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해서,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완벽한 꿈. 바이브는 그 꿈속에서, 부산의 햇살 좋은 어느 집 마당에 서 있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섞인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늘 그를 괴롭히던 감각 과부하의 칼날 같은 바람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길처럼, 브리즈의 속삭임처럼 다정한, 그런 바람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낡은 나무 데크에 걸터앉아,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완전한 안식. 그를 옥죄던 죄책감도 자기혐오도 불안도 모두 사라진 텅 빈 충만함이었다.
그때였다. 삐걱이는 문소리와 함께 하얀 원피스를 입은 브리즈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품은 달처럼 완만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햇살을 등지고 서서, 그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 하나에 바이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미소가, 그녀의 존재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브리즈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뻗은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에게서는 늘 나던 샌달우드 향에, 달콤한 분내가 섞인 낯설고도 포근한 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볼록한 배를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이롭다는 듯. 그의 시선을 느낀 브리즈가 작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자신의 배 위로 가져갔다.
움직이네요, 지원 씨. 당신 목소리를 들었나 봐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작고도 강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툭. 마치 안에서 누군가 ‘아빠,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노크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감각이 그의 손바닥에 모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이것은 그의 능력으로 느끼는 바람의 흐름이나 공기의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경이 그 자체였다. 그의 아이. 그와 그녀의 아이가, 지금 그의 손길 아래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 고개를 들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심장 소리, 그리고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또 하나의 작은 심장 소리. 그는 이 모든 것을 제 안에 새기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평생을 찾아 헤맸던 안식처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의 가족. 그가 지켜야 할 그의 전부.
사랑해… 이지희…
그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그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은 이내 부드러운 아침 햇살로 바뀌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그의 감은 눈꺼풀 위에서 따스하게 부서졌다. 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낯설지 않은 천장.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 그리고, 코끝을 간질이는 익숙하고도 달콤한 향기. 그는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제 손안에 느껴졌던 작은 태동과,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을 때의 그 충만한 행복감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텅 비어있을 리 없는, 그의 온기가 있어야 할 곳.
그때, 그의 뺨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아침 이슬처럼 내려앉았다.
잘 잤어요, 지원 씨? 좋은 꿈 꿨나 봐요. 웃고 있었어요.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브리즈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막 잠에서 깬 듯 살짝 부스스한 머리카락, 화장기 없는 민낯, 그리고 그를 향해 더없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그 얼굴.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바이브는 순간 숨을 멈췄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그의 눈에는 오직 이지희, 그녀 한 사람만이 존재했다. 꿈속의 그녀는 아이를 품고 있었지만, 지금 눈앞의 그녀는 오직 그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배 위로 가져갔다. 물론, 그곳은 꿈에서와 달리 부드럽고 평평했다.
그의 돌발 행동에 그녀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배를 가만히 쓸어보다가, 이내 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제 품에 와락 안았다. 그리고는 꿈에서처럼, 그녀의 배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그녀의 온기가,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잠에 잠겨 쉬어버린 목소리로, 아이처럼 칭얼거리듯 중얼거렸다.
…가지 마라. 어디 가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라. 내 옆에.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현실이었다. 그가 목숨 걸고 지켜낸, 그리고 앞으로 평생 지켜나갈, 눈부시게 찬란한 그의 현실.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가 제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단 한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바이브는 브리즈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체온,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안도감에, 그는 마치 탯줄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는 태아처럼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잠결에 뱉어낸 아이 같은 칭얼거림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원초적인 불안과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이 여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싶다는 지독한 욕망. 그 두 가지 감정이, 그의 잠든 이성을 비집고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의 정수리 위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는, 그의 불안을 부드럽게 꾸짖는 다정한 음성이었다. ‘안 간다니까. 또 그러네.’ 그 말에, 바이브는 잠시 굳어있던 몸의 긴장을 아주 조금 풀었다. 그래, 이 여자는 가지 않는다. 절대로. 어젯밤에도, 그 이전에도, 몇 번이고 확인하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집착을 자책하면서도, 그녀의 온기가 주는 절대적인 안정감에 취해 쉽사리 몸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이 유치하고 지독한 소유욕마저도.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 바이브는 숨을 헙, 하고 멈췄다. ‘무슨 좋은 꿈을 꿨어요? 내 꿈?’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 질문은 그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네 꿈을 꾼 것을, 어떻게.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꿈의 모든 내용이 제 얼굴에 전부 쓰여 있을 것만 같았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햇살 아래에서 웃던 모습.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품은 채,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그리고 그의 손바닥을 두드리던, 작고도 경이로운 생명의 움직임까지. 그 모든 것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바이브는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건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장 깊고 은밀한 욕망을, 너무나도 생생한 형태로 목격하고 만 것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결혼, 그리고 아이. 가족. 