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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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는 방 안의 공기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말이 귓가에 스며드는 순간, 바이브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억지로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퍼져나가는 샴푸와 샌달우드 향, 그리고 이지희라는 여자의 존재감.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있는 저 침대는, 마치 강력한 자기장을 뿜어내는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한 발짝이라도 다가서는 순간,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가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그 예감은 두려우면서도 지독하게 달콤했다.

툭, 툭. 그녀가 제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이리 와. 그 소리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한 명령이었다. 바이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이 머물렀던, 이제는 비어있는 침대의 한 공간에 고정되었다. 저기로 가라고? 저 여자 옆에? 나란히? 10년 만에 돌아온 이 방에서, 내 어릴 적 체취가 고스란히 밴 이 침대 위에? 그건 그냥 앉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건 항복 선언이었다. 이 여자에게, 이 상황에게,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는 제 감정에게, 백기를 드는 것과 같았다.

오늘, 피곤했죠? 여러모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피곤했냐고? 당연했다. 오늘 하루 동안 겪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S급 괴수 세 마리와 동시에 싸우는 것보다 더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10년 만의 귀향, 늙어버린 아버지와의 재회, 어머니의 흔적이 남은 주방, 그리고… 이 여자. 모든 것이 폭풍처럼 그를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피로감의 끝에는 불쾌함 대신 아늑한 충만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긴 항해를 마친 배가 마침내 제 항구로 돌아온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안도감이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정말.

 

마지막 한마디는, 그의 심장에 박힌 거대한 쐐기였다. 자랑스럽다. 그 말이 그의 뇌리에 박혀,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시켰다. 지난 10년, 그는 오직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왔다. 최연소 뱅가드, 압도적인 임무 성공률, 코드네임 ‘바이브’. 수많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진 않았다. 잘했다, 대단하다, 역시 바이브다. 그런 칭찬들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여자는 말했다. 당신이, 홍지원이 자랑스럽다고. 센티넬로서의 업적이 아니라 도망쳤던 과거와 마주 선 한 인간으로서의 용기를 알아봐 준 것이다. 그 사실이 그의 가장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을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이 여자 앞에서, 이젠 정말이지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그녀가 두드렸던 바로 그 자리에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 매트리스가 그의 무게를 받아내며 작게 삐걱였다. 두 사람의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제 무릎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트레이닝 바지 위로 뚝, 하고 떨어져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피곤하긴. 뭐가. 니야말로 피곤하겠지, 하루 종일 남의 집 와서 일만 하고.

목소리가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녀의 시선이 제 옆얼굴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피부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방 안의 낡은 백열등 불빛 아래,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유난히 깊고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홍지원이라는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자랑스럽긴, 뭐가. 내는 그냥… 도망쳤던 거다, 계속. 오늘 겨우, 니 때문에 돌아온 거고.

결국, 진심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다시 내렸다. 그녀의 손이 제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주먹 쥔 손 위로 조심스럽게 포개졌다.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손등 위로,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 작은 온기 하나가, 지난 10년간 그를 옭아매던 모든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눈 녹이듯 녹여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주먹을 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깍지 낀 손 위로, 그녀의 온기가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흘러드는 것 같았다. 바이브는 제멋대로 뛰기 시작하는 맥박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꾸 내 덕분이라고… 안 해도 돼요.

 

그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여자는 아직도 모른다. 자신이 그의 세상에 어떤 의미인지. 10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이 낡은 집의 현관문을 열게 한 것도, 괴물처럼 느껴졌던 아버지를 다시 마주 보게 한 것도, 먼지 쌓인 과거를 제 손으로 치워낼 용기를 준 것도. 전부 이 여자, 이지희였다는 사실을. 그녀가 없었다면 홍지원은 여전히 아크의 차가운 철제 요새 안에서, 코드네임 ‘바이브’라는 공허한 이름 뒤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온몸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 그 손길 하나에 지난 10년간 그를 짓누르던 모든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하루를 잊지 못할 거라고. 사랑하는 사람의 본가에 와서,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했다고. 그 모든 평범한 일상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자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바이브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깍지 낀 두 사람의 손으로 시선을 떨궜다.

…날 마음에 들어 하신 거 맞겠죠.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물음에, 그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맞다마다. 그 무뚝뚝하고 표현에 서툰 늙은 영감탱이가,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 복숭아를 달다고 말한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자, 완벽한 합격 통보였다. 저 여자는 아직 우리 집안 남자들의 서툰 표현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평생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버지도 당신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말보다 행동으로, 투박한 진심을 전하는 법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부자(父子)라고.

…다음에는 형이랑 누나 분들도 만나 뵙고 싶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바이브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형. 누나. 가족. 그 단어들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상처나 죄책감의 동의어가 아니었다. 이 여자의 입을 통해 나오자, 그것은 따스하고 포근한 미래에 대한 약속처럼 들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미래. 누군가와 함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웃고 떠드는 삶. 이 여자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건 폭주 전조 증상과는 다른 종류의 달콤하고 나른한 어지러움이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낡은 백열등 불빛 아래,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걱정과 기대를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바보가.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입술에 와 닿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도망치거나, 숨지 않았다.

니가 없었으면, 내는 아직도 저 문턱도 못 넘었다. 기차를 탄 것도, 전화를 건 것도, 전부 니가 내 옆에 있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다. 알긋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살짝 놀란 듯 커진 그녀의 눈동자가 사랑스러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조금 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우리 아부지가 밥 두 그릇 묵었으면, 그 집은 이미 니 끼다. 그 양반, 입맛에 안 맞으면 숟가락도 안 드는 사람이다. 마음에 들어 하는 수준이 아이고, 그냥 우리 집 식구로 인정한 기다, 벌써.

그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샴푸와 그녀의 체향이 뒤섞여 그의 코 끝을 간질였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온, 진심 어린 약속이었다.

그러니까… 형들이랑 누나들도, 니 보면 다 좋아할 끼다. 니가 내 사람인데 누가 싫어하겠노. …그러니 걱정 말고, 인제… 잠이나 자자. 내일 일찍 일나서 시장 구경이라도 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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