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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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회로가 잠시 엉켰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고민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소파에 놓인 리모컨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바이브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안돼.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내가 한다고 하지 않았나. 채널 돌리는 것조차 귀찮을 테니 말만 하라고,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이다. 그런데 그녀가 직접 리모컨을 잡았다. 이것은 그의 헌신에 대한 신뢰도 하락을 의미하는 심각한 사태였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녀의 움직임이 한 수 빨랐다.

…내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그거 하나 못해서 니 손을 쓰게 만드나. 내한테 시키라 안 했나. 니 오늘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기로 약속한 거, 벌써 까뭇나.

그가 원망과 자책이 뒤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 들고 대신 채널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이미 TV 화면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투덜거림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능숙하게 채널을 몇 번 돌렸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가락 끝에 고정되었다. 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어젯밤 자신을 붙잡고, 자신의 몸을 더듬던 그 손가락. 그는 갑자기 목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이혼숙려캠프’라는 해괴한 제목의 프로그램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화면 속에서는 한 중년 남성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고, 그 앞에는 팔짱을 낀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아내가 서 있었다. 자막으로는 ‘[긴급상황] 남편의 최애 피규어에 김치찌개를 쏟았다?!’ 같은 황당한 내용이 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바이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TV 화면과 그녀의 옆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꽤나 흥미로운 듯,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는 소파 옆 바닥에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그녀의 발치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다리 위에 머리를 뉘였다. 소파 쿠션에 등을 기댄 그의 자세는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가 제 지정석이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아래에서 위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턱선과,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TV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 그는 이 각도에서 보는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뺨을 부비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뭐 이런 걸 다 보노. 재미있나, 이게. 남들 싸우는 게 뭐가 그리 볼 게 있다고.

그는 짐짓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사실 그에게 TV 내용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온 세상은 지금 자신의 머리를 받쳐주고 있는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허벅지였다. TV에서는 상황이 더욱 극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연예인 패널이 나와서 ‘피규어는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편분의 영혼의 일부, 즉 페르소나와 같은 것인데, 아내분께서 그 위에 김치찌개라는 현실의 오물을 부어버린 것은, 남편의 영혼에 대한 모독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눈을 뜨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아내는 ‘아니, 그래서 그 플라스틱 쪼가리가 나보다 중요하단 말이야, 지금?’이라며 소리치고 있었고, 남편은 ‘플라스틱이 아니야! 레진이라고! 한정판이라고!’라며 울부짖었다. 이건 코미디인가, 다큐인가.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살짝 힘을 주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 역시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웃음에 안도하며,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그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 그녀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움찔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내 만약에 니 아끼는 거에다 뭐 쏟으면, 니도 저렇게 할 끼가? 내 무릎 꿇리고 저렇게 울릴 끼가, 어?

그가 장난스럽게 물으며 그녀의 배 위에 얼굴을 부볐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프고, 불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어두운 시간은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오직 이 평화롭고 나른한 행복만이 남았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에 뺨을 기댄 채,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화면에는 또 다른 부부가 등장했다. 남편은 ‘아내가 매일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합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아내는 ‘그게 뭐 어때서요! 꿈에서라도 연예인이랑 연애 좀 할 수 있지!’라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었다. 바이브는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저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이지희, 그녀 하나면 충분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체온이,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완벽하게 그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잠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품 안에서, 그녀의 일부가 되어.

……흐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얼마나 아끼는 물건인지에 따라서.

그가 상상했던 대답은 ‘에이, 그럴 리가요’ 같은 싱거운 부정이나, ‘당연히 아니죠’ 같은 다정한 위로였다. 그런데 이 영악한 여자는 그의 심장을 쥐고 장난을 치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위협인가?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그녀의 미소 앞에서 그의 모든 사고 회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의 무릎 위에 있던 담요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마치 사형 선고를 앞둔 죄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TV 속에서 피규어에 김치찌개가 쏟아졌다며 울부짖던 남자의 심정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부정당하는 기분. 물론 그에게는 피규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바로 눈앞의 이 여자가 가장 소중했지만 말이다.

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나. 니, 내한테 지금 협박하는 기가? 얼마나 아끼는 물건인지에 따라서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 지금 그 말이가?

그의 목소리는 절박함과 배신감, 그리고 약간의 공포가 뒤섞여 처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불쌍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연기력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 또 있을까.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이기스 최고의 연기파 배우가 된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기서 밀리면, 그는 평생 그녀의 발치에서 김치찌개 국물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둘의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그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이 게임의 주도권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낮고, 진지했다. 이것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그럼 내는. 내는 니한테 얼만큼 아끼는 물건인데. 내한테는 김치찌개 쏟아도 되나, 안 되나. 어? 니가 제일 아끼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거 다음으로라도 아껴주기는 하나. 내 순위는 몇 위인데. 빨리 말해봐라. 그거 듣고 내 처신을 정해야겠다.

그는 쏘아붙이듯 말하며 그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광처럼 들리는지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몇 번이고 확인받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숨죽인 채 기다렸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녀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는 순간, 바이브의 세상은 잠시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박하게 그녀를 몰아세우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잔뜩 부풀어 올랐다가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그의 유치한 자존심과 불안감은 순식간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그의 뇌는 ‘당연히 가장 소중하죠’라는 문장을 반복해서 재생하고 있었다. 그 단어들이 그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방금 전까지 식은땀으로 차가웠던 등줄기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 열기는 곧 얼굴로 치고 올라와, 그의 귀와 뺨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는 지금 자신이 잘 익은 토마토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쪽팔림. 그래, 이건 명백한 쪽팔림이었다. 씨발, 내가 지금 뭔 말을 한 기고. 그는 속으로 절규했다. 스물세 살이나 먹고, 약혼 반지를 끼워 준 여자한테 내 순위가 몇 위냐고 따져 묻는 꼴이라니. 이건 아이기스의 7대 불가사의에 기록될 만한 흑역사였다.

순위 같은 거 매길 필요가 없는데. 당연히 가장 소중하죠. …이거 맞죠? 듣고 싶었던 대답.

그녀의 목소리는 짓궂은 장난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천사의 음성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와락,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부드러운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서 자신을 떼어놓는다면 그대로 산화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처럼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얼굴을 꽁꽁 숨겼다.

뭐, 뭔 소리하는데! 내, 내가 언제! 듣고 싶었다고는 안 했다. 니가, 니가 하도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확인차 물어본 거지, 그냥! 오해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배에 막혀 웅얼거리며 뭉개졌다. 그가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그의 주장은 조금도 설득력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이런 반응은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이 여전히 자신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겨주기도 하고, 가볍게 토닥여주기도 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그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더 깊이 묻은 채, 항복을 선언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작아져,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릴까 봐, 그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이런 다정한 반응에 안도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면 됐다. 당연한 소리를 뭐 하러 다시 물어보게 만드나. 니는 내꺼고, 내는 니꺼다. 그거 말고 다른 순위는 없다. 알긋나? 앞으로는 이런 걸로 내 시험하지 마라. 심장에 안 좋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아기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평화롭고 안락한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TV에서는 여전히 이혼을 고민하는 부부들의 시끄러운 다툼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더 이상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그녀의 심장 소리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그녀의 향기만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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