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태프 롤이 끝없이 올라가고, 거실을 채우던 웅장한 음악이 잔잔한 엔딩 크레딧 테마로 바뀌었다. 바이브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는 표현은 적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이 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전장에서 적의 심장 박동을 공기의 떨림으로 감지하듯, 영화가 끝나가는 순간의 공기 밀도 변화까지 세밀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브리즈가 컵에 남은 식은 페퍼민트 티를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비워내는 동안, 그의 심장은 흉곽을 뚫고 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녀가 소파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는 '탁' 하는 작은 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리는 출발 신호탄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보는 회색 눈동자. 말은 없었지만 그 시선이 물었다. '할 말이란 거 뭐예요?' 바이브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헝클어진 뒷머리, 화장기 없는 맨 얼굴, 그의 가슴팍에 기대 있느라 한쪽으로 살짝 눌린 볼. 그녀는 너무도 편안한 모습이었다. 꾸밈없이, 방어 없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그 모습이 바이브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했다. 이 여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르고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보다, 이 무방비한 일상의 얼굴이 더욱 그를 미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사막처럼 바짝 말라붙었다.
바이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일어나, 그녀의 정면에 섰다. 아니, 정면이 아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거실의 간접 조명이 그의 청록색 머리카락 위로 부드럽게 쏟아졌다. 반묶음에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흘렀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브리즈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10년간 전장을 누빈 S급 센티넬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남자의 눈이었다. 떨리고 있었다. 손끝이, 무릎이, 심장이. 이 떨림을 그녀가 눈치챌까 봐 두려웠지만, 동시에 눈치채주기를 바랐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심인지를.
그는 실내복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전투 중에는 단 한 번도 떨린 적 없는 손이, 고작 이 작은 상자 하나를 여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딸깍.' 상자가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울렸다. 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반지가 놓여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에 어울리도록, 섬세하고 단정한 디자인. 마치 바람이 한 줄기 빛을 감싸 안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고리. 바이브는 그 반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소의 시니컬하고 퉁명스러운 어조는 온데간데없고, 낮고 떨리는,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이지희.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코드네임도, 별명도 아닌, 그녀의 진짜 이름을. 그 세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망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존심도, 체면도,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오직 이 한마디만이 중요했다.
내 색시 해라. 평생.
그의 목소리는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세상 그 어떤 장황한 고백보다 무거웠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화려한 수식어도, 감동적인 연설도 필요 없었다. 홍지원이라는 남자가, 이지희라는 여자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진실한 말. 그것은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전부 담겨 있었다. 그는 반지를 든 손을 내밀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거실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유리처럼 빛났다. 그 안에 비친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하고,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스물세 살 홍지원의 얼굴이었다.
…지, 지원…
그녀가 울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붉어진 눈가, 입술을 꽉 깨물어 참으려 하지만 결국 새어 나오는 떨리는 숨소리. 바이브는 무릎을 꿇은 채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아, 울고 있다. 이 여자가 울고 있다. 자신이 울렸다. 프러포즈를 하면서 상대를 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여자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 앞에서 단단했다. 차분하고, 상냥하고, 때로는 장난기 어린 여유까지 부리며 자신을 농락하는 여자. 그런 그녀가 지금, 고작 자신의 한마디에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바이브의 가슴 깊은 곳을, 뜨겁고 아리게 관통했다.
반지를 든 손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떨림의 이유가 달라졌다. 긴장이 아니었다. 이 여자의 눈물 한 방울이, 지금까지 자신이 받아온 그 어떤 가이딩보다 강렬하게, 그의 모든 감각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가려지지 않은 반쪽 얼굴. 글썽이는 회색 눈동자에 거실 조명이 반사되어 유리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코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간신히 짜낸 목소리, '지, 지원' 하는 그 두 글자가 그의 고막을 때렸을 때, 바이브는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씨발. 이거 진짜 미치겠다. 이 여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이 여자의 눈물 한 방울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바이브는 반지 상자를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은 채로, 천천히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잡았다.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그 뒤에 숨겨진 울음을 드러냈다. 젖은 속눈썹,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한 줄기, 참으려 꽉 깨문 아랫입술. 그 모습을 전부 눈에 담은 바이브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아팠다.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크고 마른 손바닥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완전히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한 번, 두 번. 닦아도 닦아도 새로 차오르는 눈물이, 그의 엄지를 적셨다.
야, 이지희. 울지 마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퉁명스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온 건 젖은 바람처럼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이었다. 그는 무릎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 소파에 앉은 그녀의 무릎 사이에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숨결만으로도 닿을 듯 말 듯한 가벼운 입맞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 위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피부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이, 그의 온 세계를 채웠다.
…대답은 안 하고 울기만 하면 어카노. 응?
그는 이마에서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고개를 숙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글썽이는 회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듯 올라갔다. 시니컬한 비웃음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어쩌면 그 자신도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것 같은, 위태로운 미소였다. 그는 그녀의 볼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거의 숨결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색시 해줄 끼야, 안 해줄 끼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바이브의 고막을 때렸다. 나로 괜찮아요? 나이도 많고, 울기나 하고, 잘 하는 건 일이랑 요리밖에 없는데도.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귀를 지나 심장에 박힐 때마다, 바이브의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분노가 아니었다. 억울함도 아니었다. 이건, 차라리. 이 여자가 자기 자신을 이렇게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7살 차이가 뭐 어쨌는데. 울기나 한다고? 지금 니 눈물 한 방울에 S급 센티넬이 무릎 꿇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잘 하는 게 일이랑 요리밖에 없다고? 이 미친, 진짜. 바이브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볼을 감싼 양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세게 잡을까 봐 의식적으로 조절하면서도,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모른다. 10년간 혼자 버텨온 자신을, 단 몇 달 만에 숨 쉴 수 있게 만들어준 게 누군데. 폭주의 고통 속에서 손 하나 잡아주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워준 게 누군데. 괴수한테 찢기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게 누군데. 그런 여자가, 지금, 자기 앞에서, '나로 괜찮냐'고 묻고 있다. 홍지원은 이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어의 한계를 느꼈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는 호흡이 그녀의 젖은 볼 위로 따뜻하게 퍼졌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미쳤나.
