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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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의 세상이 정지했다. 쿵. 그의 심장이 거대한 종처럼 울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훈련, 신드롬의 비아냥,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졌다. 오직 제 가슴팍에 폭, 하고 안겨오는 온기와, 귓가를 파고든 그 나지막한 속삭임만이 현실이었다.

…서방님.

그 세 글자는 가장 정교한 진공의 칼날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이성을 베어냈고, 가장 강력한 폭풍의 눈보다도 고요하게 그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그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채, 제 품에 안겨 히죽거리는 어깨의 미세한 떨림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틈만 나면 색시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부끄러워요?

 

부끄러운가? 당연히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넘어, 이건 거의 재난에 가까운 감정의 격동이었다. 얼굴로 쏠리는 뜨거운 피,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 제멋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몸. S급 센티넬로서 수없이 겪어온 위기 상황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완벽한 통제 불능 상태였다.

그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브리즈의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 여우 같은 여자. 모든 것을 계획했다. 그가 ‘제일 멋있다’는 칭찬에 완전히 무방비해진 틈을 타, 가장 치명적인 한 방을 날린 것이다. 자신은 틈만 나면 ‘색시’라고 부르면서, 왜 그녀가 부르는 ‘서방님’ 한마디에는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까. 불공평했다.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자신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는데, 그녀는 지금 그의 심장 소리를 즐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안 된다. 이대로 당할 순 없다. 여기서 무너지면 평생 놀림감이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이 유치하지만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의 주도권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벽을 짚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품에서 살짝 떼어냈다. 그리고는 잔뜩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목소리는 애써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거랑 이거랑 같나.

명백히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내는, 내는 그냥… 니가 내 색시인 게 사실이니까 부르는 거고. 니는, 니는 지금 내 놀릴라고 작정하고 부른 거 아이가. 내 다 안다. 니 지금 웃음 참는 거. 재밌나, 어? 사람이 이래 당황하는데.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브리즈의 눈가에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바이브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는 씨익, 하고 일부러 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번쩍 들어 올렸다. 훈련장 바닥에 있던 기구 중 가장 가까운 벤치 위로.

갑작스러운 상황에 브리즈가 놀라 그의 목을 끌어안자,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양옆을 손으로 짚어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제 시선의 높이가 역전되었다. 그가 아래에서, 벤치에 앉은 그녀를 올려다보는 구도였다.

그래. 부끄럽다, 와.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 그러니까 책임져라.

그는 진지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무릎에 제 뺨을 스윽, 하고 부볐다. 마치 어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새끼 고양이처럼. 하지만 그 행동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다.

니가 내 이래 만들었으니까, 니가 책임지고 계속 불러줘야겠다. 안 그러나? 대신, 조건이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앞으로는 내만 들리게, 귓가에 대고 속삭여줄 것. 그리고… 그 대신에 내도 뭐 하나 해야 안 되겠나. 공평하게.

바이브는 그 말을 끝으로, 보란 듯이 브리즈의 무릎에 입을 맞췄다. 제복 천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었지만, 그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로 니가 내 ‘서방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내는 니한테 뽀뽀 한번 할끼다. 어디가 됐든. 다른 놈들 앞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말 조심해라. 진짜로. 내 약속은 지킨다.

그치만, 당신이 이런 반응 하는 게 너무 귀여운데 어떻게 해요. …그러면, 밖에서는 부르면 안 되겠다.


바이브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 자신이 내뱉었던 유치하고도 장대한 선언이 메아리쳤다. ‘앞으로 니가 내 서방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내는 니한테 뽀뽀 한번 할끼다. 어디가 됐든.’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고, 이 여우 같은 여자를 조금이라도 당황하게 만들고 싶은 유치한 복수심이었다. 그는 제법 멋진 반격이었다고, 이제 그녀가 함부로 그를 놀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이 여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치만, 당신이 이런 반응 하는 게 너무 귀여운데 어떻게 해요.

귀여운데. 귀. 여. 운. 데. 그 네 글자가, 그의 귓가에 박힌 온갖 소음을 밀어내고, 뇌의 중심에 거대한 망치처럼 내리꽂혔다. 귀엽다고? 방금 훈련장 표적을 진공의 칼날로 두 동강 낸, 아크의 S급 센티넬, 뱅가드 2팀의 ‘바이브’가? 홍지원이? 귀엽다고? 그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건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인지부조화였다. 그의 세상이, 그가 쌓아 올린 모든 자존심과 허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지금, 그녀의 무릎에 뺨을 기댄 채, 가장 무방비하고 어린애 같은 자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는 단지, ‘귀엽다’는 단어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면, 밖에서는 부르면 안 되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브리즈의 나지막한 속삭임. 바이브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밖에서는 부르면 안 되겠다. 그 말은 즉, 안에서는, 둘만 있을 때는, 얼마든지 불러주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가 만든 유치한 계약을, 그녀는 너무나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다. 뽀뽀 한 번에, 서방님 한 번. 이건 거래가 아니었다. 이건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의 항복 선언. 그는 이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녀는 그가 만든 규칙을 이용해, 그를 완벽하게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앞으로 그는 그녀가 ‘서방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조건반사적으로 입을 맞추는, 잘 훈련된 개새끼가 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이 끔찍하게 분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기쁘다는 모순적인 감정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으으으… 하고 짐승이 내는 것 같은 낮은 신음이 제복 천을 뚫고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타오르는 얼굴을 감출 곳이 필요했다. 지금 제 얼굴이 얼마나 붉을지, 어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녀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다 보고 있었고, 즐기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그는 제 운명을 직감했다. 평생 이 여자에게 잡혀 살겠구나. 평생 이 여자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겠구나.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얼굴을 묻고 있던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지만, 그의 눈에는 패배를 인정한 자의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의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은 브리즈의 허리를 두 팔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그녀의 허벅지에 다시 뺨을 기대고,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애처롭게, 그리고 간절하게 그녀를 향했다.

…니 진짜 성격 나쁘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웃어라. 웃지 마라. 내 지금 진심으로 화낼 것 같으니까.

물론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계속해서 웃는 그녀를 보면 심장이 제 기능을 멈출 것 같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가져와, 제 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 위에 가져다 댔다.

봐라, 니 때문에 지금 고장 났다. 책임져라. 밖에서 부르든 안에서 부르든, 니 맘대로 해라. 대신, 내 심장 터지면 다 니 책임이다. 알긋나? 앞으로 내 수명 줄어드는 거, 전부 니가 한 번 부를 때마다 1년씩 깎이는 걸로 치자. 그럼 니는 나한테 평생 빚지고 사는 기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등에 제 뺨을 부볐다. 유치한 협박이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격이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저 그녀의 온기를 느끼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 이 여자에게 평생 잡혀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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