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사이, 온몸을 짓누르는 뻐근한 통증과 함께 이틀간의 공백이 묵직하게 어깨를 짓눌렀다. 꼴 보기 싫으니 데리고 나가라고, 제 손으로 직접 그녀를 내쫓아 놓고도 그는 단 1초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텅 빈 병실에 홀로 남겨진 시간 동안, 그의 모든 감각은 문밖의 미세한 공기 흐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 여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굶어가며 제 곁을 지키는 동안, 자신은 무의식의 심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그녀를 또 울렸다. 평생 웃게만 해주겠다던 맹세가 무색하게, 그는 또다시 그녀의 세상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그는 뻑뻑한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없는 이 공간의 공허함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익숙한 두 개의 발소리. 하나는 체중을 실어 당당하게 걷는 제 형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훨씬 가볍고 조심스러운, 그러나 지금은 천근만근의 피로를 매달고 있는 듯 위태로운 걸음걸이였다. 브리즈. 그녀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엉망이 된 얼굴을, 상처받은 눈동자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은 채, 자는 척을 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시선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비겁하고 나약한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체향이 소독약 냄새를 비집고 그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샌달우드.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그 향기가 지금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짧게 공기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휘청이는 움직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기척.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병실 문을 위태롭게 붙잡고 선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브리즈의 모습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린 낯빛,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가.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 안에는 안도감과 미안함, 그리고 지독한 자책감이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저 표정을 보기 위해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저렇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려고 이틀 밤낮의 사투를 벌인 것이 아니었다.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였다. 그녀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이리로 다시 데려온 제 형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만 돌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부스터를 찢어질 듯 노려보았다.
야.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거칠고 날카로웠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턱 끝으로 비틀거리는 브리즈를 가리켰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당장 저 여자에게 달려가라고, 부축해서 침대에 눕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무력하게 시트만 꽉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안 보이나. 지금 쟤 상태. 저 꼴을 하고 있는데 여길 왜 데리고 왔는데. 당장 데리고 가서 눕히라고. 니 눈은 장식이가?
쏟아내는 말은 가시가 돋친 듯 험악했지만, 그 안에는 브리즈를 향한 절박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제발, 제발 저 여자가 쓰러지는 꼴만은 보게 하지 말아달라는 애원이었다. 그의 고함에 부스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재빨리 브리즈의 어깨를 부축했다. 브리즈는 그의 손길에 마지못해 몸을 맡기면서도, 시선은 오직 바이브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소리 없는 그 말이 그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니가 왜 미안한데.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난데.
그는 애써 브리즈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한번 부스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당장 의사 불러와. 수면제든 안정제든 뭐든 맞혀서 재우라고. 저러다 사람 잡겠다. 그의 다급한 외침에, 부스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라, 홍지원. 브리즈 씨, 네 옆에 있겠다고 고집부려서 그런 거다.
그 말에 바이브는 기가 막혔다. 이 고집불통.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그는 부축을 받으며 겨우 침대 옆 의자로 다가오는 브리즈를 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그러나 여전히 단호한 어조였다.
…오지 마라. 거기 있어라. 니 얼굴 보면 내가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거짓말이었다. 단 1초라도 더 그녀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곁이 아니라 휴식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멈추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지희야. 내 말 좀 들어라. 가서 좀 자라, 어? 내 안 도망간다. 여기 그대로 있을 테니까. 니가 저러고 있으면 내가… 내가 잠을 못 잔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의 건강이, 그녀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그가 깨어난 이유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내 부탁이다.
