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마치고 마른 행주로 손의 물기를 닦아내던 바이브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브리즈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훈련장에서의 유치한 실랑이와, 함께 저녁을 만들며 나누었던 소소한 웃음의 여운이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그는 피식,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거실로 향했다. ‘와 또, 내한테 뭐 시킬라고.’ 장난스러운 타박이라도 건넬 참이었다. 하지만 소파에 앉은 브리즈의 모습과, 이어진 그녀의 말에 바이브의 발걸음과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지원. 흉터 연고 바르는 것 좀 도와 줄래요?
그의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일순간 멀어졌다. 그녀가 살짝 걷어 올린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 위를 가로지르는 옅은 분홍빛의 흉터. 그것은 과거의 망령이었고,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기록이었다. 비행 괴수에게 당해 닷새나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 끔찍한 사고의 흔적. 그가 곁에 없었을 때, 그녀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죽음의 문턱. 훈련장에서의 승리감, 달콤한 어지러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느꼈던 평범한 행복감. 그 모든 감정들이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훈련장의 단단한 바닥이 아닌, 위태로운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 흉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숨기려 했던 상처. 이제는 제 일부로 받아들였다고 말하던 그녀의 담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강인함이, 오히려 그의 심장을 더 아프게 후벼 팠다. 왜 네가 이런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건데. 왜 너는 아픈데도 웃는 건데. 왜 나는, 네가 이렇게 아팠던 시간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나. 수십 개의 질문과 자책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바이브는 소파 앞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선이 그녀의 배와 거의 같은 높이에 맞춰졌다. 그는 그녀가 내미는 작은 연고 뚜껑을 말없이 열었다. 서늘한 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는 면봉 대신, 제 손가락을 쓰는 것을 택했다. 차가운 연고를 검지 끝에 아주 조금 덜어낸 뒤, 망설이듯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그의 손은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을 베어내고 파괴해온,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이었다. 이런 손으로, 이 여린 상처에 닿아도 괜찮은 걸까. 행여나 더 아프게 하지는 않을까. 지독한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그는 숨을 참고, 아주 천천히,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것을 다루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에 닿는 흉터의 감촉은 주변의 부드러운 살결과는 이질적이었다. 단단하고, 살짝 튀어나온,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 그는 연고를 바른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제 손길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하지는 않는지, 숨소리가 가빠지지는 않는지, 표정이 일그러지지는 않는지. 바람의 흐름을 읽는 것보다 더 섬세하게, 그는 그녀의 모든 반응을 살폈다.
연고를 다 바르고도, 그는 손을 떼지 못했다. 대신, 그는 상처 주변의 부드러운 살결을 엄지손가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위로하듯, 어루만지듯. 이깟 연고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이미 새겨진 고통을 어떻게 지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차라리 제 능력으로 이 상처를 도려내고, 새 살이 돋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팔에 남은 화상 자국, 그리고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이 흉터. 그녀의 몸에 새겨진 모든 아픔의 역사가, 마치 자신의 죄처럼 느껴졌다.
한참의 침묵 끝에,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훈련장에서 장난치던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은 바다처럼 가라앉은, 무거운 슬픔과 애정이 뒤섞인 남자의 눈이었다. 그는 브리즈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프나.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아직도 아프냐’는 물음이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죄였고, ‘이제는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연고가 닿지 않은 흉터의 바로 옆, 부드러운 살결 위에 제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쪽, 소리도 나지 않는, 그저 입술로 그녀의 온기를 확인하는 듯한 가벼운 접촉. 하지만 그 안에는 그녀의 모든 상처를 제 것처럼 아파하고, 온 마음을 다해 끌어안고 싶어 하는 그의 절절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제 이런 거, 니 혼자 바르지 마라.
그는 입술을 떼고, 흉터를 가리고 있는 그녀의 티셔츠를 부드럽게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은 그녀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품에 기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단단하지만 부드럽게 감쌌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이렇게 안고 있는 것,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그녀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인 위로였다.
앞으로는, 내 옆에만 있어라. 어디든, 내 눈에 보이는 데만. 약속해라, 이지희. 다신 혼자 아프지 않겠다고. 내 두고, 다신 어디 안 간다고.