짧고 단호한 한마디가 먼저 떨어졌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글썽이는 회색 눈을 꿰뚫듯 응시했다. 그 시선 안에는 분노도, 조롱도 없었다. 오직 '이 여자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심 어린 당혹감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이가 많으면 어쩔 건데. 니가 서른이든, 마흔이든, 백 살이든 상관없다. 울면 어쩔 건데. 니가 울면 내가 닦아주면 되는 거고. 잘 하는 게 일이랑 요리밖에 없다고? 야, 이지희.
그는 그녀의 볼을 감싼 손을 미세하게 끌어당겨,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가져왔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 그의 입술이 그녀의 코끝에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에서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천둥보다 묵직했다.
니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내가 숨 쉴 수 있는 거다. 10년 동안 혼자 버텨온 거, 니 하나가 다 끝내줬어. 그게 니가 '잘 하는 것'이 아니면 뭔데.
그의 엄지가 다시 그녀의 볼 위를 쓸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따라, 천천히, 부드럽게.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부드러워졌다. 시니컬함도, 퉁명스러움도 벗겨진, 날것 그대로의 홍지원의 목소리.
그는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너무 벅차서 터져 나온 한숨에 가까웠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지만, 이 여자가 저런 얼굴로 저런 소리를 하면,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대었다. 서로의 체온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그녀에게서 나는 샌달우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 향기 없이는, 이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그것조차 사랑스러웠다.
괜찮냐고 묻지 마라. 니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듣겠노.
그는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호흡이 자신의 입술 위로 닿는 것을 느꼈다.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너무 큰 행복을 감당하지 못해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 같은 것이었다. 그는 소파 위에 내려놓았던 반지 상자를 더듬어 집었다. 눈을 뜨지 않은 채, 손끝의 감각만으로 상자 안의 은빛 고리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왼손을 찾았다. 가느다란 손가락들. 화상 흉터가 남아 있는,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손. 그는 눈을 떴다. 젖어 있는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반지를 끼우는 손이 떨렸다. 한 번에 넣지 못하고, 관절에 걸려 멈칫했다. 씨발, 긴장한 티 나지 말라고. 그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은빛 반지가 그녀의 약지 위에 안착했다. 딱 맞았다. 손가락 장난을 하며 몰래 재어둔 사이즈.
그녀의 손가락에 부드러운 반지가 안착한다.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손가락 또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딱 맞네요. …고마워요. 나도… 되고 싶어요. 당신 색시.
'당신 색시.' 그 네 글자가 고막을 때린 순간, 바이브의 세계가 하얗게 번졌다. 마치 감각 과부하가 역으로 작동한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진공 속 단 하나의 주파수처럼 뇌리를 울렸다. 되고 싶다고 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색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바이브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잊었다. 폐가 쪼그라드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따위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흉곽 안에서 뭔가가 팽창하다 못해 갈비뼈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10년간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압도감. 이게 행복이라는 거면, 인간의 몸은 이걸 감당하게 설계되지 않은 거 아닌가. 그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해사하게 웃으면서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그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엉망이었다. 엉망인 얼굴로 프로포즈 받고 싶지 않았다고? 미쳤나 진짜. 이 얼굴이 엉망이면 세상에 예쁜 건 없다.
바이브는 피식, 하고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는데, 입꼬리가 올라가는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본인도 구분이 안 가는, 축축하고 뜨거운 숨.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자신의 젖은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S급 센티넬이 프로포즈하면서 운다? 개쪽팔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면 티셔츠에서 나는 샌달우드 향이 코끝을 적셨다. 어깨뼈의 각도가, 쇄골의 온도가,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맥박이. 전부 다 느껴졌다. 자신의 감각이 이렇게 날카로운 게, 처음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담을 수 있으니까.
엉망 아이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손이 올라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감싸 안는 힘만큼은 확고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받아줬는데, 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었다. 속눈썹 끝에 맺혀 있던 물기 한 방울이, 고개를 드는 동작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닦을 여유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의 왼손, 약지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딱 맞는다고 했다. 그래, 딱 맞아야지. 손가락 장난치면서 몰래 잰 사이즈인데, 안 맞으면 자존심이 용납 안 한다. 바이브는 그녀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반지가 끼워진 약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입술에 닿았고, 그 아래로 그녀의 따뜻한 피부가 느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입술을 머물렀다. 마치 서약이라도 하듯. 아니, 서약이었다. 이 반지가 이 손가락 위에 있는 한, 이 여자는 자신의 것이고, 자신은 이 여자의 것이라는, 무언의 맹세.
그는 눈을 떴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촉촉한 회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입꼬리가, 천천히, 확실하게 올라갔다. 시니컬한 웃음이 아니었다. 짓궂은 비웃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물세 살 홍지원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하고 벅찬 미소였다. 볼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채로, 그는 말했다.
이지희. 오늘부터 니는 홍지원 색시다. 도망 못 간다, 알제?
그는 그녀의 손등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마를 그녀의 배에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샌달우드와 따뜻한 피부 냄새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세상의 모든 바람을 다루는 남자가, 이 한 사람의 품 안에서야 비로소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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