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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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숨이 멎었다. 얇은 티셔츠가 스르륵 벗겨지고 속옷 후크가 가볍게 풀리며 드러난 그녀의 맨등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성역과도 같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차마 그 성역에 손을 대지 못하고 망연히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도화지. 하지만 그 위에는 지워지지 않는 세월의 흔적과, 어젯밤 그가 남긴 선명한 소유의 증표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왼쪽 팔을 따라 길게 이어진 희미하지만 분명한 화상의 기억. 오른쪽 옆구리에서 시작되어 비스듬히 그어진 괴수의 발톱이 남긴 깊은 상흔. 그리고 그 흉터들 위로 마치 밤하늘에 뜬 붉은 별처럼 흩뿌려진 그의 입술 자국들. 그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그녀의 평온을 해칠까 두려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바닥에 덜어놓은 아로마 오일이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그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씨발. 홍지원, 이 개새끼. 그는 속으로 욕설을 곱씹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그녀의 세상이 되어주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뭔가. 그 맹세가 무색하게 그는 그녀의 몸에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아로새겼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이, 그의 죄책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침대에 얼굴을 묻는 그 작은 움직임조차 그에게는 자신을 향한 무언의 질책처럼 다가왔다. 그는 지금이라도 그녀의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이 손으로 그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 어제의 과오를, 오늘의 헌신으로 씻어내는 것.

그는 다시 한번 손바닥을 비벼 거의 식어버린 오일을 데웠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혹시라도 떨릴까 봐, 몇 번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그녀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기 직전, 그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감히. 이 상처 입은 날개를 내 더러운 손으로 만져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전체가 그녀의 등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피부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한 온기에, 그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아주 부드럽게 오일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마치 춤을 추듯, 그녀의 등 위를 유영했다. 그는 뭉친 어깨 근육을 찾아내어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풀어주었다. 그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플까 봐, 그녀의 작은 숨소리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손길은 어깨를 지나 척추를 따라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는 그녀의 옆구리에 남은 흉터를 차마 똑바로 매만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조심스럽게 마사지했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덧나기라도 할까 봐 그는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그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손길이 어젯밤 그가 남긴 붉은 자국 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의 심장은 예리한 칼에 베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그 흔적들을 지워내려는 듯 더욱더 부드럽고 세심하게 그 주변을 어루만졌다.

…내가, 진짜 미친놈이다. 내 진짜… 죽일 놈이다.

그가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심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는 지금 자신의 꼴이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지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손길에 모든 마음을 담아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등 전체를 자신의 넓은 손바닥으로 감싸 안듯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날개뼈를 지나 잘록한 허리 라인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는 이 작은 몸이 자신의 세상 전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남은 자신의 흔적 위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깃털보다도 가벼운 속죄의 입맞춤이었다.

…아프면, 진짜 딱 한 대만 때려라. 내 군말 없이 맞을게. 그리고… 만약에 시원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아지면… 그냥 가만히 있어주면 안 되나. 니가 괜찮다는 신호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게. 니가 아무 말 안 하면, 내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게.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의 손은 이제 더욱 대담하고 깊게 움직였다. 그는 바람의 흐름을 읽듯 그녀의 근육의 결을 읽고 그 흐름을 따라 막힌 곳을 뚫어주었다. 그는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녀의 고통을 자신의 손으로 덜어낼 수만 있다면, 그는 평생이라도 이렇게 무릎 꿇고 그녀를 위해 봉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마지막으로 오일을 펴 바르고, 자신의 상체를 그녀의 등 위로 아주 살짝,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기대었다. 그는 그녀의 심장 소리를, 그녀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이토록 절박한 사랑의 외침이 그녀에게도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랑한다, 이지희. 진짜. 니가 내 전부다.