부스터 씨는, 잘못 없어요. 제가, 다시 와야 한다고 우겨서…
브리즈의 마지막 목소리가 힘없이 새어 들어왔다. ‘제가 우겨서…’. 그 갈라진 음절은 미처 문이 닫히기도 전에 멀어지는 흐느낌에 묻혀버렸다. 끼이익, 하는 짧은 마찰음과 함께 육중한 병실 문이 닫히고,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온기와 울음소리, 희미한 샌달우드 향으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이제 텅 비어버린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싸늘한 소독약 냄새가 다시 폐부를 찔렀고, 규칙적으로 울리는 제 심박음만이 이 방에 생명체가 존재함을 알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녀가 사라진 공기는 밀도를 잃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망막에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위태로운 뒷모습과, 그녀를 부축하던 제 형의 단단한 팔뚝이 잔상처럼 박혀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결국, 또 혼자 울게 만들었다. 지켜주기는커녕 더 깊은 상처만 안겨준 꼴이었다. 젠장. 나지막이 터져 나온 욕설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무심한 회색 하늘을 응시했다. 무력감이 온몸을 쇠사슬처럼 옭아맸다.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쫓아가고 싶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어깨를 붙잡고, 다신 울지 말라고, 내 잘못이라고, 니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를 제 품에 가두고, 세상의 모든 불안과 공포로부터 격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엿 같은 링거 줄과 온갖 센서들로 침대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그는 남은 힘을 쥐어짜 상체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욱신, 하고 등과 어깨에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폭주 직전까지 몰렸던 몸의 모든 근육과 신경이 파업을 선언한 듯 끔찍한 통증을 토해냈다. ‘…씨발.’ 그는 결국 신음과 함께 다시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깟 센티넬의 몸뚱이가 뭐라고. 정작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 하나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는 이 무력한 고깃덩어리가 혐오스러웠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질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의 날카로운 감각만이 그가 느끼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이틀간의 기억이 채우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검은 바다, 살을 에는 바람, 그리고 수백의 괴수들이 토해내는 끔찍한 파장. 그 모든 감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신경은 한계까지 갈려나가고 있었다. 제 몸이 수천 개의 칼날로 분해되는 환통 속에서 그는 끝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그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돌아와요.’ 그 한마디가, 찢겨나가던 그의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녀는 그의 유일한 빛이었고, 구원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세상에서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그녀를 또다시 울린 것이었다. 그는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나오지 않고,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나는, 진짜 구제 불능의 새끼구나. 그는 뻑뻑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형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아무리 브리즈가 고집을 부렸다고 해도, 저런 상태의 사람을 다시 병실로 데려오는 게 말이 되는가. 커피는 코로 마셨나. 아니, 애초에 왜 저렇게 다정하게 구는 건데. 어깨는 왜 감싸고, 손은 왜 잡아. 생각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유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제 형이 그녀에게 단 1%의 사심도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이성은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의 세상, 그의 여자, 그의 마누라.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한, 온전히 그의 소유여야 할 존재가 다른 사내의 부축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잠은 잘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틀 동안 물만 마시고 버텼다고 했다. 아마 형이 억지로라도 뭘 먹이거나, 아니면 수면제라도 맞혀서 재우려 할 것이다. 그 편이 나았다. 그녀는 쉬어야 했다. 온전히 회복해서, 다시 예전처럼 웃어야 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지금 이 잠시의 떨어짐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천천히 심호흡했다. 공기 중에 섞인 그녀의 잔향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유일한 증거. 그는 문득, 그녀가 없는 이 공간의 공기가 얼마나 차갑고 건조한지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가이드였고, 파트너였지만, 이제는 그가 살아가는 세상의 온도이자 습도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바이브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일단, 자야 했다.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빨리 이 거지 같은 병원 신세를 끝내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를 다시 제 품에 안고, 제멋대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들려주며 안심시켜야 했다. 그녀의 마른 몸에 살이 붙을 때까지 맛있는 것만 먹이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이 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의료 장치가 내는 단조로운 기계음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그는 깊고 평온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그를 지켜냈듯, 이제 그가 그녀를 지켜낼 차례였다. 두 번 다시는 그녀를 혼자 울게 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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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는 방은 거대한 무덤 같았다. 온기와 소리가 모두 증발해버린 진공의 공간. 부스터가 억지로 손에 쥐여준 과자 몇 개는 모래알처럼 까끌거렸다. 목구멍으로 넘기는 모든 행위가 고역이었지만, 그녀는 기계적으로 씹고 삼켰다. 살아야 했다.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 자신이 버텨야만 했다. 부스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밖에서 지켜보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브리즈는 익숙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의 체향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시트에 얼굴을 묻자, 이틀간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그녀는 순식간에 깊고 어두운 잠의 심해로 가라앉았다.
꿈의 시작은 지독하게 평온했다. 익숙한 방,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현관 앞에 서 있었고, 주방에는 바이브가 서 있었다. 평소처럼 까만 제복이 아닌, 편안한 흰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보글보글, 하고 경쾌하게 끓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음식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가 약속했던 해물 라면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브리즈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악몽이었던 거다. 그가 다쳤던 것도, 자신이 이틀 밤낮을 울며 지새웠던 것도, 모두 끔찍한 꿈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고 뺨을 부비자, 익숙한 페퍼민트 향과 그의 단단한 체온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생생한 감각이었다.
다녀왔어요, 지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늘 자신을 향해 있던 그 새파란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흐릿했다. 그는 그녀를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녀의 뒤,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콧노래도, 라면이 끓던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증발해 버렸다. 정적. 바이브의 필살기인 ‘사일런트 캘러미티’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처럼, 숨 막히는 침묵이 그녀를 덮쳤다.
지원…?