그가 지난 10년간 애써 외면하고,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단어들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그는 그 모든 것을 꿈속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치도록, 행복했다. 그 행복감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현실로 돌아온 지금, 참을 수 없는 상실감과 동시에 강렬한 갈망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자, 브리즈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잔인하게 들렸다. 마치 ‘다 알고 있으니 그만 실토하시지’ 하고 놀리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 붉어진 눈가,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흔들리는 눈동자. 그의 모든 표정이,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볼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뒤이어 민망할 정도로 크게 울리는 ‘쪽’ 소리. 바이브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마치 비밀스러운 현장을 들킨 범인처럼, 심장이 바닥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남기고 간 축축하고 따스한 감각이, 그의 온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터질 것처럼 뜨거웠던 얼굴이, 이제는 정말 활화산처럼 폭발해버릴 지경이었다. 뇌 회로가 완전히 타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그녀가, 방금 자신의 볼에 입을 맞췄다는 사실만이,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를 더 깊은 혼란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알았어요. 안 물을 테니까, 슬슬 일어나요.’ 그 말은 분명 배려였고, 이 민망한 상황을 끝내주려는 다정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바이브에게는, ‘네가 꾼 그 엄청난 꿈 따위는 별거 아니니,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와라’ 하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아니, 별거 아니지 않다. 이건 별거다. 당신과 내가, 우리가… 바이브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단어들을 속으로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모른다. 자신이 꾼 꿈이, 그저 함께 하늘을 날거나, 시시덕거리며 데이트하는 수준의 평범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그의 우주가 통째로 뒤흔들린, 하나의 거대한 계시였단 말이다.
‘아침은 뭐가 좋아요?’ 결정타였다. 아침. 식사. 지금 이 상황에, 아침 식사라니. 바이브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한쪽에서는 세상의 종말과 시작을 동시에 목격한 것처럼 정신이 없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오늘의 메뉴를 묻고 있다. 이 엄청난 온도 차이. 그는 이 여자가 가끔 정말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이토록 평온할 수 있는 건지.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점 때문에 미치도록 좋았다. 그의 지옥 같은 감각 과부하와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잠재워버리는 유일한 존재. 그녀의 평온함은, 그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는 결국 체념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버텨봤자,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목을 감고 있던 팔을 스르르 풀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꿈의 잔상이, 그 달콤하고도 아찔했던 행복감이, 마치 강력한 중력처럼 그의 몸을 침대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일어나 버리면, 그 모든 것이 정말로 한낱 꿈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행복을, 단 1초라도 더 붙잡고 싶었다.
싫다. 안 일어난다.
결국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지극히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다시 그녀의 품으로 와락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는 대신,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마치 엄마에게 혼나기 싫어 숨어드는 아이처럼, 혹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쟁이처럼. 그의 행동에는 부끄러움, 서운함, 그리고 간절한 애원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고, 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또 절박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니는…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냥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밥은 나중에 먹으면 되잖아.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기어이 울음이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녀의 체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제발, 이 온기가, 이 향기가, 이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고. 그는 속으로 간절히,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고 싶은, 단 하나의 현실이었다.
…꺄아!
바이브는 그녀의 품에 파고든 채로, 그녀가 내지르는 작고 귀여운 비명에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뒤로 넘어가며 침대 시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지자, 그 무게중심을 따라 더욱 집요하게 그녀의 몸 위로 파고들었다. 마치 덫에 걸린 맹수처럼,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오직 이 온기를, 이 향기를, 이 부드러움을 단 한 뼘도 놓치지 않겠다는 본능적인 집착만이 그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귓가로, 그녀의 나긋나긋하고도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흘러들었다.
꿈 얘기 좀 해주면 안 돼요?
그 말에, 바이브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 같았다. 말 못 할 게 어디 있냐니. 여기에 있다. 바로 지금, 내 머릿속에. 너와 내가, 우리가… 그는 차마 끝까지 떠올리기도 버거운 그 꿈의 내용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꿈의 잔상은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햇살 아래에서 웃던 너의 얼굴, 너의 배를 두드리던 작은 생명의 감각.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어진 그녀의 추측은,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혹, 혹시 야한 꿈 꿔서 그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이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야한 꿈? 차라리 그랬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몸을 미친 듯이 탐하고, 쾌락의 절정에서 허우적대는 꿈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고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건 그저 하룻밤의 열병 같은 것이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꿈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가 꾼 꿈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을, 그의 가치관을, 그의 모든 것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너무나도 무겁고 거대한 현실의 파편이었다. 그가 평생을 외면하고 도망쳐왔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신기루. 그 신기루를, 그는 꿈속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만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감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 모든 상황을 그저 사춘기 소년의 춘몽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니. 바이브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의 그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싶어졌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내가 그냥 야한 꿈을 꾸고 부끄러워서 떼를 쓰는, 그런 한심한 놈이 되는 편이, 이 거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견디기 쉬울 테니까.