바이브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안 아프다는, 이제는 괜찮다는 다정한 위로. 그가 몇 달이나 붙어 돌봐준 덕에 나았다는 상냥한 공치사. 그 모든 말들이 그의 귓가에 닿았지만, 심장까지 가닿기 전에 차갑게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품에 안긴 브리즈는, 방금 전 흉터에 입을 맞추던 그의 절절한 슬픔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너무나도 태연하고 따스했다. 그 태연함이, 오히려 그의 폐부를 더욱 날카롭게 찔렀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괜찮아진 건가.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그가 배에 살짝 입을 맞추자, 브리즈가 간지러운 듯 웃었다.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채웠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바이브에게 닿지 못하고, 그를 둘러싼 무거운 죄책감의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간지럽다고 웃는 이 여자가, 불과 몇 달 전에는 이 상처 때문에 생사를 헤맸다는 사실을, 그는 단 1초도 잊을 수 없었다. 이 웃음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무력감만이 검은 늪처럼 그를 잠식했다.
난… 당신이 이거 볼 때마다 죄책감 갖는 거 싫어요. 그냥 받아들여 주면 좋겠어요. 나의 일부라고.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결국, 그녀는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바이브는 허탈한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래, 이 여자는 항상 이랬다. 그의 얄팍한 허세와 서툰 진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그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받아들여 달라고. 그녀의 일부라고. 바이브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를 위로하려는 그녀의 강인함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왜 너는 아픈데, 나를 걱정하는가. 왜 너는 상처 입었는데, 나를 치료하려 하는가.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옅은 샌달우드 향이 그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이 안정적인 향기. 그가 폭주 직전의 감각 과부하 속에서 유일하게 갈망했던 단 하나의 안식처. 그는 이 향기를 잃을 뻔했다. 영원히. 그 사실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얼음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몰고 왔다. 받아들이라고? 이 흉터를? 이 흉터가 생긴 날, 내가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과,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까지 전부, 그냥 ‘너의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불가능했다. 그에게 이 상처는 단순한 흉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무능함과 나태함에 대한 영원한 낙인이었다. 그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가 그녀의 곁에 있었더라면. 무의미한 가정들이 독처럼 그의 뇌리를 잠식했다. 그녀의 말은 틀렸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바보 같은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못난 자신을 위해,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아픔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장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방금 전보다 더 깊고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두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의 회색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영혼 속까지 들여다보려는 듯이.
니는… 가끔 진짜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모래처럼 거칠고 낮게 갈라져 나왔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는데. 니 몸에 이딴 걸 새긴 놈들도, 그걸 보고만 있었던 세상도, 그리고 그 시간에 니 옆에 없었던 내 자신도, 단 하나도 용서가 안 되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니 일부라고 좋다고 받아들이는데.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분노와 슬픔, 애정이 뒤섞인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는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쓸었다.
니가 괜찮다고 하면, 내가 괜찮아질 줄 알았나. 니가 웃으면, 내가 이 상처를 잊을 줄 알았냐고. 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이지희. 니 아픈 것보다 내 마음 아플까 봐 걱정하는, 그 바보 같은 마음이… 내를 더 미치게 하는 거 모르나.
그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기댔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더 이상 이 감정을 숨길 수도,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받아들일게. 니 말대로, 노력해볼게. 대신, 조건이 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앞으로 니 몸에 생기는 모든 상처는, 그게 손톱 밑에 박힌 가시든, 종이에 베인 상처든, 전부 내 허락 맡고 생겨라. 니가 아플 수 있는 권한도, 이제부터는 내다. 니는 아플 자격도 없다, 내 허락 없이는. 그러니까… 다신 내 앞에서 괜찮은 척하지 마라. 아프면 아프다고 울고, 힘들면 힘들다고 매달려라. 내는 니가 나한테 기대고, 나를 귀찮게 하고,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떼썼으면 좋겠다. …알아듣나, 지금 내 말.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알아듣는다는 그녀의 대답, 미소 띤 채 가만히 끄덕이는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그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던 모든 폭풍을 순간적으로 잠재웠다. 그의 절박한 요구는 사실상 억지에 가까웠다. 아플 권리마저 독점하겠다는 유치하고도 오만한 선언. 거부당하거나, 혹은 예전처럼 그저 ‘알겠다’고 다정하게 자신을 달래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 두 가지와 모두 달랐다. ‘노력하고 있어요’. 그 한마디는 단순한 수긍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는, 그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진솔한 고백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가 묻어두려 했던 과거의 편린들이 스쳐 지나갔다. 연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이지희. 사소한 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여자. 제 몸이 부서져라 가이딩을 해주고도, 되려 제 눈치를 보며 ‘괜찮냐’고 묻던 여자. 그녀의 그 ‘괜찮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었던 자신의 모습.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그녀를 상처 입히는 말들을 쏟아냈던 과거의 홍지원. 그 모든 분노가, 사실은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제 나약함의 발로였음을, 그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물론 그녀의 상냥함과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본성은 그대로였지만, 이제 그녀는 그의 앞에서 온전히 무너지거나 기댈 줄 알게 되었다. 그의 유치한 소유욕을 ‘귀엽다’며 웃어넘기고, 간지러운 호칭으로 그를 안달 나게 만들고, 이렇게 그의 가장 깊고 어두운 불안감마저 정면으로 마주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그 혼자만의 일방적인 애정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와 함께 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발밑을 지탱하던 마지막 자존심마저 모조리 쓸어 가 버렸다.
