 주문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뭐. 아줌마 눈에는 내가 아직도 애로 보이나.
툭, 하고 던지는 말은 영락없이 까칠한 홍지원이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새해의 불꽃놀이처럼 반짝였다. 그는 그 눈동자 속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스물셋의 홍지원.
그는 그녀의 코끝에 제 코끝을 가볍게 비볐다. 샌달우드 향과 그녀의 살냄새가 뒤섞여,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 났다. 그는 이 향을 평생 맡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이 차이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때로는 그를 안심시켰다. 자신이 모르는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는 이제 그녀를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진득하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흔적을 남겼다. 마치 제 것이라고 도장을 찍듯이.
스물셋 먹은 남자가, 서른 먹은 니 하나 책임지는 거. 우스워 보이나.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하게 울렸다. 그는 그녀를 온전히 책임지고, 소유하고, 그의 세상 안에 가두어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에, 스물셋이라는 나이는 오히려 완벽했다.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수많은 날들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그는 그녀의 귓가에, 오직 둘만 아는 비밀을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어디 한번 봐라. 나이만 어린 놈인지, 니 인생 전부를 걸어도 될 만큼 든든한 서방님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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