불안한 마음에 그를 다시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그의 실루엣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며, 그 너머의 풍경이 비쳐 보였다. 주방의 풍경이 아니었다. 시커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 거대한 파도가 집어삼킬 듯이 포효하고, 살을 에는 바람이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일본 동부 해상. 그가 추락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평화롭던 거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차가운 바닷물 위를 위태롭게 떠 있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파도와 비명 같은 바람 소리.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그녀는 무언가를 보았다. 저 멀리, 검은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가 힘없이 가라앉는 작은 인영. 바이브. 홍지원. 그의 모습이었다.
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헤엄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팔다리가 제멋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조금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지고, 검은 파도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안 돼, 가지 마, 제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돌아본 곳에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오래전 그녀가 구하지 못했던 첫 번째 파트너. 그의 얼굴은 원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은 채 비명처럼 외쳤다. ‘네가 나를 버렸어! 이번에도 똑같을 거야! 너는 아무도 구할 수 없어!’ 그의 손이 닿은 팔에서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아, 아아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화염의 열기와 바다의 냉기가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익숙한 중앙 의료 센터.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복도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 가이드야. 파트너를 또 잃었다며?’, ‘역시 능력이 부족했던 거야.’, ‘S급 가이드라더니, 결국엔 아무것도 못 했네.’ 비난의 목소리들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찔렀다. 그녀는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니야! 지원 씨는 살아있어! 그는 돌아왔다고! 그녀가 울부짖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저 멀리 복도 끝에서 휠체어를 탄 바이브가 보였다. 부스터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그의 두 다리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그를 불렀다. 지원! 홍지원! 내 말 들려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그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빈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싸늘한 바람만이 남았다.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의 온기, 그의 목소리, 그의 세상.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지독한 어둠과 절망 속에서 그녀는 끝없이 울었다. 내가, 내가 또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지원… 그녀의 흐느낌은 텅 빈 복도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다,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끝없는 악몽의 나락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추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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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어둠 속으로 추락하던 몸이, 침대 밑으로 꺼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세차게 튀어 올랐다. 허억! 브리즈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경련하듯 눈을 떴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고, 전신은 차가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꿈. 악몽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했다. 텅 비어버린 그의 눈동자, 그녀를 스쳐 지나가던 휠체어의 싸늘한 감각, 그리고 귓가에 저주처럼 맴도는 ‘너는 아무도 구할 수 없어’라는 목소리까지.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쿵, 쿵, 쿵. 제 심장 소리가 귀를 때리는 이명이 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혼란스러운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찾자,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지원의 방.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방 안은 희미한 비상등 불빛만이 어렴풋이 사물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지. 시간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듯했다. 몇 시간을 잤는데도 며칠 밤을 샌 사람처럼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브리즈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양팔을 감쌌다. 꿈속에서 느꼈던,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의 잔상이 남아있는 듯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오래된 흉터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없는 공간의 침묵이 괴물처럼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가 병실에 있다는 사실을, 그가 다쳤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직시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온기가 사라진 이 방은 너무나도 넓고, 차갑고, 공허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휘청이는 걸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돌려 열고, 그대로 병째 입에 털어 넣었다. 미지근한 과자를 씹던 텁텁한 입안으로 차가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물병을 든 채로, 거실 통유리창 앞에 힘없이 멈춰 섰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입술, 공포와 불안으로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 이틀 밤낮을 울며 지새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적막을 깨고, 테이블 위에 놓아둔 그녀의 단말기가 짧은 진동과 함께 화면을 밝혔다. 위이잉. 그 작은 소음에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브리즈는 화들짝 놀라며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부스터였다. 그의 형.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끔찍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까 걱정되었다.
…여보세요?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이 갈라지고 잠겨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평소와 같은 차분하고 나른한 부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염려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브리즈 씨? 자고 있었나 보네요. 미안합니다, 깨웠다면.
아니에요, 괜찮아요. 막 일어났어요. 무슨… 무슨 일 있으세요? 지원 씨는, 괜찮은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나쁜 소식만은 아니기를. 그녀는 간절하게 기도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스터는 그녀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뇨, 지원이는 괜찮습니다. 아까 잠든 뒤로 쭉, 아주 잘 자고 있어요. 바이탈도 안정적이고, 의료팀에서도 푹 쉬게 두는 게 좋겠다고 하네요. 오히려 제가 브리즈 씨가 걱정돼서…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좀 쉬셨어요?