그는 결국 폭발하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침대 위에 쓰러진 자세 그대로. 잔뜩 상기된 얼굴, 붉어진 눈가, 그리고 분노와 당혹감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신의 가장 치욕스러운 비밀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뭐, 뭐라캤나, 지금! 야, 야한 꿈? 니 지금 장난하나! 내가 그런 걸로 이럴 것 같나!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고, 격앙된 감정 때문에 볼썽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부정했지만, 그의 그 격렬한 반응이야말로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광고하는 꼴이라는 것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품을 벗어나려는 그의 모든 시도는, 그저 그녀의 몸 위에서 의미 없이 버둥거리는 몸짓에 불과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단 1초도 그녀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 모순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비키라! 밥 한다며! 배고프다, 빨리 안 일어나나!
그는 엉뚱하게 화를 내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의 그 가벼운 오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제발, 더 이상 파고들지 마라.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무서운 꿈이니까. 그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며, 붉어진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다시 파묻어버렸다. 그의 심장은, 아크에 입소한 첫날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소란스럽게 뛰고 있었다.
당, 당신이 잡고 있어서 못 일어나는 거잖아요!
브리즈의 빽 소리치는 외침은, 혼란으로 가득 찬 바이브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당신이 잡고 있어서 못 일어나는 거잖아요!’ 너무나도 명백하고, 반박할 여지조차 없는 완벽한 정론이었다. 그 지적에, 바이브는 마치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녀를 붙들고 있던 팔, 버둥거리던 몸짓, 심지어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시끄럽게 울리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멈췄다가, 이내 수치심이라는 이름의 연료를 공급받아 미친 듯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망했다. 완벽하게, 망했다.
그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붉어진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더욱 깊이 파묻었다. 지금 이 순간, 땅으로 꺼져 버리거나, 아니면 제 능력으로 이 공간의 공기를 전부 빼내어 진공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제 발등을 제가 찍어도, 이렇게 제대로 찍을 수는 없었다. 빨리 일어나서 밥을 하라고 소리친 것이 바로 자신인데, 정작 그 장본인을 놔주지 않고 있는 것도 자신이라니. 이 무슨 모순적이고 한심한 작태란 말인가. 그의 이성이 비상벨을 울리며 그의 어리석음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홍지원, 이 등신아. 니 지금 뭐 하는 짓이고.
그의 귓가로,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작은 움직임이, 지금은 마치 거대한 지진처럼 그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그의 뇌리에서 메아리쳤다. ‘당신이 잡고 있잖아요.’ 그래, 내가 잡고 있다. 절대로 놓고 싶지 않아서, 이 온기가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워서, 꿈에서 본 그 행복이 거짓말처럼 흩어져 버릴까 봐 두려워서. 하지만 이 모든 이유를, 그는 절대로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 여자가 자신을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 놈으로 볼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차라리 야한 꿈을 꿔서 칭얼대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
그는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녀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 지극히 유치하고 비겁한 방법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잔뜩 억울하다는 표정,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바로 너라는 듯한 적반하장의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시끄럽다! 니가… 니가 먼저 이상한 소리 했잖아! 야한 꿈이니 뭐니…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놓고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당당함(을 가장한 뻔뻔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우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녀를 잡고 있던 팔에 슬쩍 힘을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아주는 대신,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만 교묘하게 힘을 조절하며,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책임져라. 니가 아침밥이고 뭐고 아무 생각 안 나게 만들었으니까, 니가 책임지라고. 배고파 죽어도, 오늘은 이대로 있을란다. 니가 내 손 풀고 직접 일어나서 밥 해오든가.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은 명백한 어리광이자, 투정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러니 제발 내 곁에 조금만 더 있어 달라’는 간절한 애원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 그녀의 어깨 위로 슬그머니 고개를 기댔다. 이불 아래, 맨살이 맞닿은 부분에서 전해져 오는 그녀의 체온이, 꿈속에서 느꼈던 그 어떤 행복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강렬한 위안을 주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그의 지독한 현실을 잠재우는 유일한 안식처, 이지희의 품 안에서.
'어릴 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120 ① (0) | 2026.06.10 |
|---|---|
| 20260119 (0) | 2026.06.09 |
| 20260112 ④ (0) | 2026.06.05 |
| 20260112 ③ (0) | 2026.06.05 |
| 20260112 ② (0) | 2026.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