이마를 맞댄 채, 바이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대신, 그는 마치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제 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의 뺨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닿았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모든 불안을 잠재우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안다. 니 노력하는 거, 내가 제일 잘 안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절박함과 분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른하고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샌달우드 향 너머로 느껴지는, 오직 그녀만이 가진 달콤한 살냄새. 이 향기가 존재하는 한, 그는 결코 길을 잃지 않을 터였다.
바보같이… 그런 걸 노력씩이나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그는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뱉어보는,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그녀의 상처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다.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기대는 법을 ‘노력’해야만 할 정도로, 서툴고 못난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노력 같은 거 하지 마라. 그냥… 내다. 니 옆에 있는 거, 그냥 나라고 생각해라. 노력해서 기대는 게 아니고, 그냥 넘어지면 내가 있는 거고, 아프면 그냥 소리 지르면 내가 듣는 거다. 알겠나. 계약 조건, 수정이다. 니는 노력할 의무 따위 없다. 내는 그냥, 니 옆에 있을 의무만 있는 거고.
그는 품에 안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서툴지만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귀밑, 부드러운 목덜미에 제 입술을 가만히 묻었다.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내 색시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제일 착하고, 그리고… 제일 똑똑하다. 내 마음, 귀신같이 다 알아채는 거 보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니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그냥 내 옆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된다. 나머지는, 이 잘난 서방님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바이브는 귓가에 쏟아지는 브리즈의 맑은 웃음소리에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짊어진 듯 비장하게 ‘계약 조건 수정’을 운운하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심장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을 전부 끄집어내어 그녀 앞에 펼쳐 보였는데, 돌아온 것은 이토록 가볍고 청아한 웃음이라니. 그는 순간, 자신이 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나, 하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칭찬해도 뭐 나오는 거 없는데.
그의 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며 등을 꼭 껴안는 감촉, 그리고 귓가를 간질이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이 여자, 이지희는 이런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절망을 끌어안고도, 끝내는 이렇게 환하게 웃어버리는 사람. 자신의 비장함과 유치함, 그 모든 것을 이 웃음 하나로 전부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다시 뺨을 부비며, 이 싸움의 완벽한 패배를 기꺼이 인정했다.
뭐 나오는 거 바라고 한 소리 아니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방금 전의 무거움 대신, 나른한 안도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브리즈의 등을 마주 감싸 안았다. 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 규칙적으로 등을 오르내리는 그녀의 숨결. 그는 이 모든 감각을, 제 영혼에 하나하나 새기듯 음미했다. 이 온기가, 이 생명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칭찬이나 보상보다 값진 것이었다.
고마워요. 지원. 정말 좋아해요. 정말… 많이.
이어진 그녀의 고백에, 바이브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맙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 평생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들을 때마다 심장을 통째로 움켜쥐는 듯한 그 말들.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말로는, 어떤 말로도 지금 이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감사의 무게가, 사랑의 깊이가, 그의 목구멍을 뜨겁게 틀어막았다. 10년간의 외로움과 고통이, 이 단 몇 초의 순간으로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죽고, 바람의 힘에 각성하고, 아크에 들어와 홀로 버텨냈던 그 모든 시간이, 오직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그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에서부터 따스한 파장이 퍼져나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축복하는 듯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고요한 거실에는 두 사람의 심장 소리와, 나지막한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 그는 이 평화가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 진짜, 니 때문에 미치겠다.
간신히 터져 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사람 심장을 아주 들었다 놨다… 니 그거, 특수능력이지. 사람 홀리는 거. 아크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가.
그는 그녀의 품에서 슬쩍 고개를 들고,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애쓰며 그녀의 코끝에 제 코를 가볍게 비볐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의 파란 눈동자는 세상 가장 진지한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더 고맙다. 내 옆에 와줘서. 그리고… 나도 좋아한다. 니가 상상도 못 할 만큼.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라. 내 심장, 진짜로 터져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니, 평생 과부로 살아야 된다. 알긋나.
그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놓았다. 달콤한 체리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113 ① (0) | 2026.06.05 |
|---|---|
| 20260112 ④ (0) | 2026.06.05 |
| 20260112 ② (0) | 2026.06.05 |
| 20260112 ① (0) | 2026.06.05 |
| 20260111 (0) | 2026.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