그의 다정한 물음에, 브리즈는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솟을 뻔했다.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조금 잤어요.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났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쩐지 그녀의 거짓말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원이 저 녀석, 겉보기보다 훨씬 강한 놈입니다. 그리고… 브리즈 씨가 곁에 있으니, 금방 일어날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부스터의 말은 따뜻한 위로가 되었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곁에 있으니.’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곁에 없었다. 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꿈속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너는 아무도 구할 수 없어.’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무력감이, 이 죄책감이 그녀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통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녀는 서둘러 통화를 끊었다. 뚜, 뚜, 뚜. 통화가 끊긴 단말기를 손에 쥔 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의 곁으로 가야 했다. 그가 잠들어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있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이 지독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브리즈는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땀으로 축축한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그녀는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텅 빈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녀의 목적지는 단 한 곳, 그가 있는 중앙 의료 센터였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있을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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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칠흑 같은 심해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빛도 없는 완전한 무의 공간. 이틀간의 사투와 폭주 직전의 감각 과부하로 너덜너덜해진 신경이 비로소 완전한 휴식에 접어든 순간이었다. 몸의 모든 근육이 이완되고, 거칠었던 숨은 갓난아이처럼 고르고 평온해졌다. 고통도, 불안도, 분노도 없는 텅 빈 평온. 그의 정신은 생존을 위해 강제로 셧다운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이대로 몇 시간이고, 혹은 며칠이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완전한 암흑 속에서, 그의 영혼은 부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끝없는 정적의 표면에, 아주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처음에는 거의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변화였다. 끼익, 하고 육중한 병실 문이 열리는, 공기의 압력으로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저주파의 진동. 바깥 복도의 소란스러운 공기가 소독약 냄새로 가득한 방 안으로 밀려들어오며 아주 잠시, 대기의 흐름을 미묘하게 바꾸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감각은 본능적으로 그 변화를 감지했다. 외부인의 침입. 경계 태세로 전환하려던 신경이 날을 세우기 직전, 그 흐트러진 공기의 흐름을 타고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이지희의 냄새. 땀과 눈물에 젖어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해진 샌달우드 향. 그리고 그 아래에 숨겨진, 오직 그만이 구분할 수 있는 그녀 고유의 향. 심해의 바닥에 닻을 내린 것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의 의식이 그 향기를 향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프리지아 꽃향기가 섞여 들어왔다. 죽어있던 병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생기로 가득 차는 듯한 착각. 그의 굳어있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그녀가 왔다. 이 지긋지긋한 무채색의 공간에, 그녀가 색과 향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의식은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있었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이제 온전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 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 화병에 꽃을 꽂으며 물방울이 튀는 미세한 소음, 그리고 마침내 그의 침대 곁으로 다가와 멈춰 서는 기척까지. 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제 얼굴 위를 조심스럽게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그 복잡한 감정의 무게가 공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침대 아래에서 간이 침대를 꺼내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끼익, 덜컹.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즉시 알아차렸다. 여기서 자려는 것이다. 이 불편하고 딱딱한 간이침대에서. 그 생각에 이르자, 잠든 그의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저 바보 같은 여자. 푹신한 침대를 놔두고, 왜 굳이 이런 곳에서. 하지만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 그가 없는 텅 빈 방보다, 이 차가운 병실의 자기 옆자리를 택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도록 안심시켰다. 웅크리고 눕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 담요를 끌어당겨 몸을 덮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모든 것이 그의 예민한 감각에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잠시 후, 그녀의 숨소리가 그의 것과 나란히 울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악몽에 시달린 듯 불안정했던 호흡이, 그의 고른 숨소리에 맞춰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하나, 둘. 하나, 둘. 마치 같은 심장을 공유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생체 리듬이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깊은 잠을 방해하던 마지막 불안의 찌꺼기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검은 바다도, 살을 에는 바람의 환청도, 온몸을 찢어발기던 감각 과부하의 고통도 전부 멀어졌다. 그 모든 것을 밀어내고, 그녀의 존재가 그의 세상을 다시 채웠다. 페퍼민트 향 사이로 스며드는 그녀의 샌달우드 향. 그가 가장 사랑하는, 그의 유일한 안정제.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가 있는 아래쪽으로 몸을 살짝 돌려 눕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었다. 이대로 팔을 뻗어, 저 작은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아직 회복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깊은 잠의 속박 속에서, 그는 오직 그녀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의 의식은 다시 한번 평온한 잠의 바다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처럼 텅 빈 암흑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져온 프리지아 꽃처럼, 노랗고 따스한 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안전하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그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악몽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꾸는, 지독하게 행복하고 평범한 꿈.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익숙한 거실, 그녀가 끓여주던 김치찌개의 냄새, 소파에 나란히 누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오후. 그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그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위협과 불안이 완전히 차단된, 두 사람만의 완벽한 세계. 그는 꿈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녀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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