그의 손길은 딱딱하게 뭉쳐있던 승모근을 지나, 날개뼈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그의 손길이, 오른쪽 옆구리에 비스듬히 그어진 흉터에 가 닿았다.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숨도 멎었다. 다른 상처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고통이 그의 온몸을 꿰뚫었다. 그날의 기억이,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그의 후각을 강타했다. 수많은 괴수들의 비명과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 속, 단 한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눈을 뗀 것은. 방심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옆을 위협하던 또 다른 적을 처리하기 위한 찰나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가, 지옥을 만들었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 괴수의 날카로운 발톱에 옆구리가 꿰뚫린 채. 그가 미친 듯이 바람을 일으켜 그녀를 감싸 안았을 때, 그의 손에 느껴지던 것은 붉고, 뜨겁고, 끈적이는 감촉뿐이었다. 혼수상태로 5일. 그는 그녀가 누운 침대 옆에서 잠도 자지 않고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눈을 뜨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각오였다.

그 흉터는 그녀의 몸에 남은 상처이기 이전에, 그의 영혼에 새겨진 낙인이었다.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증거. 그가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명백한 사실. 그는 흉터 주변을 차마 직접 만지지는 못하고 그저 손가락으로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젯밤 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녀를 볼 자격도 그녀의 몸에 손을 댈 자격도 없는 자신을 저주했다.

…인제 좀 괜찮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목소리가 끔찍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하든,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등이 자신의 손길 아래에서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넓게 감싸 안고 척추를 따라 아주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바닥 전체에 그녀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듯 몇 번이고 그 동작을 반복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고른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일도 해줄게. 니가 지겹다고 할 때까지. 맨날 맨날 해줄게. 그러니까… 아프지 마라. 내 진짜 속상해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니 몸은 인제 니 꺼 아니다. 내 꺼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다 아껴줄 거다. 알긋나?

 

…응,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녀가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를 향해 돌아본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그 순간 바이브의 세상은 소리를 잃었다. 그의 손길이 멈췄다. 그녀의 등 위에 얹힌 채, 모든 움직임을 잃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괜찮다는 것은, 그가 저지른 짓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뜻이었다. 그의 죄책감이, 속죄하려는 이 비참한 노력이, 전부 의미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 그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늘 괜찮다고 말했다. 제 몸이 찢겨나가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녀는 괜찮다고 웃었다. 그 미소가, 그를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그녀는 알까. 그 다정함이, 그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녀는 알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등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쳐, 차가운 바람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 모든 감정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손은 자석처럼 그녀의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고른 숨결이, 그를 이 자리에 붙잡아맸다.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거짓말.

간신히 뱉어낸 한마디는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그는 그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옆구리에 남은 흉터를,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흉터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고통을,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마주했다.

니는 맨날 괜찮다고 한다. 니 옆구리 터졌을 때도, 니는 눈 뜨자마자 괜찮다고 웃었다. 내 진짜… 그 웃음 보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니는 그냥, 너무 착해서 그렇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니는 다 괜찮다고 할 거잖아. 그래서 더 미치겠다고, 내는.

그의 목소리는 물기로 축축했다. 그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소리 내어 우는 대신, 뜨거운 눈물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녀의 등 위로 툭, 툭 떨어졌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등 위로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손바닥으로 다급하게 닦아내며 오일과 섞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니까, 인제 그런 말 하지 마라. 괜찮다는 말. 고맙다는 말. 니가 그런 말 할 때마다, 내 가슴에 구멍 뚫리는 것 같으니까. 그냥 가만히 내 손길이나 받고 있어라. 그냥 다 나한테 맡기라고. 니 몸뚱아리, 이제 내 거라고 했잖아. 내 건데 내가 아끼는 게 당연한 거 아이가.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알긋나?

그는 거의 떼를 쓰듯, 어린애처럼 말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집요하고 절박했다. 그는 이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마사지를 멈추고 그녀의 등 전체를 자신의 두 손으로 가득 감쌌다. 그리고 그는 마치 맹세하듯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내 평생, 이렇게 니 상처 닦아주면서 살게. 어제처럼 니 아프게 하는 날에는, 니 손으로 직접 내 손모가지 부러뜨려도 좋다. 내 진짜, 약속한다. 그러니까… 그냥 받기만 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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